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08-비질란스
이 사달이 고작 경고라고? 어이없어하는 주일한국대사에게 경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누가 죽을 짓을 했다고 보기도 애매하잖아요?”
매뉴얼에 죽고 매뉴얼에 사는 인간이 바로 일본인들이었다.
왜? 매뉴얼로 규정된 규칙을 절대 준수할 정도로 민도가 높아서?
아니다. 매뉴얼대로 행동해야 책임을 회피할 수 있을 정도로 개인주의적이기 때문이다. 그저 ‘난 매뉴얼대로 했을 뿐입니다’라는 면죄부가 필요한 것이 일본의 흔한 조직문화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일본의 윗대가리부터 유체이탈 화법에 모르쇠와 책임회피의 귀재들인데 그 밑의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윗대가리의 책임 전가로부터 그들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주한일본대사의 말대로 ‘유치장에 갇힌 외국인 범죄자에게 밥을 언제 줘야 한다는 매뉴얼이 없어서 안 줬다’라고 충분히 개소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일본인 것이다.
누가 병신 짓을 하는 것을 보고도 ‘아, 저 새끼는 원래 병신이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분노를 다스릴 수 있다. 지금 경완이 자신을 굶긴 일본 경찰을 보고 드는 감정이 그와 비슷했다.
주일한국대사가 굳은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그럼 총은....”
“이건 다음에도 밥을 안 줄 때를 대비한 보험, 혹은 약속의 증표라고 치죠.”
“그건 좀 곤란하지 않을까?”
“그럼 어떡해요? 날 데리고 일본에 왔던 국정원 이 씹새들은 지들만 귀국해 버렸죠, 저는 일본어도 제대로 못하죠, 통역도 한 명 안 붙었죠, 그리고 밥은 굶기죠. 제가 뭘 믿고 마지막 남은 협상 카드를 내놔야 하는데요?”
“.. 날 봐서라도 양보해주면 안 되겠나?”
어이가 없는 소리였다. 경완은 기가 찬다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대사 아저씨. 우리 오늘 얼굴 처음 봤거든요?”
외국에 나가면 다 애국자가 된다지? 같은 동향 사람이 그리 반가워진다지? 그런데 한국인이 외국에 나가면 가장 조심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한국인이라는 말은 왜 나온 건데?
“커흠! 내가 이래 봬도 한국대사라네.”
나름 권한과 권력이 있다는 어필이었지만 경완에겐 통하지 않았다.
“한국대사면 뭐요? 한국외교부 무능한 거 어제오늘 일이 아니잖아요? 한국 홍보는 반크랑 문화재청보다 못해, 말레이시아 국빈한텐 인도네시아 말로 인사하고, 태국에선 한국인이 교통사고를 당해도 수수방관하고.”
“....”
“무능하고 그 무능함을 개선할 의지도 없으면서 낙하산만 오지게 투하하는 현대판 음서제 조직에서 한 자리 차지한 걸 가지고 믿어달라고 하면 제가 아이고 대사님 이 천한 서민을 도우려 해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넙죽 절이라도 할 것 같아요?”
참고로 음서제는 오직 귀족이나 양반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니 음서제로 외교부에 들어오시는 분들은 귀족이나 마찬가지시니 천한 서민이라는 경완의 자칭은 그 점을 꼬집는 말이었다.
귀족이라도 일만 잘하면 문제가 없지 않나?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오죽하면 외교부 장관이 직접 나서서 외교부 공무원들 영어능력이 부족하다고 외교부의 교육제도와 평가 기준 조정을 지시하겠는가?
주일한국대사의 얼굴이 화가 나서인지 수치스러워서인지 붉게 달아올랐다. 솔직히 두 감정은 막상 경계가 어디인지 선을 긋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향해 경완이 말을 이었다.
“정말 저를 진심으로 돕고 싶으면 주일미국대사에게 도움을 청해보세요.”
“.. 자네는 미국인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미국의 안보 이익에 크게 도움을 준 사람이기도 하죠. 앞으로도 요긴하게 써먹을 수사자원이기도 하고요.”
곤 회장이 미국과 친하고 미국의 국익과 밀접했다면 일본이 감히 그를 토사구팽하진 못했을 것이다.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와 밀접한 것이 그의 불운이었다.
주일한국대사는 경완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그 느린 사고회로는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
“장담하건대 미국은 일본이 저를 독식하는 걸 절대 반기지 않을걸요?”
하지만 경완은 그가 이해를 하든 말든 치킨을 뜯으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 = = = =
08-비질란스
결국 총기의 회수는 실패로 돌아갔다. 밤에 몰래 경완이 잠든 감방에 침입해보려고 했지만 어찌나 잠귀가 밝은지 그것마저 실패했다.
인질이 없이 총만 든 범죄자에게 발포를 허락할 수도 있었지만 여러모로 걸리는 점이 많았다.
이제 남은 총알이 고작 한발뿐이라는 점, 그리고 그 상황에서 크게 다친 사람은 경완을 사살하려고 했던 특수급습부대의 저격수 한 명과 그에게 달려들던 경관 한 명 뿐이었다는 점, 그리고 경완이 그 사달을 낸 이유가 굶겨서라는 점 등 다양한 이유들이 발포에 대한 상부의 결정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수면 가스나 최루가스 등의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결단도 망설이게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주일미국대사의 연락 때문이었다. 이번 일을 저지른 이경완이라는 범죄자는 미국에서 주시하고 있는 사람이니 함부로 상해를 입히지 말라는 것이다.
일본은 대체 왜 미국이 이 미친 개또라이 범죄자에게 관심을 주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당연하게도 미국은 미국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현실적인 이유, 즉 진실의 스무고개라는 경완의 심문능력이 매우 유용하다는 점이었고, 두 번째는 그에 대한 스테이시의 보고서 때문이었다.
몸 주변에 어마어마한 S입자가 농축되어 있는 남자.
S입자와 초능력에 대한 연구 레이스에서 앞서나가려는 미국에게 경완은 탐이 나는 연구 소재라 할 수 있었다. 인체실험을 떠올린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솔직히 초능력의 특성상 초능력자의 자발적 협조를 얻는 것만큼 연구의 성과가 좋을 것 같진 않았다.
결국 FBI에서 경완 리 전속 담당이나 마찬가지가 된 김준이 일본에 들어왔다.
“크게 사고를 치셨더군요.”
“아무도 안 죽이고 병신도 안 만들었는데요?”
‘떨어진 귀는 붙이면 되고. 근데 도대체 뭐가 문제야’라는 태도로 반문하는 경완의 태도에 김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경완의 태도가 그에게 미국 이민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지 못하는 사유이기도 했다. 예전에 그가 지나가던 말로 했던 것처럼 미국에서 사고라도 치면 그를 미국 시민으로 만든 책임자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텐데 경완이 하는 행동을 보고도 그가 얌전히 지낼 거라고 믿는 이는 적어도 FBI에서는 한 명도 없었다.
차라리 이렇게 동맹국인 한국에 보관(?)해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는 편이 안심이었다.
일본도 나름 미국의 동맹이기는 했지만 영 하는 거 보니까 안심이 안 됐다.
일본이 한 가지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제아무리 워싱턴에 돈을 뿌려가며 로비뽕을 펌핑해도 미국은 결코 진주만을 잊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미국은 일본이 경완의 전략적 가치를 알아보고 억류하기 전에 이렇게 빼돌리기를 결정했다. 일본이 경완을 해부라도 해서 초능력 연구 레이스에서 미국을 앞설 그 어떤 가능성도 제거하기 위해서 말이다.
마침 명분도 있었다.
“아무튼 빨리 미국으로 갑시다.”
“또 뭔가 일이 터졌나 보죠?”
“예전에 체포했던 변검술사 기억나십니까?”
영어로는 매니 페이스. 이슬람을 비판하던 교수를 청부 살해했다가 붙잡힌 청부업자 재크 오하이요가 탈출해버렸다. 이제는 그가 무슨 이름을 사용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요?”
“그의 능력이 진화했습니다.”
말 그대로 진화가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질량보존의 법칙을 무시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체형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된 매니 페이스는 체형과 골격의 한계를 극복하고 다른 사람으로 완벽히 변신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탈출했다.
“이건 심각한 위협입니다.”
완벽히 다른 사람으로 위장할 수 있다? 만일 고위 공직자, 권력자로 위장해 기밀을 빼내거나 미국의 이익에 큰 타격을 줄 치명적인 지시를 내릴 수도 있었다. 더구나 사람도 여럿 죽인 청부업자 아닌가? 돈에 애국심 정도는 얼마든지 팔아넘길 수 있는 놈이었다.
하지만 경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제가 도움이 될까요? 저는 심문 과정이 아니라면 딱히 쓸모가 없을 텐데요?”
이에 김준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이번에 미스터 리가 권총으로 저격수를 저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어.. 운이 좋았죠.”
“시치미 떼지 마시죠. 각성했잖습니까? 그것도 감각이 강화되는 에스퍼 계열로요.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바로 저격수가 있는 곳을 확인해서 반격할 수가 없죠. 게다가 권총의 유효 사거리를 초월하는 사격능력. 이건 뭐 광고하는 거나 다름없더군요.”
엄밀히 말해서 경완의 능력이 과연 에스퍼 계열인지는 본인조차 아직 알아가는 단계기 때문에 뭐라고 확언할 수 없었다. 대충이나마 설명하자면 S입자와 조금 감응해서 다룰 수 있게 된 수준?
하지만 굳이 그에 대해 솔직해질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경완은 대신 자신을 주시하는 커다란 스토커에게 일침을 가했다.
“이렇게나 미국에서 저에 대한 관심이 높다니.. 이거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아주 그냥 인터넷 검색목록까지 다 뒤져보시겠어?
하지만 그러한 말은 김준에겐 엄살로 들렸다. 저 영민한 머리로 미국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이미 파악하고 있지 않은가? 경완이 주일한국대사에게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라고 말한 사실도 이미 파악해 놓은 미국이었다.
김준이 되물었다.
“어차피 수사방해는 안 하실 거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일본에서 데리고 나가려면 나름 명분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해하시죠?”
그 말에 경완은 결국 두 손 들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야.. 역시 미국. FBI 수사관이 이런 협상 능력을 가지고 있다니.. 한국 외교부에서 좀 보고 배웠으면 좋겠네요.”
사실상의 항복 선언이었고, 그 매니 페이스인가 매니 페니스인가 하는 놈을 잡는데 한 손 보태겠다는 우회적인 승낙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경완은 마스크를 쓰고 유치장에서 나와 오키나와로 향했다. 당연하게도 김준을 비롯한 FBI와 일본 경시청의 몇몇이 붙은 상태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그의 출국에 관한 것을 쉬쉬했다. 사실상의 언론 통제 국가라 어렵진 않았다.
몇몇 저항하는 소수의 언론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그 영향력은 미미했으며 때마침 터진 연예인 스캔들이 정치에 무관심한 일본인들의 이목을 빨아 당겼다.
그렇게 경완은 마치 처음부터 일본에 없었던 것 마냥 일본에서 사라졌고,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LA 공항이었다.
“여기에 그 매니 페니스라는 놈이 잠적해 있다는 LA인가요?”
“페니스가 아니라 페이스입니다.”
“이야 듣던 대로 날씨 참 좋은 동네네요.”
경완은 김준의 딴죽은 한 귀로 흘리고 LA에 대한 감상을 평을 읊었다.
김준은 고개를 저으며 경완을 이끌고 한쪽으로 향했다. 미모의 라틴계 여성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테이시, 오래 기다렸습니까?]
[아니요. 저도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경완은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고는 불쑥 끼어들었다.
“두 사람 사귀어요?”
“네? 아닙니다.”
김준이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지만 경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그를 보는 김준의 심정은 그야말로 미치고 팔딱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대체 이 새끼는 도와주는 건지 재를 뿌리는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스테이시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