023-02-땅이 바닥이고 하늘이 지붕
하지만 오래 기다릴 것도 없었다. 누군가가 봇짐을 짊어지고 자신들이 왔던 길을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박정훈을 비롯한 네 명은 숨죽인 채 숨어 있다가 그가 가까이 오자 앞뒤로 포위하듯 모습을 드러냈다.
경완은 등에 진 봇짐을 내려놓으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리고 박정훈을 정확히 보며 물었다. 그의 눈썰미는 누가 대가리인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저한테 볼일이 있으세요?”
“네 이름이 이경완이냐?”
“아닌데요?”
“아니라고?”
경완의 뻔뻔한 대답에 박정훈의 어조가 살짝 올라갔다. 인적 드문 이곳으로 오는 생고생을 했는데 목표를 잘못 찾아왔다니 살짝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이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노숙자? 그런 놈이 또 있을 수 있나?
박정훈은 폰을 꺼내 사진을 불러왔다. 경찰서에 심어둔 빨대를 통해 얻은 이경완이라는 놈의 사진이었다. 경찰서 내에서도 생명의 은인과 썩어빠진 근성이란 이중성으로 유명한 놈이라 호기심에 놈의 사진을 찍은 경찰이 몇 명 있었으니까.
그는 폰을 든 손을 쭉 내밀며 화면에 띄워진 사진과 경완의 얼굴을 비교했다.
“맞는데 이 씹새끼야?”
“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들통 나자마자 길도 없는 옆으로 몸을 던지는 경완을 보며 그들은 잠시 현실을 부정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나마 박정훈이었다.
“쫓아가, 이 새끼들아!”
그 말에 그들은 열심히 쫓아가 봤지만 싸움에 대비하겠다고 피하지방과 근육을 뒤룩뒤룩 찌운 그들이 무료급식소를 매일 방문하느라 하체가 단련되고 몸이 가벼운 경완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결국 경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들은 추적을 포기하며 헉헉 숨을 골랐다.
“씨부럴!”
박정훈은 빡쳤다. 놈이 이렇게 상황 판단이 빠르고 기민하게 행동할 줄은 몰랐다. 아니 처음에 놈과 조우했을 때부터 살벌한 긴장감이 형성되었다면 이렇게 놓칠 리가 없었다.
놈을 놓친 것. 그것은 자신의 이름마저 부정하는, 놈의 뻔뻔한 태도에 잠시 방심한 탓이었다.
“형님 어쩌죠?”
똘마니가 물었다. 박정훈은 잠시 고민하더니 큰 결심을 했다.
“애들 다 모아야겠다.”
어린 노숙자 새끼 한 놈 잡는데 애들을 대거 동원하면 체면이 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박동칠의 증언과 지금 놈이 보여준 판단력을 보면 보통 놈이 아니었다. 어차피 지금의 실패를 만회하지 않아도 체면이 상하는 건 똑같았다.
날랜 놈이었다. 최대한 다수를 동원해서 사냥감 몰듯이 몰아야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새끼가 돌아올까요?”
다른 똘마니가 우려했다. 합리적인 걱정이었다. 노숙자이기 때문에 거처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박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 한 번쯤은 돌아올 거다.”
그는 밑바닥 인생들을 안다.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보잘 것 없는 소유물에도 집착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마저 잃어버리면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가진 것에 미련을 갖지 않는 사람을 박정훈은 본 적이 없었다.
“돌아가자.”
박정훈의 말에 똘마니들은 길도 없는 숲을 걸었다. 걷기 힘들고 숨이 차오르는 걸 느낄수록 그들은 경완을 잡아 어떻게 요리할까라는 악의를 키웠다.
그때 어디서 길쭉한 것이 날아와 한 똘마니의 허벅지에 박혔다. 뭔가가 허벅지에 파고드는 날카로운 통증에 놈이 쓰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뭐, 뭐야!”
“저기!”
한 명이 저 뒤에 있는 경완을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리는 약 10미터. 어떻게 이렇게 가까이 올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박정훈은 의문과 당황을 뒤로 하고 서둘러 똘마니들을 다그쳤다.
“저 새끼 잡아!”
발목까지 푹푹 들어갈 정도로 낙엽이 쌓여있었지만 경완이 도망가지 않으면 몇 초 안에 붙잡힐 거리였다.
하지만 그는 도망치는 대신에 등 뒤에 숨겨져 있던 손을 빼들었다. 손아귀에는 팔 길이 정도 되는 막대기 세 개가 쥐어져 있었다.
몽둥이로 쓰기에는 너무 얇고 회초리로 쓰기엔 꽤나 굵은 막대기의 끝에는 뾰족한 것이 박히고 덩굴로 칭칭 감겨 창날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경완은 급히 만든 투창을 선두에 달려오고 있는 놈을 향해 던졌다. 그것을 보고 놈이 급히 몸을 비틀어 투창을 피했지만 그 바람에 뒤에 따라오고 있던 놈이 허벅지를 싸잡고 쓰러졌다.
그 사이에 선두에 있던 놈이 경완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붙잡힐 때까지 단 한 걸음.
경완이 투창을 휘둘렀다. 놈은 한쪽 팔을 들어 올려 머리를 가렸다. 투창을 이루는 막대기는 그리 두껍지 않아서 충분히 맞고 버틸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휘둘러지는 투창의 끝이 교묘하게 움직였다. 호를 그리던 투창은 어느새 직선이 되어 태클하려는 듯 상체를 숙이는 놈의 겨드랑이 아래에 파고들었다.
놈은 머리를 노리고 휘두르는 막대기를 막겠다고 그쪽 팔을 들어 머리를 가렸기에 그러한 변화를 인지하지 못했다.
“크악!”
격통에 달려온 기세로 그대로 고꾸라지는 놈을 넘어 비호처럼 달려드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박정훈이었다.
“이 씹새끼야!”
수북이 쌓인 낙엽이 뒷걸음질을 방해할 것을 이미 염두에 두고 있던 경완이 마지막 남은 창을 세우며 박정훈의 태클을 받았다.
그는 어깨로 경완의 복부를 들이받으며 허리를 끌어안았지만 어깨와 허리사이에 막대기가 끼워져 방해했다.
처음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지만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 그는 그대로 몸을 밀어붙였다. 경완은 자신을 쓰러뜨리려는 놈의 의도에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허리와 몸을 비틀어 놈의 균형을 흔들었다.
“큿!”
불완전한 태클, 불완전한 균형.
놈을 아래에 깔고 마운트 자세로 제압하려 했던 박정훈은 경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옆으로 쓰러졌다.
엎치락뒤치락!
낙엽이 흩날렸다. 우월한 체격으로 상위 포지션을 점하려는 박정훈과 불리한 상황을 피하려는 경완의 몸싸움은 경완이 박정훈과의 사이에 다리를 밀어 넣는 것으로 끝났다.
경완이 다리로 박정훈의 몸을 힘차게 밀어 찼다. 아무리 박정훈의 체격이 좋아도 다리의 힘은 팔의 세 배. 완전히 체중을 싣고 제압한 상황도 아니라 두 사람의 몸이 떨어졌다.
경완은 그 힘을 받아 몸을 굴리며 탄력을 이용해 몸을 일으켰다. 박정훈도 서둘러 일어나 주머니 속의 칼을 뽑아냈다.
경완이 물었다.
“아저씨. 박동칠이라고 알아요?”
그 말에 박정훈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어디까지 알고 있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런 표정 변화는 경완에게 충분한 확신을 주었다. 저들의 추적을 뿌리치고 난 후에 곧장 든 생각.
'도대체 누가 저들을 보냈을까?'
그 인과관계를 유추하기가 어렵진 않았다. 딱 봐도 호의적이지 않은 자들을 보낼 만큼 원한이 있는 자? 과거의 악연들이 교소도를 나오자마자 행적을 감추고 노숙자가 된 그를 찾아낼 리가 없으니 남은 건 박동칠 한 사람뿐이었다.
애당초 이러려고 경완이 저지른 상해를 문제 삼지 않겠다고 그렇게 빨리 형사와 합의한 것은 아닐까?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마약사범 범죄자라고 법을 이용하지 않을 거라는 건 멍청한 생각이다. 그들 같은 범죄자가 일반인들보다 오히려 법에 대해서 잘 알았다.
상대방이 어떤 놈인지 잘 알아야 더 찰지게 욕할 수 있는 것처럼, 법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분명히 알아야 법을 더 잘 어길 수 있었다.
경완은 배후에 대해선 더 들을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입을 다물 생각도 없었다.
“아저씨. 아저씨 똘마니들 빨리 병원에 안 보내면 죽을 거예요.”
박정훈은 그 말을 한 귀로 흘려버리고 경완의 허점을 찾아 조심스레 한쪽 발을 내밀었다. 복부도 아니고 팔다리 좀 찔린 정도야 대수랴?
그런데 이어진 경완의 말이 그의 평정심을 흔들었다.
“이 창끝을 뭐로 만들었는지 아세요? 녹슨 못하고 버려진 깡통이에요. 빨리 병원에 데려가지 않으면 파상풍에 패혈증으로 죽을 걸요?”
박정훈은 그제야 창끝을 자세히 보았다. 그저 금속으로 된 건 줄 알았는데 깡통을 찢고 뾰족하게 접은 물건이었다. 병균이 드글드글하리라는 건 깡패도 알 수 있었다.
박정훈의 입술이 분노로 뒤집혔다.
“이 씹새가.”
도대체 언제?
“이 산에 등산하는 사람들이 좀 많거든요. 제가 이래 뵈도 사람들 선의로 먹고 사는 인간이라 눈에 보이는 쓰레기 같은 걸 주워 모아놨죠.”
무료급식소 같은 거야 말로 사람들의 선의가 아니면 유지가 되지 않는 곳 아닌가? 거기서 끼니를 해결하는 경완은 작게나마 마음의 빚을 갚으려고 눈에 보이는 곳의 쓰레기를 주워 모았다. 충분히 모이면 나중에 한꺼번에 버리려고.
그런 마음 씀씀이 덕분에 투창을 급조하기 위한 도구와 재료를 금방 확보할 수 있었으니 세상일이란 참 요지경이었다.
한 편 박정훈의 마음이 급해졌다. 마음이 급해지다 보니 손이 어지러워졌다. 자신은 나이프, 상대는 그보다 더 긴 무기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급한 마음이 더 급해졌다.
그는 똘마니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서둘러 곁눈질을 해봤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걷기도 힘든 숲속에서 다리를 다친 두 놈은 오히려 짐이 되었고 겨드랑이 밑을 찔린 놈은 폐라도 다쳤는지 창백한 얼굴로 쌕쌕 힘겹게 호흡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피해 없이 경완을 제압할 순 없을 거라고 판단을 내리고 각오를 다졌다.
원래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건 건달들의 세계에선 그리 드문 일도 아니다. 다만 그런 각오를 저 냄새나는 어린 노숙자를 상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힐 뿐이었다.
푹!
허벅지를 노리던 창촉이 두터운 손바닥에 박혔다. 박정훈은 고통을 참고 그대로 손바닥을 뚫은 창끝을 쥐며 나이프를 든 칼을 경완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죽어엇!”
그야 말로 회심의 한수, 시기적절한 출수였다..라고 그는 생각했다. 어느새 경완의 손에 들린 부엌칼에 휘두르던 손목이 꿰뚫리기 전에는 말이다.
푹!
“끄아아악!”
하박의 노뼈와 자뼈 사이를 정확히 뚫고 나온 부엌칼에 박정훈이 비명을 질렀다.
그런 그를 보며 경완은 어딘가 섬뜩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잘 걸려드네.”
사실 경완의 수법은 목숨이 몇 개라도 부족한 방법이었다. 상대가 전력을 다해 칼을 휘두르도록 허점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한 만큼 쓸데없는 혈전이나 난투극을 벌이며 심신을 소모하지 않아도 되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방법이기도 했다.
경완이 부엌칼을 비틀자 박정훈은 비명을 지르며 간신히 쥐고 있는 나이프를 놓았다.
경완은 떨어지는 칼을 빈손으로 받아내고는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또~ 만났네, 또~ 만났어. 좆같은~ 그 사람.”
“그만~! 그만~!”
고통에 애원하는 그의 명치로 경완의 발끝이 날아올랐다.
호흡에 곤란을 느끼며 입가로 침을 흘리고 수그리는 그를 보며 경완은 흥이 나지 않는지 곡을 바꾸었다.
니가~ 슬플 때~ 니가 아플 때~
내가아 부르는 노~래~
얻어맞는 사람~은~ 후려맞은 사람~은~
어차피- 병~신이라네~
경완이 그리 길지 않은 곡을 한 곡 끝냈을 때 박정훈은 넋을 놓은 사람처럼 멍하게 흐느끼기만 했다. 경완의 손에 손목의 인대와 발목의 아킬레스가 끊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은퇴를 해야하는 박동칠로부터 조직을 물려받아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는 그의 꿈이 아침해에 안개가 사라지듯 허망하게 흩어져 버렸다.
경완은 어기적어기적 도망가는 박정훈의 똘마니들을 보고 핏방울이 묻은 손으로 턱을 살짝 만지며 뭔가를 생각하다가 박정훈의 품을 뒤져 휴대폰으로 어디론가 전화했다.
“여보세요. 거기 ○○경찰서죠? 구 형사님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