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04-나도 검사님처럼 나랏밥 먹는 사람이다 이거예요
왕대한이 언성을 높이자 김 검사가 차갑게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경완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남부지방에 없으면 중부지방에 있나요?”
“허! 참!”
“오! 방금 입질이 왔어요. 영동지방에 있어요?”
“이보게.”
“영동지방엔 없구나. 그럼 영서지방? 경기도? 서울?”
“자네 무슨 독심술 하나? 무슨 수로 김 검사를 꼬았는지 모르지만,”
“서울이 아니면 인천?”
“이보게. 사람 말 좀,”
“인천에 있나 본데요? 혹시 인천에 이 사람하고 관련된 사람 있어요?”
“잠깐만.”
김 검사는 급히 서류를 뒤적거리더니 한 명의 이름을 꺼냈다.
“전 부인인 박금순의 거주지가 인천이야.”
“아하!”
경완은 깨달았다는 듯이 왕대한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박금순 씨가 무기명 채권을 보관하고 있나요?”
“....”
“한 20억?”
“....”
“20억이 아니면 한 50억?”
“....”
“50억 정도라네요. 그럼 다른 곳에 따로 무기명 채권으로 숨겨놓은 재산이 있어요?”
“....”
“있네, 있어. 인천에 마누라 말고 돈 숨겨주고 있는 사람 또 있어요?”
“....”
“오! 있다고요? 친척? 친척 아니고, 처가? 처가 아니고, 친구? 어? 친구도 아니면 혹시.. 내연녀? 이야~. 이 아저씨 그 나이에 능력도 좋네. 내연녀는 어떻게 만났어요? 룸살롱에서? 20대? 30대? 30대면 띠동갑이에요?”
“너, 너, 너, 너 누구야?”
왕대한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창백해진 얼굴로 경완을 쳐다보았다.
경완은 그에게 환한 미소를 보여주며 대답 없이 그저 질문을 이어나갔다.
왕대한은 입을 꾹 다물었지만 소용없었다. 몸은 솔직했으니까.
계속된 경완의 질문은 범주를 줄여나가다가 결국 한 오피스텔에 숨겨놓은 룸살롱 출신의 내연녀에게 또 다른 무기명 채권 50억 원의 소재가 밝혀지게 되었다.
이로써 총 천억 원의 범죄수익 중 100억을 환수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남은 것은 900억. 갈 길이 멀었다.
김오민 검사는 경완의 능력에 매우 만족했다.
“수고했다.”
“치킨은요?”
“여기.”
심문이 끝나고 영혼이 탈곡된 것 마냥 넋이 빠진 왕대한을 구치소로 돌려보낸 김오민 검사는 경완을 위해 치킨을 시켰다. 경완의 능력 덕분에 환수할 수 있었던 금액만 무려 100억. 경완이 비록 재소자라지만 그의 공로에 비하면 치킨은 정말이지 약소한 보상이었다.
“정말 대단한 재능이야.”
“별거가 맞긴 하죠.”
경완의 자찬에 김오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콜드 리딩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경완처럼 해내진 못할 것이다. 그는 감탄한 시선으로 치킨을 뜯는 경완을 보다가 갑자기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네, 접니다. 압수수색 했습니까? 나왔다고요? 잘 됐군요. 수고하셨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고 치킨을 뜯는 경완에게 말했다.
“네 말대로 내연녀 집에서도 50억가량의 무기명 채권이 나왔다는군.”
“잘됐네요.”
“왕대한 입장에선 날벼락과 같은 일이지.”
“아직 떨어질 날벼락이 더 남지 않았나요?”
경완의 말에 김오민 검사는 기분 좋게 웃었다. 경완의 말대로였다. 아직 900억이나 환수되지 않은 범죄수익이 남아있었다.
금융범죄에 대한 정의구현은 판사의 판결이 아니라 오직 범죄수익 환수로 매듭지을 수 있다는 것이 김오민 검사의 생각이었다.
“앞으로 좀 복잡할 거야.”
“그렇긴 하겠죠.”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기명 채권이나 현금은 은닉 장소를 알아내면 되지만 차명계좌나 페이퍼 컴퍼니, 암호화폐 같은 것으로 한층 더 복잡하게 숨긴 수익은 밝혀내기가 까다로울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럼 일이 끝날 때까진 치킨을 계속 먹을 수 있겠네요?”
“빨리 끝내면 빨리 끝낼수록 인센티브가 있다면 어때?”
“오! 동기부여를 할 줄 아시네요. 좋아요.”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천 억대 금융 범죄 사기꾼, 왕대한의 지옥이 시작되었다.
우선 차명계좌가 털렸다. 차명계좌의 개수, 현재 그것을 관리하고 있는 사람의 이름과 소재지, 위치, 얼굴까지. 김오민 검사가 왕대한 주변인의 사진까지 철저하게 준비한 덕분에 경완은 간단히 사진을 짚어서 누가 왕대한의 협력자, 또는 부하인지 가려낼 수 있었다.
차명계좌를 압수하고 일일이 알파벳을 짚어가며 암호화폐 주소와 비밀번호까지 모조리 알아내니, 마지막으로 페이퍼 컴퍼니를 이용해 은닉한 재산을 환수할 차례만 남았다. 페이퍼 컴퍼니로 은닉한 재산만 약 500억에 달하니 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데 경완이 그 페이퍼 컴퍼니의 첫 글자가 뭐로 시작하는지 물어보자마자 왕대한이 발작했다.
“하지 마! 제발! 죽는다고! 날 죽일 거라고!”
경완을 만나기 이전의 그 여유만만한 왕대한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강박증에 걸린 사람인 양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아마 경완에게 두 손이 잡혀있지 않았다면 자해를 시도했을 정도로 격렬한 반응이었다.
김 검사는 물론 교도관도 그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하지만 경완은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슬리퍼를 벗어서 놈의 입에 물렸다.
“우웁! 우우웁! 퇘! 뭐 하는 짓이야!”
“피가 나잖아요. 자기 자신을 소중히 해야 해요.”
얼핏 들으면 다정한 어조의 충고였지만 왕대한의 입장에선 정말이지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자신을 이렇게 몰아붙이고 있는 사람이 누군데!
“어차피 입은 필요 없으니까 자해하지 못하게 입에 뭘 물려놓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교도관님. 그럴 때 쓰는 거 없어요?”
“어, 어? 있긴 하지.”
경완이 친한 척 말을 걸자 감시하던 교도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도무지 통제가 안 되는 강력 범죄자를 구속하기 위한 구속구가 있긴 했다. 인권이니 뭐니 해서 여태 안 써서 먼지만 쌓여있지만, 전신을 구속할 필요는 없으니 자해하지 못하도록 입에 뭔가 물릴 수 있으면 충분했다.
김 검사가 교도관에게 말했다.
“부탁드려도 될까요?”
“잠시만요.”
교도관은 접견실 외부에 연락을 했고 곧 한 교도관이 입에 물려 자해를 방지하는 구속구를 들고 들어왔다.
그 모습에 왕대한은 발작하듯 소리를 질렀다.
“이러지 마! 이러면 안 돼! 여기서 그만둬야 해! 나 죽는다고!”
“왜 죽어요? 누가 죽여요?”
페이퍼 컴퍼니의 이름과 소재지에만 집중하고 있던 김오민 검사는 경완의 입에서 튀어나온 무심한 질문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여태 왕대한과 그가 모집한 이들이 벌인 조직적인 금융사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다른 이가 더 있었다?
왕대한의 반응은 그의 뒤에 다른 누군가가 더 있다는 걸 암시하고 있었다. 김오민 검사의 피가 들끓었다.
경완이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누가 죽인다는 말은 맞는 것 같은데, 시작할까요?”
“일단 페이퍼 컴퍼니 이름까지만 알아보지.”
“안 돼! 그만해!”
왕대한이 거부했지만 김오민 검사는 그가 자해하지 못하도록 그의 입에 구속구를 물린 후 페이퍼 컴퍼니의 이름이 무엇인지 얼마나 어떻게 은닉했는지를 질문했다.
대답에 왕대한의 입은 필요 없었다. 그에 대한 긍정, 부정은 그의 육체가 대답했고, 경완이 그 대답을 통역해 주었으니까.
질문이 끝나고 스케줄에 정해진 심문 시간이 다 끝났을 때 김오민 검사는 두 개의 페이퍼 컴퍼니 이름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100억을 숨겨두고, 하나는 400억을 숨겨둔 회사였다.
왕대한은 입이 자유롭게 되자마자 미친놈처럼 울면서 웃기 시작했다.
“흐흐흐! 다 끝났어! 다 끝났다고!”
“아저씨. 누가 아저씨 끝낸대요?”
“흐흐흐흐! 흐흑!”
경완의 물음에 웃기만 하던 왕대한이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경완이 한마디 했다.
“이 아저씨도 그냥 바지사장이었던 모양인데요?”
“아니 공범이지. 천억 중에 절반을 먹은 놈이니까.”
아무리 봐도 페이퍼 컴퍼니로 옮겨진 500억은 왕대한의 몫으로 보이진 않았다.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하긴 장물아비도 가격을 절반 넘게 후려치니까요.”
전당포도 평가금액의 절반을 제시한다. 장물아비는 위험을 감수하니까 더 많이 후려친다.
경완의 말에 김오민은 정말 큰 건이 뒤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500억짜리 페이퍼 컴퍼니. 그것은 어쩌면 왕대한 이놈이 그동안 천억이나 사기 칠 수 있도록 뒤에서 봐준 정치권이나 사법기관에 기름칠한 비용이 아닐까?
경완이 왕대한에게 물었다.
“아저씨. 살고 싶어요?”
“....”
왕대한이 원통한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럼 다 밝혀요. 다 밝혀서 매스컴을 타면 유명해져서 살 수 있어요. 아무리 썩은 구석이 있다고 해도 명색이 법치국가잖아요? 저기 남미처럼 갱단 고용해서 죽여 놓고 입 닦기는 힘들걸요?”
그 말은 김오민에게 한 가지 힌트가 되어주었다.
“여기까지 하지. 왕대한. 갑시다.”
“저기, 김 검사님! 제 치킨은요?”
급히 왕대한을 끌고 나가는 김오민에게 경완이 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가 대답했다.
“내가 소장님께 부탁해 놓지.”
“믿을게요.”
원래라면 감동적인 문구가 왜 이렇게 하찮게 들리는지.. 김오민은 경완의 소박함에 피식 웃으며 왕대한을 데리고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후..
“네가 이경완이라는 녀석이냐?”
“네. 그런데 누구세요?”
“황석칠 검사다.”
“안녕하세요.”
구김살 하나 없는 정장과 차가운 인상에 좋은 체격, 딱 봐도 나 일 잘하는 엘리트라는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혹시 김 검사가 싫어하지만 잘 생겼다고 생각한 상사가 바로 이 사람인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세요?”
“조사할 게 있어서.”
“김 검사님은요?”
경완의 물음에 황석칠 검사는 예상치도 못했던 소식을 전해주었다.
“죽었다.”
“.. 왜요?”
“교통사고였어.”
가라앉은 분위기로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는 어떤 생각에 잠긴 경완에게 불쑥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너 김 검사에게서 뭔가 들은 거 있어?”
“가령 예를 들면요?”
“김 검사가 수사하던 것 중에서 누군가의 이름 같은 게 언급된 적 있는가 말이다.”
“저야 죄수인데 그런 정보를 들을 수 있을 리가 있나요?”
“김 검사에게 다 들었다. 녀석이 수사하던 천 억대 사기의 수사에 네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저에 관해 들었다고요?”
“그래. !!!!”
황석칠이 방심하는 찰라 경완의 손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놀라 눈을 크게 뜬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럼 제 재주도 들으셨겠네요.”
“놔, 놔!”
“육구팔팔!”
뒤에서 교도관이 급히 다가와 경완의 팔을 붙잡았지만 황석칠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은 경완의 손아귀는 도저히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질문할게요.”
“하지 마!”
이상하게도 매우 당황하는 황석칠에게 경완은 질문을 던졌다.
“김 검사님, 사고가 아니라 타살이죠?”
“몰라!”
“김 검사님 죽인 놈들하고 혹시 같은 편이세요?”
“아냐!”
“육구팔팔!”
황석칠은 경완의 물음에 거칠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고, 교도관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에 경완을 부르는 언성을 높이며 팔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황석칠의 손목을 쥔 경완의 손아귀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오히려 손아귀에 점차 강한 힘만 들어갔다.
경완은 황석칠의 손목을 붙잡은 채 환하게 웃었다.
“재밌네?”
그 말이 왜 이렇게 살벌하게 드릴까? 경완의 말이 이어졌다.
“그거 때문이죠? 크리에이티브 캐피털, 창조 투자사. 400억짜리 페이퍼 컴퍼니.”
“이, 이거 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