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04-나도 검사님처럼 나랏밥 먹는 사람이다 이거예요
하지만 경력이 쌓이고 능력 있다고 평판도 쌓게 되면 종종 심리적으로 거부하고 싶은 의뢰인이 방문하곤 한다.
예전에 있었던 어떤 불쾌했던 의뢰를 떠올리던 강반욱은 자신의 신념이 어느새 직업윤리로 대체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법조인이 되기로 결심했던 이유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생각은 나지만 그것이 자신이 품었던 뜻이라는 게 지금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저 사법시험을 통과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땄을 때의 벅찼던 마음이 빛바랜 추억으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낯설 정도로 오래된 그것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정의일까?
자신이 그리 거창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게 지금의 자신으로선 도저히 믿기질 않았다.
자신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무엇을 희생한 것일까? 지금 자신이 품은 신념이 그만한 희생을 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는 혼란한 마음속에서 이경완이란 청년을 떠올렸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조금의 회의감도 품지 않는 그 단순함이 강반욱 변호사는 부러웠다.
= = = = =
04-나도 검사님처럼 나랏밥 먹는 사람이다 이거예요
이경완 신드롬.
그것은 이경완이 누구인가라는 특집 기사가 나옴으로써 절정으로 치달았다.
가난한 집안, 왕따, 자살하려는 부친에게서 살해 위협을 받은 과거가 있으면서도, 강간당할 뻔했던 소녀를 구하고, 용의자에게 죽을 뻔했던 형사를 구하고, 그로 인해 조폭들로부터 위협을 받은 끝에 싸우다 결국 중범죄자 수용소에 갇혀야만 했던 가여운 청년.
그것이 경완에 대한 대중의 인상이었다. 그 청년의 손에 다치고 불구가 된 사람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들 중에 무고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기에 대부분은 경완의 과한 손속을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법이 너무 가볍다며 정치인들을 비난하는 여론이 더 컸다.
몇몇은 경완의 대범함과 판사 앞에서 피해자 모친의 입에 코딱지를 튕겨 넣는 똘끼에 주목해서 컬트적인 밈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경완의 다른 능력에 주목했다.
“김 검사. 진짜 그럴 거야?”
“어차피 지금으로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젊은 김오민 검사는 선배 검사의 걱정 어린 눈빛에 시름 섞인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는 선배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충분히 이해했다. 현재 거의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유명한 범죄자에게 수사에 대한 도움을 받으려 하다니.. 언론에 알려지면 시끄러워질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거짓말 탐지기를 쓰는 게 어때?”
“써봤는데 시간 낭비였습니다.”
“그 이경완인가 하는 놈이 거짓말 탐지기보다 더 성능이 좋을까?”
“이 기자의 인터뷰가 사실이라면 한 번 쯤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난 모르겠다. 깨져도 네가 깨지지 내가 깨지는 것도 아니고.”
후배를 걱정하는 건 거기까지였다. 본인이 고집을 피웠으니 뒷감당도 본인이 하는 수밖에.
김 검사는 자신을 걱정해준 선배 검사에게 깍듯이 허리를 숙이고 나와 ○○교도소로 향했다. 이경완이라는 아주 유명한 재소자가 있는 그곳으로.
“김오민 검사라고 한다.”
“네, 안녕하세요.”
김오민 검사는 자신에게 인사하는 경완을 찬찬히 살폈다.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호남형의 청년이었다.
그는 벌써부터 이곳에 방문한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 최충곤인가 조충곤인가 하는 기자가 쓴 기사가 구라질 같았다.
그럼에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여기까지 온 고생과 비용을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거짓말을 판별하는 능력이 있다지?”
“비슷해요.”
“비슷하다?”
미간을 좁히는 김오민 검사를 향해 경완이 부연설명을 곁들였다.
“능력이라고 하면 마치 초능력 같잖아요. 그냥 신체 반응을 통해서 이 사람이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해 합치하는 말을 하는지, 아니면 반하는 말을 하는지 구분하는 기술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진실을 판별하는 건 아니군.”
“백 명이 있으면 백 개의 진실이 있는 법이죠.”
담담하게 대답하는 경완의 모습에 김오민 검사는 평범해 보인다는 첫인상을 수정했다. 눈앞의 청년은 뭔가 평범하지 않았다. 적어도 머릿속에 든 것은 말이다.
그에게 도움을 청하기 전에 사전 조사를 했던 김 검사에겐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 저 청년이 보이는 지적 수준이 그와 같은 배경을 가진 이들이 보일 수 있는 모습일까?
그런 의문은 저 청년이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논리로 지울 수 있었다.
김 검사는 첫인상에서 가진 실망 속에서 혹시나라는 한 가닥 희망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시험해 봐도 될까?”
“손목을 줘보세요.”
김 검사가 경완에게 손목을 내밀었다.
“당신은 검사인가요?”
“그래.”
“당신은 여자인가요?”
“아니.”
몇 가지 당연하고도 단순하며, 엉뚱한 문답이 몇 개 이어지고 난 후에 경완이 물었다.
“제 도움이 필요해서 온 거죠?”
“그래.”
“사실이네요. 싫어하는 상사가 있죠?”
“그래.”
“그것도 사실이네요. 혹시 그 상사가 대머리인가요?”
“그래.”
“안타깝게 대머리는 아닌가 보네요. 남자인가요?”
“그래.”
“잘생겼나요?”
“아니.”
“잘생겼나 보네요. 혹시 여친은 있으세요?”
“아니.”
“있으면서 아닌 척하기는. 여친을 만난 건 검사가 되기 전이죠?”
“응.”
“검사가 된 후네요. 혹시 소개팅으로 만났나요?”
“그래.”
“그렇군요. 그전엔 여친이 없었나요?”
“없었어.”
“있었군요. 캠퍼스 커플?”
“.. 됐다. 그만하자.”
김 검사는 손목을 당겨 빼며 말했다. 더 이상 볼 것도 없었다. 정확하고 신속했다. 마치 속마음을 그대로 읽히는 것 같아 섬뜩할 정도였다.
“어때요?”
“스무고개 같군.”
“절차는 똑같아요.”
네, 아니요, 두 가지 대답으로 하나의 답을 향해 가는 방법이 바로 스무고개다. 참과 거짓이란 대답으로 범주를 계속 줄여가다 보면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거기에 경완은 상대의 거짓말을 파악할 수 있는 기술을 접목한 것이다.
오래전 전생에선 진실의 스무고개로 일컬어지며 수많은 거짓말쟁이을 나락으로 보낸 기술 중 하나였다.
“쓸 만한 것 같긴 하군.”
“그래서 제가 도와드릴 일이 뭐죠?”
“도와줄 건가?”
대가가 뭔지도 듣지 않고?
경완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차피 감방에서 하는 일도 없는데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해서 좋다 싶었는데 나중에는 좀 심심해지더라고요.”
김 검사는 속으로 쓰게 웃었다. 교도소는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곳인데 저렇게 느낀다니.. 법조인으로서 뭔가 좀 잘못되었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교도소 운영이나 형벌의 집행 같은 것에 관여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본래 목적에 충실했다.
“나는 범죄수익환수부에 소속되어 있는 검사다.”
현재 천 억대의 금융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가 잡혀서 은닉한 범죄수익의 위치를 찾으려고 하는데 도무지 입을 열지 않는다고 김 검사는 간단히 설명했다.
경완이 입을 열었다.
“그거 순 나쁜 새끼네요. 좋습니다. 도와드리죠.”
“흠..”
“왜요?”
“아니 너무 간단히 수락해서..”
“미안하면 치킨 네 마리.”
“그걸 다 먹을 수나 있겠어?”
“일 시킬 때마다 한 마리씩 사 들고 오면 되잖아요?”
김 검사는 자신을 헛똑똑이로 보는 경완의 눈빛에 변명하듯 이렇게 대답했다.
“네 번이나 와야 할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금융사기 같은 복잡한 일인데 하루 만에 해결이 되겠어요?”
그럴듯한 이야기라 납득한 김오민 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며칠 후 죄수복을 입은 중년의 남성과 경완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김 검사님. 이거 뭐 하자는 짓입니까?”
“범죄수익 환수를 위한 수사 과정입니다.”
김 검사의 말에 중년 남성은 경완을 보더니 어이없어했다.
“저 죄수가 무슨 수사를 돕는다는 겁니까? 혹시 저와 관련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거야 보면 알겠죠. 그럼 시작하지.”
김 검사의 말에 경완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년 남성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중년 남성은 뭐 하는 거냐며 손목을 빼내려고 했지만 경완의 손아귀는 마치 바이스로 조이는 것처럼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도저히 저 호리호리한 몸매에서 나오는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경완이 그를 진정시켰다.
“괜찮아요. 안심해요. 다치게 하지 않아요.”
뭔 개소리야?! 중년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이것은 혹시 이해하지 못할 상황에 자신을 밀어 넣고 당황한 사이에 자신의 입에서 은닉한 재산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찾아내려는 김 검사의 음흉한 계획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실은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김 검사는 중년 남성에 대한 프로필을 읊는 것으로 심문을 시작했다.
“이름 왕대한. 나이 42세. 남성. 맞습니까?”
“네.”
“왕대한 씨는 크리에이티브 캐피털이라는 사모펀드를 조직하고 이를 이용해서 천억 원대의 전형적인 폰지사기를 저질러 법정에서 유죄를 받았습니다. 맞습니까?”
“아, 그건,”
“아무튼 법정에서 유죄를 받은 거 맞죠?”
“네. 그렇긴 하지만 분명 오해가 있고 거기에 대해 항소를 할 겁니다.”
그 말에 김오민은 경완을 보았다. 경완이 입을 열었다.
“오해가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고 항소한다는 말은 사실이네요.”
“이게 뭔 헛소리,”
“그럼 다음 질문.”
김 검사는 왕대한의 말을 잘라버리고 심문을 계속했다.
“당신이 재산을 은닉한 수단 중 하나가 무기명 채권 맞습니까?”
“은닉한 적 없습니다. 투자가 좀 실패한 것뿐이네요.”
“구란데요.”
경완이 끼어들자 왕대한은 불쾌한 눈빛으로 경완을 보았다. 하지만 경완은 그를 보지도 않고 김 검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은닉을 안 했다는 것도 구라고 투자 실패했다는 것도 구라네요.”
“무기명 채권이라는 건?”
“거기에 대한 대답은 안 했으니 모르죠. 다르게 질문해 보시죠.”
“흐음..”
김 검사가 어떻게 질문해야 무기명 채권으로 은닉한 사실이 있는지 대답을 받을 수 있을지 고민할 때 경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런 질문은 어때요? 무기명 채권을 은행에다 보관하고 있는지, 아니면 어디 마늘밭 같은 곳에 묻어뒀는지.”
오! 좋은 생각이었다. 어차피 무기명 채권으로 범죄수익의 일부를 은닉한 것은 확실하다고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 법. 분명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기명 채권은 비자금은 물론 범죄수익을 은닉하는 유서 깊은 방법이었다.
“왕대한 씨. 무기명 채권을 은행에다가 보관하고 있습니까?”
“아니 그런 적 없다니까요.”
“오호! 사실이네요.”
경완의 말에 김 검사의 눈이 빛났다.
“그럼 은행이 아닌 곳에 보관하고 있습니까?”
“그런 거 없다니까!”
“거짓말이네요.”
“그럼 어디에 보관하고 있습니까?”
“검사님.”
경완이 끼어들었다. 김오민은 무슨 일이냐는 듯이 그를 보았다. 경완은 다소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질문을 하시면 안 되죠.”
“그러면?”
“제가 시범을 보여드릴게요.”
김 검사가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경완이 왕대한을 보며 질문을 던졌다.
“무기명 채권은 경남에 있나요?”
“뭔소리야?”
“아니면 경북에 있나요?”
“김 검사님? 이런 비이성적인 심문이 법적으로 용인될 거라고 봅니까?”
“남부지방에 있긴 한가요?”
“김 검사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이나 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