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09-다크 히어로와 빌런은 종이 한 장 차이
옆을 보니 제프리가 잠들어 있었다. 경완이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치킨 왔어요?”
하지만 제프리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 쿠울~ 쿠울~ 코까지 골며 자기 시작했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경완은 좌우로 시선을 옮기다가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갈색의 종이봉투를 뒤집어쓰고 추리닝을 입은 남자가 한 수사관 앞에 서 있는 장면이었다.
종이봉투의 남자도 이 상황이 이상한지 경완을 보고 있었다. 아니, 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신기하게도 눈이 있는 부위에는 앞을 볼 수 있게 구멍이 뚫려있었는데 그 사이로 눈빛 하나 새어 나오지 않고 그저 시커멨던 것이다.
종이종투의 남자가 경완에게 물었다.
[넌.. 뭐지?]
“사람인데요?”
[왜 잠들지 않았지?]
“깼잖아요?”
[···.]
황당해하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경완은 개의치 않았다.
“아! 혹시 자야 되는 거예요?”
[.. 그래.]
“방금 전까지 자고 있었는데요.”
뭔가 핀트가 안 맞는 대화가 답답한지 종이봉투의 남자가 직접적으로 물었다.
[너도 초능력자인가?]
“혹시 초능력자 아니면 계속 자고 있어야 하는 거예요? 그런 거면 저도 초능력자가 맞나 보죠.”
[···.]
“그렇게 봐도 무슨 초능력인지는 저도 몰라요.”
경완을 주시하던 종이봉투의 남자가 말했다.
[그럼 끼어들지 마라. 죽기 싫으면.]
“도, 도와줘!”
그때 종이봉투 남자의 앞에 있던 수사관이 경완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경완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끝이 뾰족하고 딱딱한 볼펜을 쥐고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런 그의 모습에 종이봉투남이 긴장한 어조로 경고했다.
[끼어들지 마라.]
하지만 청개구리 심보가 적잖은 경완은 그저 슬쩍 웃을 뿐이었다.
“제가 좆같은 놈은 좆같이 대해줘야 직성이 풀리는 좆같은 심보를 가지고 있는 터라 눈앞에서 좆같은 짓을 하는 걸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네요.”
[···.]
경완의 말에 종이봉투남은 잠시 말없이 경완을 보다가 깨어있는 수사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놈은 네가 옹호할 이유가 없는 놈이다.]
“혹시 알고 보니 이 새끼가 좆같은 놈이라는 말이에요?”
[그래.]
“그쪽 말을 제가 어떻게 믿어요?”
[네가 잘하는 거로 확인해봐.]
종이봉투남은 마치 잡아보라는 듯이 경완을 향해 자신의 손목을 내밀었다. 경완이 누구인지, 어떤 능력으로 유명한지 분명히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경완이 뻔히 보이는 수작질에 넘어가겠는가? 그는 종이봉투남에게 뚜벅뚜벅 걸어가는 척하다가 수사관에 얼른 다가가서 그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저 새끼 말하는 거 사실이에요?”
수사관이 아니라고 하면 그걸로 끝.
수사관이 소리를 질렀다.
“거짓말이야!”
짝!
수사관이 옹호하는 동시에 고개가 돌아갔다. 수사관 본인의 얼굴이 말이다.
수사관의 대답에 경완이 다짜고짜 따귀를 때린 것이다. 물론 수사관의 입장에서는 다짜고짜였지만 경완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 새끼 이거 찔리는 거 많은 모양이네?”
구체적으로 묻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전신으로 ‘그래, 나 좆같은 놈이다!’라고 인정하는 걸 보면 말이다.
게다가 얼마나 뻔뻔한지 분명 찔리는 것이 있는데도 그런 기색 하나 보이지 않고 자신은 이노센트 퍼슨이라고 헛소리하는 걸 보면 소시오패스 기질이 다분했다.
경완이 종이봉투남에게 물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이 새끼는 어떤 씹새끼에요?”
[... 성폭행 피해를 받은 여성을 조사한다고 불러서 또 성폭행했지.]
경완의 갑작스런 급발진에 종이봉투남은 당황했는지 잠시 말이 없더니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진짜야?”
경완이 다시 수사관을 보며 묻자 수사관은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짝!
수사관의 뺨이 반대로 돌아갔다. 경완에 붙잡힌 어깨는 수사관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었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수사관의 태도에 경완이 어이없다는 미소를 지었다.
“이 새끼 이거 아직 내가 누군지 모르는 모양이네? 야, 너 매스컴이나 온라인에서 내 능력에서 떠드는 게 다 구라 같지?”
쫙! 쫙!
수사관이 얼굴이 따귀를 따라 좌우로 도리도리했다.
수사관이 팔을 올려 얼굴을 가리며 소리쳤다.
“너, 너 왜 이러는 건데! 수사 도우러 온 거잖아! 뭐해! 저 새끼나 잡아!”
수사관사의 외침에 경완은 콧방귀를 꼈다.
“내가 느집 개새낀 줄 알아? 물어! 하면 물게? 그리고 따지고 보면 나도 저쪽과 같은 범죄자과라고.”
수사관은 당황했다.
“야, 약속과 다르잖아?!”
“무슨 약속? 난 그냥 좆같은 놈 조지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동참했을 뿐이야. 테러범, 마약딜러. 좆같은 놈들이잖아? 그런데 여기도 좆같은 놈이 있네? 내가 좆같은 놈을 왜 도와?”
쫙!
“아악!”
다시 한번 싸다귀를 날렸던 경완은 생각났다는 듯이 폭력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아 맞다! 이 새끼 이거 내 몫 아니죠? 자요. 난 빠집니다.”
[....]
말하는 동시에 옆으로 빠지는 경완의 모습에 종이봉투남은 말이 없었지만 전신으로 당혹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뭐랄까? 도저히 경완의 반응이 어떠할지 예측이 안 되는 것 같았다.
[방해 안 할 건가??]
종이봉투남의 물음에 경완은 어깨는 으쓱했다.
“좆같은 놈 조지는 재미를 양보하는 건 아쉽지만 당사자가 등장했으니 양보하는 게 미덕이겠죠?”
“이, 이 씹새끼야! 악!”
악에 받친 수사관이 언성을 높이다가 경완에게 따위를 맞고 비명을 질렀다.
“뭘 잘했다고 소릴 질러?”
그런 두 사람의 실랑이에 종이봉투남이 끼어들었다.
[저기..]
“아 맞다! 빠지기로 했죠?”
[....]
경완이 정말 옆으로 빠지자 다시 한번 당황한 종이봉투남. 그런 그에게 경완이 입을 털었다.
“왜요? 내가 좆같은 놈 일부러 찾아다닐 정도로 부지런한 건 아니지만 눈앞에 있는 좆같은 놈을 귀찮다는 이유로 외면할 정도로 인정 없는 놈도 아니거든요.”
그런 게 인정(人情)따위로 설명할 수 있는 건가?
그런 그를 향해 수사관이 소리를 질렀다.
“이경완!”
그 목소리는 지금 매달릴 건 경완밖에 없다는 듯이 절박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수사관은 무기력했다. 아마 종이봉투남의 알 수 없는 초능력 때문인 듯했다.
경완은 이름 모를 수사관의 목소리를 반대쪽 귀로 흘려버리며 말을 이었다.
“아참! 조언 하나는 해도 될까요?”
[뭐지?]
“저~얼대 죽이면 안 돼요. 절대로.”
경완의 말에 종이봉투남의 복면이 꿈틀했다. 표정이라도 일그러뜨린 모양이었다.
[왜?]
“설마 천국이나 지옥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
말이 없자 경완은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진짜 그랬단 말이에요? 푸흣! 산타할아버지를 믿는 애도 아니고, 크크크.”
어이없다는 듯이 웃던 경완은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첨언했다.
“살아서 죗값을 치러야죠. 그렇게 쉽게 죽이면 쓰나?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라는 말도 몰라요? 뭐라고요? 좆같은 놈의 얼굴을 보니 살심이 치밀어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간다고요? 그러면 상상해봐요. 어떻게 해야 저 새끼가 고통을 받을까? 어떻게 해줘야 저놈이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까?”
돕기는커녕 한술 더 뜨는 경완의 모습에 수사관이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 이경완! 뭐 하는 짓이야?!”
“뭐긴요? 댁 살려주려고 입 털고 있잖아요.”
그게 살려준다고 하는 소리야?
“지랄하지 마! 이 미친놈아!”
어이없어하며 소리를 지르는 수사관에게 경완이 미소로 답했다.말을 이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있잖아요? 혹시 모르지 않아요? 침대 위에 누워서 지내다 보면 문득 깨달음을 얻거나 반성해서 새사람이 될지?”
[그건 용납 못 해! 새 사람이라니?!]
경완의 말을 듣던 종이봉투남이 끼어들었다. 보아하니 이 사실상의 빌런께서는 저 소시오패스 수사관에게 개심의 여지조차 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경완이 또 입을 털었다.
“내가 말했잖아요, 혹시 모른다고. 혹시 ‘혹시’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건 아니죠? 댁이 파악한 저 쓰레기가 그렇게 쉽게 반성하고 회개해서 새사람이 될 수 있는 인간이에요?”
[.···]
종이봉투남은 혼란스러웠다. 저놈이 저쪽 편을 드는 건지 이쪽 편을 드는 건지.
한 가지 확실한 건 제정신인 놈은 아니라는 점이다.
[비켜.]
단호한 목소리에 경완은 대답했다.
“뭘 새삼스레? 이미 비켜서 있잖아요?”
[....]
원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의 귓속으로 경완의 말이 파고들었다.
“생각 잘해요. 나중에 그 새끼 너무 쉽게 죽였다는 생각에 자다가 이불킥하며 분통 터뜨리고 싶지 않으면.”
다~아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인 걸 알랑가 모를랑가?
다가오는 종이봉투남을 보며 수사관 겸 강간범이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으으, 으아아아!”
···.
결국 형사는 살아남았다. 꺾인 사지에 복합골절 진단을 받고 척추가 끊어서 반신불수가 된 채로 말이다.
당연하게도 경완의 조언이 곁들여진 결과였다.
= = = = =
사망기자 수사본부에서는 난리가 났다. 초능력자의 습격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는 단체 수면 사건, 그리고 그 사건 와중에 수사관 중 한 명이 반병신이 되어 발견된 것이다.
더 난리가 난 이유는 반병신이 된 피해 수사관의 입에서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광역으로 사람들을 잠재울 수 있어 임시로 샌드맨이라는 명칭을 붙인 의문의 습격자. 그리고 그런 그를 막지 않고 오히려 도운 경완.
수사관들은 경완을 추궁했지만 경완은 억울했다.
“돕다니요? 전 그냥 구경만 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왜 구경만 했냐고!”
“좆같은 새끼 조진다는 데 왜 방해를 해요?”
“너 이 새끼야! 너 방조죄라는 게 뭔지 알아?!”
“그럼 어떻게 해요? 그렇게 사람을 대량으로 잠재워 버리는 빌런을 상대로 목숨이라도 걸고 싸우라고요?”
“넌 깨어있었다며 이 새끼야!”
씩씩거리는 수사관 앞에서 경완은 훌쩍거리며 검지 끝으로 눈물을 떼어내듯 눈 밑을 닦는 시늉을 했다.
가식적인 모습으로 경완은 입을 털었다.
“내가 시민의 안전을 위해 헌신하시는 소방관도 아니고 누구를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하나요? 강간범?”
“니가 언제는 안 나댔냐, 이 새끼야!”
듣다 못 한 수사관이 소리를 질렀다. 경완이 여태 조진 사람이 한 둘인가? 그런 놈이 겁이 나서 그냥 보고만 있었다고? 무려 국회의사당에 차량으로 돌진한 놈이? 이게 뭔 개소리란 말인가?
경완이 소리를 지르는 수사관과 시선을 마주했다.
무표정한 표정, 해석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눈빛.
욕설을 하며 소리를 지르던 수사관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방금 자신이 너무 겁대가리 없이 소리를 질렀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다.
눈앞의 재소자는 싸움을 존나 잘하는 미친놈이었다. 얼마나 잘 싸우는 미친놈이냐면 무려 괴력 능력자인 일본의 초능력 경사 1호를 조지고 총을 든 경찰에게 달려들어 제압하여 인질극까지 벌인 놈이었다.
그런 놈에게 이렇게 언성을 높이다니? 자신이 급성 간비대증에라도 걸렸단 말인가?
경완은 눈빛 하나로 수사관의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다시 가증스럽게 훌쩍거렸다.
“전 그저 한낱 재소자일 뿐이라고요. 훌쩍.”
지랄을 한다, 지랄을 해.
수사관은 그저 속으로 이를 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