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09-다크 히어로와 빌런은 종이 한 장 차이
서 경사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사람은 상당히 경완을 정중하게 대했다.
“그동안 나라의 국격을 드높여 주신 것에 우선 감사를 표합니다.”
정중한 태도에 속내를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한 눈빛과 표정에 경완은 어깨를 으쓱했다.
“국격이요? 검사를 청부 살해한 국해의원을 전세계에 광고한 국격이요?”
“커흠! 그런 거 말고 테러를 막은 거 말입니다.”
서 경사는 당황을 헛기침으로 감추며 대답했다.
경완이 말을 이었다.
“나라의 국격이라. 참 이상하죠? 나라가 한 푼 보태준 것 없이 내가 열심히 했는데 내 격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국격이 올라가니까요.”
경완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유명한 밈을 떠올리며 말했다. 인간의 승리가 아니라 본인이 승리라던가? 분명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다.
정부나 언론이나 한 푼 보태준 거 없으면서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람의 명성에 숟가락을 얹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거 따지고 보면 염치없는 짓이다. 거창하게 표창장이나 하나 해주고 그러던가.
서 경사가 말을 대답했다.
“그야 나라란 국민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그렇다고 경완 씨 격이 오르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누가 뭐래도 테러 참사를 막은 영웅이지 않습니까?”
서 경사의 말에 경완은 이렇게 생각했다.
오! 제법 후장 빨 줄 아는 놈인가?
하긴 아무리 공무원 진급이 연공서열이라지만 실적도 필요하고 위에서 끌어주는 사람도 있어야 했다. 즉, 줄타기를 잘하는 눈치와 실적을 뻥 튀겨줄 동아줄을 단단히 물 수 있는 혓바닥이 필요했다.
하지만 경완은 후장 좀 빨린다고 좋아서 벌떡 일어나는 그런 이가 아니었다. 세상 모든 것은 주고받는 것이고 누가 괜히 자신의 똥꼬를 빨아준다면 그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래서 그는 서 경사에게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연이어 던졌다.
“영웅은 무슨 그냥 법치를 어지른 범죄자잖아요?”
그런 냉소적인 말에 당장 서 경사의 표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살짝 마른침을 삼키는 것 같기도 했다.
경완의 태도가 계획대로 변하지 않아서일까? 아무래도 직업상 경완의 말에 동조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목적을 위해서 그러한 내색을 참는 것 같았다.
“과거는 과거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미래를 봐야죠.”
“그거 일본 우익이나 매국노들이나 하는 말이잖아요? 끝이 나야 과거가 되죠. 끝이 안 났으면 그냥 과거에서 시작되어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거랍니다. 저를 보세요. 저 아직 형기만 30년 넘게 남았거든요.”
어떤 갈등의 끝은 당사자가 모두 인정하고 합의해야만 끝맺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은 일방적 종료 선언은 ‘아몰라, 쪽팔리니까 닥쳐’ 아니면 ‘그냥 내가 더 세니까 넌 입 닥쳐’라는 폭력에 불과했다.
현재의 인류는, 그리고 또 개인의 현재는 과거를 끝맺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과거가 이어져온 결과였다.
경완의 말에 서 경사는 잠시 말이 없었다. 경완은 그가 무슨 고심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의 협조를 얻기 위해 단단히 굳은 마음을 순두부처럼 부드럽게 만들려고 어떤 똥꼬 빠는 멘트를 나불대어 볼까라는 구상임이 분명했다.
경완이 먼저 물꼬를 텄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 봐요.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거죠.”
“사망기자 수사과정에서 몇 명의 용의자를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혐의점이 너무 얕아 수사를 진행하기 어렵죠.”
“그래서 저보고 도와 달라?”
“그렇습니다.”
“그럼 전 뭐를 얻죠?”
“....”
경완의 말에 서 경사는 입을 다물었다. 보아하니 딱히 보상안 같은 거 준비한 거 없이 그냥 세 치 혀로 꼬드겨서 일을 시키려고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경완은 서 경사를 비난하지 않았다. 위에서 까라고 하면 까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맘에도 없는 말을 해서라도 상부의 지시를 완수하려는 것이 아랫사람들의 고충이 아닌가? 못 하면 왜 못 하는지 시말서나 써오라고 하고 말이다. 위에서 탁상공론으로 만든 복지정책에 말단 복지사들이 고통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왜 그런 부당함에 반박하지 않느냐고 하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밖엔 할 수 없었다. 공무원이 철밥통이라고 하는데 아래로 가면 결국 공노비 신세다.
경완은 말을 짜내기 위해 끙끙거리는 서 경사를 보며 혀를 찼다. 그가 무슨 고충을 겪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고통을 끝내주기 위해 확실하게 말했다.
“제 요구는 이래요. 아직 김오민 검사 사망 사건하고, 왕대한 폰지 사기 아직 안 끝났죠?”
서 경사는 경완이 도대체 무슨 요구를 할지 감이 오지 않아서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저기.. 김오민 검사 건은 종결되었습니다.”
오태광 회장이 죄다 뒤집어쓰고 무기징역으로 복역 중이었다. 정치 건달 양아치 중에서 그는 운 없는 편이라 할 수 있었다.
경완이 물었다.
“그럼 양승태는요?”
“그, 그는...”
정계에서 완전히 퇴출되었지만 그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왕대한 폰지 사기 사건으로 400억 페이퍼 컴퍼니를 꿀꺽하셨어도 감옥에 가지 않을 정도의 능력은 가지고 있었다. 무려 기소권을 독점하신 검찰 마피아 출신이신데! 암! 그렇고말고!
“나한테 칼침 맞은 건 칼침 맞은 거고 김오민 검사 살해를 사주한 건 또 따로 봐야죠. 칼침 맞은 게 면죄부는 아니잖아요? 법적으로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무슨 요구를 하고 싶은 겁니까?”
“단순해요. 신용이죠. 내가 이 나라의 시스템이 정당하다는 걸 믿을 수 있는 신용. 한낱 재소자에게도 공정함을 유지하는 시스템이라 믿음.”
신용하지 않는 자와는 거래하지 않는다. 신용만 확실하다면 본전만 받고 거래할 정도로 경완은 나름 마음 넓은 사람이라 자부했다.
하지만 서 경사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 어렵습니다.”
대답을 들어보니 양승태가 몸담았던 패거리가 여전히 힘을 쥐고 있는 모양이었다. 예전에 분명 경완을 미국에 안 보내려고 해서 미국 형님이 한 번 혼을 내줬는데도 여전히 이 모양인 걸 보면 참 질겼다. 아니면 그만큼 뿌리가 깊거나.
하지만 그러한 상황은 경완의 예상 안에 있었다. 원래 탐욕스러울수록 더 끈질긴 법이니까. 아마 그러한 자들에게서 유일하게 배울 덕목이 아닐까?
표정이 어두운 서 경사를 향해 경완은 자신의 입장을 확고히 밝혔다.
“그럼 저도 부탁 들어 드리기 어렵죠.”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어떻게 안 되겠는데요.”
“.. 하아..”
“이대로 돌아가면 분명 깨질 거라 개인적으로 미안하고 안타깝기는 하지만 거래라는 게 그렇게 감성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거든요.”
“어떻게 사람이 인정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정은 적선과 기부할 때만 발휘해도 충분해요.”
“그런 마음으로 제안을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까?”
“그렇다고 댁이나 댁에게 지시를 내린 사람이 노숙자나 거지, 지원이 필요한 고아 같은 건 아니잖아요?”
“.....”
이미 제안은 파토가 났다는 것을 확인해버린 서 경사였지만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경완의 말대로 돌아가서 깨질 걸 생각하니 일어날 기운도 쫙 빠졌다.
경완은 그런 그가 쉽게 일어날 수 있도록 약간의 희망을 던져주기로 했다.
“그렇다고 제가 전혀 돕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에요.”
“....”
경완의 말에 서 경사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눈빛에 욕설을 담아 경완을 보았다. 그럼 여태 해온 소리는 뭐란 말인가?
“그냥 기다리면 돼요. 그럼 미국에서 알아서 해줄 겁니다.”
“미국이요?”
서 경사의 눈이 커졌다. 왜 갑자기 미국이 여기서 튀어나온단 말인가?
“미국에서 한국과 수사협조를 하기로 했거든요.”
“왜요?”
“그건 미국에서 알려줄 겁니다.”
서 경사의 머리가 돌아갔지만 그의 상상력은 설마 비질란스라는 조직이 미국에서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이거 상당한 고급정보입니다. 그 정도면 돌아가서 면피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 경완을 보는 서 경사의 표정은 참으로 복잡미묘했다.
경완이 피식 웃었다.
“왜 이렇게 병 주고 약 주는지 기분이 이상하죠?”
“하. 하.”
서 경사는 웃었지만 그 미소가 자연스럽진 않았다.
경완이 미소와 함께 말했다.
“저도 나름 아는 형사가 있어서 말이죠.”
“아.. 음..”
경완의 말에 서 경사는 경완이 도왔다는 유괴 사건을 떠올렸다. 그 사건을 담당하고 해결한 사람이 장동균 형사라던가?
“혹시 장 형사님을 끌어들여서 절 설득할 생각을 하는 건 아니죠?”
불쑥 들려온 말에 서 경사는 화들짝 놀랐다. 이렇게 자신의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말이 불쑥 귀로 파고드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서 경사에게 경완은 미리 경고했다.
“그럴 경우 아마 장 형사님에게 이렇게 제안하겠죠. 절 설득하면 막힌 승진길 뚫어주겠다고. 흐흐흐흐.”
서 경사는 경완이 갑작스럽게 웃자 당황해서 뭐라 말할 겨를이 없었다.
경완의 말이 이어졌다.
“웃기잖아요? 자기 할 일을 한 사람의 앞길을 지들이 막아놓고서는 그렇게 당근을 내민다는 게. 그런 인간들이 윗대가리라면 과연 제가 믿을 수 있을까요?”
서 경사의 머리에 경완이 말했던 ‘신뢰’, ‘신용’이라는 단어가 지나갔다.
경완의 말은 경고였던 것이다.
결국 서 경사는 장 형사를 이용할 생각을 버리고 경완이 말해준 면피성 정보, 미국이 끼어들 것이라는 거 하나만 가지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상관에게 생각보다 덜 깨질 수 있었다.
= = = = =
09-다크 히어로와 빌런은 종이 한 장 차이
사망기자 수사본부.
여기로 파견 온 각지의 능력 있는 수사관들은 사망기자보다는 비질란스라는 조직인지 단체인지 모르는 곳에 대한 수사가 더 큰 건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사망기자에 대한 수사가 장차 비질란스라는 곳까지 이어질 거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다만 여기엔 한 가지 단서조항이 있었다. 정말 비질란스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말이다.
사실 수사관들은 그냥 미친놈이 허세를 부리거나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서 비질란스라는 가상의 단체를 만들어낸 줄 알았다. 미국에서 수사공조를 요청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아! 너무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말고 사망기자인지 사망한 새끼인지 그 새끼 수사에나 집중해.”
수사본부장인 서울청장의 일갈이 이어졌지만 수사관들의 직업병이 뭔가? 바로 의심과 추론 아닌가?
곧 사망기자라는 놈이 초능력 빌런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수사관들 사이에 퍼졌다. 수사를 진행할수록 그렇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이명태 기자에 대한 스토커짓을 기록한 영상은 도저히 현존하는 장비로 찍을 수 없는 지점에서 찍힌 것이다.
아니 찍을 수는 있었다. 찍게 된다면 바로 들키게 될 뿐.
자신들의 은밀한 치부를 얼굴도 모르는 놈이 찍도록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으니, 수사관들은 사망기자라는 놈이 혹시 투명인간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합리적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놈이 몸담았다는 비질란스라는 곳엔 초능력자가 분명히 있을 거라는 소문을 사실이라 확신 수사관들은 사망기자가 초능력자와 긴밀한 관계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설령 사망기자가 투명능력자라고 해도 누군가의 조력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증거나 흔적이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사망기자는 단순히 단독범이 아니라 공범이 있는 범죄집단이라는 말이 된다.
077-09-다크 히어로와 빌런은 종이 한 장 차이
하지만 그래도 이것만으론 미국이 관여하기엔 명분이라든가 개연성이 약했다. 미국에도 초능력 범죄자가 많지 않은가?
능력 있는 수사관들은 이 약한 개연성을 보강하는 가장 유력한 가설을 결국 생각해 내었다.
혹시 비질란스라는 것이 미국에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 미국이 흥미, 또는 관심을 가지고 결국 수사공조까지 제안한 것이고.
수사관들은 이러한 추론이 그저 기우에 그치길 바랬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초능력자가 포함된 국제조직을 상대하게 된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런 그들에게 안타까운 확신을 심어준 것은 한 사람의 등장이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 알죠?”
국회의원 테러범이자 미국의 영웅, 이경완이 마치 재소자가 아닌 것처럼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며 등장했다. 하지만 여전히 죄수복을 입고 있는 것이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하지만 뭐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무려 미 FBI 수사관이 뒤를 따라 들어왔기 때문이다.
‘저 새끼 끌어들이는 거 실패했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수사관들이 수군거리는 이유가 뭔지 경완은 충분히 짐작했다.
“여러분의 말에는 꿈쩍도 안 하던 제가 이렇게 수사에 협조하러 온 것이 이상하죠? 하지만 착각하면 안 돼요. 전 댁들을 도우러 온 것이 아니라, 여기 미국에서 오신 손님을 도우러 온 거니까요.”
수사공조가 이루어지면 경완이 한국 측 수사를 도울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미국의 요청에 따른 것이며 함부로 자신에게 일해라 절해라 헛소리하지 말라고 미리 경고한 것이다.
그런 경완의 말에 수사관들을 배알이 꼴렸다. 뒤에 미국에서 온 외국인이 서 있지만 않았으면 그냥 바로 심문실로 끌고 가서 괴롭히거나 개소리하지 말라고 한 마디 해줬을 텐데,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물론 쥐꼬리만 한 권력을 휘두르는 인간이 경완과 밀실에 있어 본 적 없어서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럼 바로 일합시다. 피차 서로 얼굴 오래 보기 불편하잖아요?”
그건 참 반가운 소리였다.
그들은 서둘러 참고인 조사를 위해 사람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피해자인 이명태가 쓰레기 같은 기사를 써서 고통받은 전적이 있는 사람들과 그 지인들이었다.
수사관들은 기레기 이명태로부터 피해를 입은 이들을 가장 부르기 쉬운 순서대로 불렀다. 아무래도 가장 큰 원한을 가진 사람부터 부르는 게 가능성이 높겠지만 이명태가 오랫동안 기레기 노릇을 하면서 피해와 고통을 안겨준 이들이 워낙 많아, 누가 가장 원한이 많은 사람인지 분류하는 것도 한세월이 걸릴 것 같아 포기했다.
그냥 시간 순서대로 가장 최근의 피해자부터 부르기로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객관적으로 원한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한가?
다행히 미친 싸이코 또라이지만 성능 좋은 거짓말 탐지기가 있으니 참고인을 최대한 많이 불러다가 확인해보는 방법이 가장 신속했다.
참고인이 많다면 경완에게 크게 부담이 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진 않았다. 그가 던지는 질문은 단 세 개. 본인이 사망기자인지, 혹은 사망기자의 협조자인인지, 아니면 사망기자가 누구인지 짐작되는 사람이 있는지, 이 세 가지 질문만으로 참고인 조사는 끝났다.
다른 수사관이었다면 여러 가지를 물어봐서 참고인의 증언에 신빙성이 있는지부터 확인하려고 들었겠지만 경완은 그러한 작업이 없이 곧장 본론만 물으면 되기에 엄청나게 시간이 절약되었다.
한 명당 평균 1분 미만이 걸릴 정도였으니 오히려 수사관들이 참고인들을 빨리 데려오느라 직접 바쁘게 움직여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약 300명가량의 참고인 조사를 끝냈을 때 드디어 뭔가 성과 비슷한 것이 있었다.
그 참고인은 약 5년 전 기레기 이명태가 만들어낸 의도적인 날조와 조작으로 이미지를 망쳐 나락으로 떨어진 한 연예인의 매니저였다.
사망기자가 누구인지 짐작되는 사람이 있냐는 말에 ‘아니오’라고 대답했지만 대번에 경완에게 ‘거짓말’로 판명되었고 결국 수사관의 심층심문을 받게 된 매니저는 잠시 갈등하다가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이명태 그 새끼가 민주를 불륜녀로 만들어버렸어요. 그 상대가 된 남배우는 언급도 안 됐죠.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남배우와 경쟁 관계에 있던 다른 남배우 새끼랑 이명태 그 새끼가 한통속이었어요. 민주 한번 따먹어 보겠다고 그 배우놈이 이명태 그 새끼에게 민주를 궁지에 빠뜨리라고 청탁을 한 거죠. 겸사겸사 이미지 겹치는 경쟁 배우에게 똥도 뿌리고요. 하지만 그 남배우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고, 결국 우리 불쌍한 민주만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 꼴이 되었습니다. 그 뒤로 민주는 그냥 연예계를 은퇴하고 잠적했어요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말도 있는데 그 뒤로는 잘 몰라요.”
수사관이 물었다.
“그래서 당신은 그 민주라는 사람이 사망기자라고 생각되는 겁니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민주에겐 남동생이 한 명 있었거든요. 누나를 무척 좋아해서 나중에 누나를 위해 영화감독이나 드라마 PD가 될 거라고 카메라 촬영 기법이나 영상 편집 기술 등을 배우던, 그런 기특한 녀석이었어요.”
“당신이 그 남동생이라는 분을 사망기자라고 의심하게 된 계기는 뭡니까?”
“음.. 이명태 그 새끼 비디오 저도 봤습니다. 그런데 편집된 영상이 좀 아이의 스타일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느낌입니까?”
“왜요? 그럴듯한 사람이 있으면 말도 안 되는 것 같아도 말해 보라면서요?”
고작 느낌이 그렇다니.. 수사관의 다소 어이없어하는 표정에 전직 매니저였던 남자는 억울해했다.
수사관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한 번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어이! 강우빈 주소지 좀 알아봐!”
상급자의 지시에 곧 강우빈이란 남자의 주소가 확인했지만 이미 미국으로 이민 가버린 상황이었다.
그래서 에이~하며 뒤로 넘길까 하던 차에 FBI가 나섰다. 그리고 강우빈이 업무차 한국에 들어와 있는 사실이 밝혀졌다.
훌륭한 공조수사에 상급자는 반색하며 강우빈을 데려갈 사람을 찾았다.
수사관 두 명이 일어났다. 그때 경완이 한마디 했다.
“고작 둘이서 가려고요?”
멈칫!
“어...”
경완의 말에 출구를 향해 나가던 수사관들이 발걸음을 멈추자 지시를 내린 수사관이 입을 열었다.
“왜?! 뭔데?!”
“어.. 초능력자가 있으면 어떡합니까?”
그 물음에 지시를 내린 수사관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비질란스의 사망기자.
강우빈이라는 남자가 사망기자라는 증거는 없지만 만에 하나 진짜 그라면 딸랑 수사관 몇 명만 보내서는 안 되는 것이 당연했다.
“우리 초능력 경장은 어디 갔냐?”
“정훈이는 밥 먹으러 갔는데요?”
“아우! 그냥 아주 지좆대로 굴어요. 서에서도 꼴통이라더니만.”
저녁 시간이라서 당연한 일인데도 그런 말이 튀어나오는 건 실제로 꼴통 짓을 했기 때문이었다. 어디 중견기업 사장의 마약빤 아들내미 아구창을 갈겨서 기절시켰다나?
암튼 그런 꼴통을 초능력자 집단이 배후일지도 모르는 사망기자 수사본부에 파견한 건 다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그가 현재 검경 통틀어 가장 잘 싸우는 초능력자로 검증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와 의회가 통과시킨 초능력 관리 특별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초능력 수사대에서 하정훈이란 이름의 초능력 경장은 대련으로 진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 상대가 괴력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라도 말이다.
당연하게도 하정훈 역시 괴력 능력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근육이나 몸이 크게 부풀지는 않았다. 언뜻 보면 네츄럴 보디빌더 수준?
상급자가 나가던 두 사람에게 지시를 내렸다.
“너희가 가다가 하 경장 찾아서 데려가. 그리고 몇 명 더 가라. 혹시 모르니까.”
그렇게 몇 명의 수사관들이 더 빠져나가자 수사본부가 휑해졌다. 저녁 시간이기도 해서 형사들이 식사하러 대거 빠져나가기도 했고 모두가 수사본부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수 있을 정도로 책상이 마련된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수사본부는 임시로 꾸려진 것이라 사건이 마무리되면 해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까.
경완은 물론 수사본부에 남았다. FBI 요원인 제프리 리라는 남자와 말이다. 하지만 제프리 리라는 한인 3세는 사실 NSA(미 국가안보국) 소속이었다.
함께 왔던 김준은 모종의 일로 자리를 비웠고 경완은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 수사본부에서 대기해야 했다.
“제프리. 저녁으로 어때요, 치킨은?”
“지겹지 않습니까?”
저녁마다 치킨과 맥주를 메뉴로 선택하는 경완 때문에 미간을 찌푸리는 제프리였다. 솔직히 그는 삼겹살이나 소고기가 먹고 싶었다.
경완이 담담하면서도 진지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치킨이 지겨워진다면 죽을 때가 다가왔다는 소리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제프리 자신은 벌써 죽을 때란 말인가? 제프리가 경완의 헛소리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 안 먹을 겁니다.”
“왜요?”
“고깃집 갈 거예요.”
한국에 왔으면 그 유명한 본토 삼겹살을 먹어봐야지 않겠는가?
그러자 경완의 눈이 커졌다.
“치사하게 나만 빼놓고?”
제프리는 흠칫했다. 밥 안 준다고 일본에서 그 난리를 쳤다는 건 경완을 주시하고 있는 이들에겐 이미 유명한 일화였다.
그가 급히 말했다.
“내가 안 먹는다는 말이지 치킨을 안 시켜준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언제 시킬 건데요?”
“지금 시킬 겁니다. 저기요! 여기 배달되는 치킨집 전화번호 있습니까?”
제프리가 얼른 가장 가까이 있는 수사관에게 치킨집 전화번호를 물었다. 그는 아직 경완이 어려웠다. 절대 방심하지 말라고 경완이 그동안 조져왔던 사람들의 영상과 사진으로 교육받아서 그런지 좀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기가 힘들었다.
사람이 어찌 사람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지.. 심지어 거의 다 맨손으로 그런 거라며?
“여보세요? 거기 치킨집이죠? 여기 양,”
“양념 반 후라이드 반.”
경완이 양념을 즐겨 먹기에 양념을 시키려고 했던 제프리는 경완의 한 마디에 즉시 주문을 바꾸었다.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이요. 네, 여기가 어디냐면...”
주문이 끝나자 경완은 미소를 지었다.
“제프리 씨는 참 빠릿빠릿해서 마음에 든다니까요. 김준 그 양반이었다면 왜 빨리 말하지 않았냐면서 타박하거나 까칠한 태도로 뭐 먹을 거냐고 물어봤을 텐데 말이죠.”
제프리는 자신보다 경력이 긴 김준을 떠올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양반은 도대체 이 위험인물하고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럼 저는 눈 좀 붙일 테니 치킨 오면 깨워줘요.”
“지금 잡니까?”
“그럼 시간 때울 수 있게 스마트폰이나 좀 빌려주던가 아니면 인터넷을 할 수 있게 해줘요.”
경완의 심심함을 덜어주기 위해서 자신의 폰을 기꺼이 건네주거나 타국의 수사관들에게 어려운 소리를 할 마음이 없는 제프리였다.
경완이 알아서 심심함을 죽이기 위해 졸음을 청한다면 제프리에겐 이득이었다.
“치킨 오면 바로 깨워드릴게요.”
그러니까 얼른 쳐자.
경완은 그런 마음의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인지 그저 제프리의 미소를 힐끔 쳐다보더니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제프리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 것도 없는데 왜 이리 피곤한 걸까? 맹수 옆에 있으면 아무것도 안 해도 괜히 긴장되고 피곤하고 그런 원리인 모양이었다.
째깍. 째깍. 째깍. 째각.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는 시각,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수사본부가 조용해졌다.
이 이해가 안 되는 침묵을 깨뜨린 것은 누군가의 고함소리였다.
“너, 너 뭐야?!”
별안간 들리는 고성에 경완은 놀라서 벌떡 잠에서 깨어났다.
“뭐야? 치킨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