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08-비질란스
아무튼 경완은 나라의 초능력 범죄자 수용소 계획이 잘 굴러가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명상에 잠겼다. 아직 잘 시간까지는 좀 시간이 남았다.
그런데...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리는 것이 아닌가?
남자의 것인지 여자의 것인지 구분이 어려운 목소리에 경완은 처음에는 자신이 빙의된 이 몸에 여태 자신도 모르는 뇌질환이나 정신병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상대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지 차분히 이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텔레파시로 이렇게 생각을 전하는 거니까 당황하지 마세요.]
아~, 텔레파시 능력자구나. 경완은 바로 납득하고는 그 음성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래서 용건은?]
[와! 대단하시네요. 이렇게 바로 채널에 연결해서 대답한 사람은 여태 한 명도 없었는데.. 혹시 당신도 초능력자?]
[글쎄.. 좀 긴가민가해..]
무한전생을 초능력이라고 친다면 초능력일까?
[아무튼 그래서 용건은?]
[성격이 급하시군요.]
[한국인이라서 그래. 빨리빨리가 기본이거든.]
그저 귀찮은 일을 빨리 치워버리고 싶은 것뿐이었다.
그 말에 의문의 목소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용건을 꺼냈다.
[저희는 그동안 당신에게 깊은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지켜본 결과 당신이 우리와 함께했으면 좋겠습니다.]
[니들이 누군데?]
[그건 아직 밝힐 수 없습니다. 함께 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뭐 그건 됐고. 굳이 나인 이유는?]
[당신이 사상과 행동이 우리에게 합류하기에 적합하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죠.]
[능력도?]
[물론 그 말하는 이의 진심을 판별하는 당신의 능력도 충분한 고려사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상과 행동이라니? 내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는 조사해보면 알겠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아?]
[사회의 부조리를 비롯한 불의에 항거하는 것이잖아요.]
[올~.]
[우리고 그런 사람들,]
[완전히 틀렸는데.]
[네?]
의문의 목소리는 경완의 반박에 하던 말을 끊고 반문했다.
경완은 솔직하게 말했다
[솔직히 난 아무 생각 없거든. 사회의 불의니, 사상이니 하는 골치 아픈 거 따지기 귀찮아. 그냥 꼴리는 대로 사는 거지. 나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뭔가 투철한 사명감이나 신념이 있다는 식으로 오해하면 곤란해.]
[....]
정체 모를 텔레파시 능력자의 침묵 속에서 적잖은 당황이 느껴졌다. 분명 ‘어? 이게 아닌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목소리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불의에 분노하는 건 맞으시잖아요. 화가 안 났으면 그런 일들을 할 수가 없으니까요.]
[뭐 비슷하기는 해.]
혐오와 분노는 경계선이 모호하니까.
경완의 말에 목소리는 좀 더 적극적이 되었다.
[그 말은 당신에겐 불의를 용납할 수 없는 마음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와 함께 할 수 있어요. 우리 모두 다 그런 마음으로 모였거든요.]
불의라.. 불의란 무엇일까? 경완은 그 모호한 경계선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수많은 관점을 알고 있지만, 굳이 이 의문의 목소리와 그에 관해 토론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미안하지만 댁들에게 합류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적어도 당장은.]
[왜요? 감옥에 갇혀있어섭니까?]
[내가 조금 전에 말했잖아. 그냥 꼴리는 대로 살고 있다고.]
꼴리는 대로 윤간범 놈들을 고자로 만들었고, 꼴리는 대로 양아치 조폭을 반병신으로 만들었고, 꼴리는 대로 국해의원의 허리에 사시미를 박았으며, 꼴리는 대로 이웃 나라의 경찰돌을 조져놨다.
경완도 자신의 역량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좀 더 인내하고, 좀 더 준비하고, 좀 더 치열하게, 좀 더 열심히 살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더 풍족한 삶을 즐길 수 있는 능력과 경험이 있다는 걸.
하지만 그러기가 싫었다. 왜?
삶을 대하는 그의 마음이 아슬아슬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더 나은 환경은 필연적으로 사회, 또는 세상과의 타협이 필요했다. 그에게 속물적인 근성이 조금이나마 남아있었다면 기꺼이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한전생자였다. 물질적 만족의 한계효용이 어디까지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만큼 상상만 해도 뻔할 정도로 지겨웠다.
그래서 어디에서 만족할지 스스로 선을 그을 수 있었다. 이렇게 교도소 생활로 만족할 수 있는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데 그 선이란 그가 겪는 내면적 타협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 내면적 타협이란 참으로 복잡한 욕구와 가치관 사이에 벌어진 상호작용의 결과였다. 예를 들어 ‘씨발 좆같은 거 다 조지고 싶다!’와 ‘그래도 사람으로서의 선을 지켜야지’라는 생각 사이의 갈등과 그 둘 사이의 협의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누구나가 다 겪는 보편적인 내면갈등이지만 환경에 의해 그 선택이 제한되는 보통의 평범한 사람과는 달리 무한전생자로서 수많고 다양한 환경에서 전생하는 경완에게는 이 내면적 갈등의 결과는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 그의 자아정체성과도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이 물음에 각자 나름의 답을 내린 것이 가치관이며, 그것은 곧 자아정체성과도 같았다. 즉, 가치관이 무너진다는 건 곧 자아정체성이 무너진다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자아(自我)란 그 행간에 반드시 세상이란 단어를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세상’이란 배경이 없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질 대상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외부 세계가 없으면 자아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경완이 자기 말대로 이렇게 지 꼴리는 대로 사는 중인 것일 수도 있었다. 아직 ‘세상’과 어떻게 지낼지 결정 내린 것이 없기 때문에 말이다. 무한한 세월의 홍진세상은 경완에게 그에 대한 결정에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댁들처럼 뭔가 신념 같은 걸 품고 앞날을 계획해서 착실하고 성실하게 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가 달았던 '적어도 당장은'이란 단서는 그런 그이기에 달 수 있는 단서였다. 어느 날 문득 꼴려서 이 낯선 텔레파시 능력자가 속해있다는 수상한 무리의 일원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그런 경완의 말에 낯선 목소리가 되물었다.
[그래도 불의를 못 참는다는 공통점은 있지 않습니까?]
[아이고, 서로 좋아서 결혼한 사람도 결혼생활 하다보면 눈에 거슬리는 게 보이고 결국 성격차이라는 명목으로 이혼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 헐거운 관계로 모인 사람들이 참 사이좋게 잘도 지내겠다. 결국 단체나 조직 생활이라는 건 규율과 규칙에 의해 유지되는 건데 내가 방금 어떻게 산다고 했지?]
서로 좋아 결혼한 부부도 결국엔 서로 간에 지켜야 하는 규칙 같은 것을 암묵적으로, 혹은 상의해서 정하게 되는데, 여러 사람이 모이는 단체나 조직은 오죽할까?
어느 단체나 조직이든 그 형태를 유지되고자 한다면 필연적으로 관습이나 규칙을 갖추고 소속원들에게 그 규칙에 대한 준수를 요구한다. 그것이 바로 조직 생활, 사회생활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활은 소위 꼴리는 대로 살고 있는 경완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그렇군요. 하지만 당신의 표현대로 ‘꼴리게’ 되면 우리와 함께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경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한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자 경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꼴리면.]
[좋아요. 당신 같은 능력자가 우리에게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합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포섭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지만 경완은 심드렁했다.
[나 초능력자 아닌데.]
그 말에 목소리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텔레파시 능력자의 채널에 접속하면서도 초능력자 아니라고?’
그래도 포섭을 위해서 호감도 작업을 해둘 겸 일단 그에 수긍했다.
[... 설사 초능력자가 아니라도 당신이 보여준 과감한 실행력과 성공시킨 치밀함을 생각하면 능력자나 다름없죠.]
목소리는 경완의 얼굴에 금칠을 잔뜩 했다. 국회의사당 국회의원 습격 사건 때 경완이 보여준 역량을 생각하면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경완은 슬슬 이 대화가 지겹고 피곤해졌다.
[칭찬은 됐고, 이제 할 말 다 끝났지? 나 이제 잘 거야.]
용건이 다 끝났으면 얼른 꺼지라는 말에 목소리를 다시 말을 멈추었다가 고백하듯 이렇게 시작했다.
[이대로 채널을 닫기 전에 당신과의 연결을 좀 더 확장해 봐도 될까요?]
[그게 뭔 소린데?]
[지금의 연결은 매우 피상적입니다. 의식의 겉면만 읽는 것이죠. 하지만 좀 더 채널을 확장하면 내면의 심리도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거짓말하는지, 아니면 혹시 너희에게 위협이라도 되는지 확인하고 싶은 거야?]
[그런 것도 있지만 신뢰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확장된 채널은 일방적이진 않거든요.]
상대방이 이쪽을 읽을 수 있는 만큼 이쪽에서도 저쪽을 읽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 말에 경완은 흥미로워하며 이렇게 평했다.
[위험할 텐데?]
[괜찮습니다. 이미 여러 명과 해본 적이 있었지만 여태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능력에 적잖이 자신감이 있는 말투였다. 하지만 경완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 얘기가 아닌데. 뭐 경험해 보면 알겠지. 하지만 언제든 그 채널인가 뭔가를 닫을 준비를 해.]
[안전대비는 언제나 하고 있습니다.]
[내 쪽에서 해야 하는 건?]
[채널을 확장하면 감각이 확장되는 듯한 느낌을 받을 텐데 당황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강하게 거부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알겠어. 그럼 바로 시작하지.]
경완은 잘 시간이 아까웠다.
그의 전격적인 허락에 의문의 목소리도 곧장 시작을 알려왔다.
[그럼 시작합니다.]
목소리의 말마따나 감각이 확장되는 느낌이었다. 명상할 때의 감각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은 명상할 때는 감각이 '넓게 보는' 느낌이라면 지금의 채널이라는 것이 확장되는 느낌은 '멀리 보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렇게 확장된 감각 사이로 이질감이 느껴졌다. 만져지지는 않지만, 명백히 타인의 것이라고 느껴질 만한 무언가가 마치 손을 뻗듯 그의 정신으로 다가와 접촉했다.
그리고..
[으아아악! 우웨엑!]
고통과 구역질 나는 혐오감을 남긴 채 급히 채널이 닫혔다.
경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쯧쯧. 그러니까 위험하다고 했는데..”
정신의 접속이든, 정신공유든, 일단 무한전생자의 기억을 적절한 통제 없이 받아들이는 상황 자체가 위험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냐면 전생에선 드래곤이라는 위대한 지성종의 일원이 자폐증에 걸렸고, 천만 언데드 군사를 부리며 천년 간 대륙을 질타했던 언데드 군주 리치가 턴언데드 마법을 스스로 캐스팅해 군단과 함께 한 줌 재로 돌아갔으며, 은하계 전체에 진출해 번성하는 인류를 관리하던 초인공지능이 폭주해서는 때아닌 우주전쟁이 벌어질 정도였다.
물론 강제로 무한전생자의 혼백이나 정신을 탈취하고 자기마음대로 제어하려다가 벌어진 일이라 그랬던 것이고 방금처럼 살짝 핥고 지나간 정도는 충격을 먹기는 해도 치명적이진 않을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연약해도 회복능력이 없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소태는 핥아도 소태고, 똥 역시 핥아도 똥이다. 뭔 소리냐면 맛보는 것만으로도 쓰고 더러운 건 충분하다는 뜻이다.
쓰고 더러운 맛을 충분히 본 목소리가 돌아올 일은 없을 테니 슬슬 잘 준비나 하자며 이불을 깔던 경완은 의외의 상황을 맞이했다.
[다, 당신.. 도대체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