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07-더 빌런 라이징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동기가 드러난 찰스는 꽤나 수다스러워졌다. 평생 짊어지고 갈 각오를 했던 짐을 상대가 강제로 열어젖히니 뭔가 마음의 빗장이라도 열린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껏 속에 있는 한을 쏟아낸 그의 표정은 한결 편해진 모습이었다.
[유감입니다, 미스터 아메스.]
김준이 사과를 표했다. 수사니 뭐니 해도 결국은 개인이 밝히고 싶지 않았던 사적 영역을 침범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찰스는 꽤나 너그러워진 모습으로 대답했다.
[뭐 괜찮아. 말하니까 편해지긴 하군.]
하긴 누가 이런 이야기를 들어줄까? 다른 남자랑 바람나서 이혼한 전 마누라? 그년을 생각하면 애가 없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제 끝난 거죠?”
얼른 퇴근해서 푹 쉬고 싶은 경완이 끼어들었다. 대충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야기가 다 끝난 모양이었다. 찰스가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거 어차피 못 알아듣는 그였기에 그가 필요 없는 상황이라면 얼른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김준은 그런 경완을 붙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톰이 찰스와 남았다.
사실 찰스에 대한 심문은 할 필요가 없었다. FBI가 허수아비도 아니고 어느 정도 동기를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경완의 능력이 필요했던 이유는 찰스라는 인재를 국가기관에서 아까워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총기를 사용했다지만 홀로 총을 쏘아대는 갱들 수십 명을 사살했다? 그건 홀로 스와트 팀에 준하는 전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마 그가 총기를 들고 체포에 저항했다면 정말 많은 피해가 일어났으리라..
하지만 그는 저항하지 않고 얌전히 체포당했다. 그리고 그 사실이 FBI를 비롯한 치안 기관의 관심을 끌었다. 어쩌면 국가를 위해 봉사하도록 회유할 수 있지 않겠냔 가능성이 타진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엔 걸림돌이 있었다. 그의 마음에 맺힌 응어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시간을 두고 회유해도 되지만 초능력 범죄에 대한 대응책을 요구하는 국민적 요구에 압박받는 정치인들이 자연히 행정부에도 압박을 가함으로써 소속된 심리학 전문가 및 프로파일러가 아메스에 대한 신속한 회유 방안을 내놓았다. 경완은 그저 그 방안을 실현할 수단에 불과했다.
경완은 그런 정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뭐 관심도 없었기에 설령 알았다고 해도 아무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관심사는 오늘 저녁이 무엇이냐는 것이었으니까.
“오늘 저녁은 뭐에요? 근사한 스테키?”
오늘 야근수당 대신으로 워싱턴식 스테이크는 어떠냐며 은근히 대답을 강요하는 경완을 외면한 김준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군가를 찾는 것 같았다.
“스테이시!”
그가 한 얼굴을 보고 이름을 불렀다. 틀어 올린 갈색머리, 회색 정장을 입은 늘씬한 몸매의 20대 라틴계 여성이 김준에게 이름을 불리자 어색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잠시 와봐요. 소개해줄 사람이 있으니까요.]
[들었어요. 그 독심술사.]
[알고 있군요. 그런데 왜 그래요?]
김준은 경완으로부터 자신의 뒤에 숨은 그녀의 행동에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스테이시가 어딘가 굳어있는 미소로 대답했다.
[저 사람 좀 이상해요.]
[많이 이상한 사람이긴 합니다.]
김준은 긍정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는 방증에 불과했다.
스테이시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오감이 아닌 다른 감각, 제6감을 각성한 그녀는 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S입자의 농도나 그것의 활성도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그녀의 감각에 잡힌 경완은 마치 S입자 덩어리와 같았다. 마치 S입자 공장이라도 된 것처럼 그를 중심으로 S입자가 주변으로 끊임없이 방사되고 있었다.
본인은 전혀 그 사실을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스테이시로서는 그가 초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닌 척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어쩌면 진실의 스무고개라는 건 초능력의 일종이 아닐까? 솔직히 평범한 사람이 정밀한 첨단 기계보다 예민하고 정확하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질 않았다.
“누구예요?”
경완은 김준이 뜬금없이 스테이시라는 여성을 부르니 예의상 물어봤다.
“인사해요. 여기는 스테이시. 제가 말했던 육감 능력자 있죠? 그녀가 바로 그 능력자입니다.”
“헬로.”
“Hi.”
김준의 소개에 두 사람은 어색한 인사를 교환했다. 물론 어색함을 느끼는 건 스테이시 혼자뿐이었을 뿐 경완은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저 여자를 부른 이유는요?”
그저 얼른 퇴근하고 싶을 뿐.
“알다시피 미스터 리를 초청한 이유가 진실의 스무고개를 전수하기 위해서잖습니까? 여기 스테이시는 저희가 보유한 요원 중에 독심술에 가장 적합한 재능을 지녔다고 평가받고 있는 인재입니다.”
앞으로 자주 얼굴을 보게 될 사이라는 말에 경완은 납득이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김준은 스테이시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는 어떻습니까?]
스테이시에게 S입자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아는 김준이 물었다. 그것은 경완에게 초능력이 있는 것 같으냐는 질문이었다.
이에 그녀는 잠시 경완을 보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좀 복잡해요. 주변에 S입자의 농도가 어마어마한데.. 본인은 그걸 모르는 모양이에요.]
기계로 검출한 적이 없다는 S입자. 그것이 경완의 주변에 밀집되어 있다는 그녀의 말에 김준은 심각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화제를 전환했다.
[흠. 그렇군요. 그럼 우린 이제부터 저녁을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가실까요?]
[거부권은요?]
[업무의 연장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김준의 말에 스테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능력자들도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높은 S입자 농도를 가지고 있지만 경완은 차원이 달랐다. 그녀가 보아온 능력자들의 S입자 농도가 반딧불이라면, 경완은 조금 과장해서 서치라이트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참 신기한 일이다. 미스터 리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어떻게 저렇게 많은 대량의 S입자를 몸에 두르고 있는 것일까?
한편, 경완은 김준으로부터 스테이시가 합류한다는 말에 이렇게 물었다.
“혹시 저한테 미인계 거는 거예요?”
“딱히 그런 의도는 없지만 걸리면 저희야 좋죠. 약점 하나 잡을 수 있으니까. 혹시나 해서 묻는데 저런 타입이 좋습니까?”
김준도 어느 정도 경완에게 적응했다. 되도록 뇌를 거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사실 천하제일의 독심술사를 앞에 두고 거짓말을 해서 전전긍긍하는 것보단 차라리 솔직히 속에 있는 말을 해버리는 편이 나았다. 그편이 정신건강에도 좋고 말이다.
보안은 사수인 톰이 자신에게 제공하는 정보를 조절해서 알아서 잘 관리해 줄 것이다.
“타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예쁘냐가 중요하죠.”
“저 정도면 예쁘지 않나요?”
김준의 말에 경완이 스테이시를 향해 돌발적으로 말했다.
“히 새드 유아 프리티.”
“....”
“풋!”
자신을 엿 먹이는 경완의 행동에 얼이 빠진 김준과 그만 웃겨서 웃음이 터지고만 스테이시였다.
아무튼 세 사람은 함께 워싱턴 시내로 향했다. 인터넷으로 미리 빈자리가 있는 레스토랑을 찾아 예약해두었기에 별다른 기다림 없이 곧장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경완은 식사를 하며 두 사람과 대화를 하던 와중에 자신의 주변에 S입자가 그야말로 엄청난 농도로 밀집되어 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경완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김준이 그에 관해 솔직하게 밝힌 것이다.
“호오! 그게 느껴지는 건가요?”
경완은 새삼 스테이시를 다시 보았다. 그녀의 초능력이라는 육감이 그가 깊은 명상상태에 들어갔을 때 얻는 감각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감각을 명상 상태가 아니라도 느낄 수 있다고?
경완은 일단 그녀의 대단한 점은 젖혀두고 그녀가 말한 자신의 상태에 주목했다.
S입자의 농도가 너무 짙다고?
그런데 왜 자신을 그것을 모르는 걸까? 항시 짙은 농도의 S입자에 휩싸여 있다 보니 깊은 명상 상태가 아니라면 S입자를 못 느끼는 것일 수 있었다. 마치 물고기가 물 밖에 나와서야 물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처럼 말이다.
경완은 스테이시에게 S입자에 대해서 더 물어보았다. 그리고 초능력자가 능력을 사용하게 될 경우에 이 S입자가 활발하게 움직인다는 정보도 얻었다. 소모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는지는 그녀도 아직 알지 못했다.
좋은 정보를 얻은 경완은 호텔 방에서 명상에 잠겼다. 혹시 이 S입자가 천형(天刑)과도 같은 무한전생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될 수 있을까?
솔직히 회의적이었다. 초능력자들의 S입자 농도가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높다는 사실만 봐도 S입자가 무한전생이라는 특이성과 반드시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순 없었다. 명제가 참이라고 그 역이 참이라고 할 수 없듯이, 설령 무한전생이라는 특이점이 S입자의 계기가 되었더라고 S입자가 거꾸로 무한전생에 영향을 준다는 근거는 없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거라면 왜 지금까지 무한전생을 극복하지 못했겠는가?
하지만 경완은 회의적이라도 S입자에 대해서 탐구해 보기로 했다.
사실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했고, 궁금하기도 했다. 게다가 S입자가 초능력과 관련되어 있기에 혹시라도 강력한 초능력을 터득하게 될지도 모르지 않는가?
힘은 있으면 편리한 법이다. 그리고 또 모르지 않는가? 혹시라도 무한전생에 대한 실마리가 도둑같이 찾아올지도.
일과시간엔 FBI의 심문을 도와주며 스테이시에게 진실의 스무고개에 관해 알려줄 수 있는 요령은 알려주었다.
대신 경완은 그녀로부터 그녀가 관찰할 수 있었던 S입자의 움직임에 관한 정보도 들었다.
그녀가 말하는 S입자는, 때론 바람처럼 휘몰아치기도 하고, 블록처럼 덩어리져서 쌓아 올려지거나 해체되기도 하고, 줄어들어 압축되거나 팽창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만큼 그녀가 많은 초능력자들을 상대해왔다는 방증이자, 초능력 발생 사태 초기에 얼마나 일이 많이 터졌는지 알려주는 지표이기도 했지만 아직 그녀는 거기서 어떤 패턴을 찾아내진 못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전 세계에서 속속들이 각성하는 초능력자들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는 와중에도 미국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안정되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녀처럼 일선에서 헌신하는 이들과 행정부 및 정치권의 신속한 결단과 민간의 대처가 잘 조화된 덕분이었다.
그렇게 이번엔 별일 없이 경완의 미국 일정은 끝이 났다. 비록 이번에는 롸끈한 포상은 없었지만 다양한 정보를 얻는 등 나름 알찬 시간을 보낸 그는 귀국해서는 좀 쉬려고 했다. 집(?)에 돌아온 그 날 국정원 차장인가 하는 사람이 방문하기 전에는 말이다.
“본인은 국정원 제2차장 이관영이이라고 한다.”
“이경완이에요. 이름이 참 비슷하네요.”
경완에서 앞뒤 모음 바꾸고 자음을 바꾸면 관영이 된다.
이관영은 경완의 말에 얼굴에서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명색이 국가의 안보를 지킨다는 국정원 차장씩이나 되는데 범죄자 새끼랑 이름이 비슷하다니 기분이 좋겠는가?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국가가 너의 능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죄송하지만 전 댓글 조작이나 여론 조작에는 재능이 없는데요?”
뜬금없는 급발진에 이관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경완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저는 국정원 직원이 아니라서 댓글 달아도 대법원이 모욕죄만 인정해준다는 보장이 없거든요. 아, 그러면 원래 국정원 소속이 아니라서 모욕죄만 인정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