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09-다크 히어로와 빌런은 종이 한 장 차이
그때 김준이 나타났다. 경완을 데리러 온 것이다.
“가시죠.”
“저 일어나 봐도 되죠?”
미 FBI의 등장에 한낱 수사관이 어쩌겠나? 그는 똥 씹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샌드맨 습격 사건에 대해서 경완이 목격한 건 다 들었다. 참고인 조사를 해봤자 얻을 소득도 더는 없었다. 더 붙들고 있는 건 분풀이에 불과했다.
수사관의 허락에 경완이 자리에서 일어나 김준의 뒤를 따랐다.
'매국노 새끼.'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리는 수사관이 경완의 귀로 들어왔지만 경완은 한 귀로 흘려버렸다.
뭐 저런 말을 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명색이 한국 국적의 한국인인데 왜 자신들의 요구는 개무시하고 미국의 지시만 받아서 일을 하느냐? 완전 매국노 새끼 아니냐?라는 생각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사람 사는 이치가 아닌가? 강한 쪽에 빌붙는 것은 생존과 일신의 안전과 편안함을 도모하기 위한 지혜다.
뭐? 강약약강이 아니냐고?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약한 놈이 강한 놈과 같은 대우를 받으려 하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눈치껏 자신이 약하다는 걸 깨닫고 약자의 처세술을 발휘해야지 세상은 평등하다느니 하면서 강자가 대접받는 것처럼 대접받으려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짓을 하면 대접은커녕 이 뭐병? 이란 눈총만 받을 뿐이다. 고작 아파트 부녀회장에 불과하면서 대접은 국회의원 대접을 바라는 이의 꼬라지를 보면 누구나 절로 혀를 차지 않는가?
그렇듯 본래 세상은 평등하지 않다. 즉, 한국이 경완에게 그가 미국을 대하는 태도를 자신들에게도 해주길 바라는 것 자체가 주제넘은 짓이었다.
분수를 알아야지!
한물간 계급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은 결국 지시를 내리는 사람과 지시를 받는 사람으로 나뉘며, 위에 있는 쪽은 그 나름의 품격을, 아래쪽에 있으면 그 나름의 처세를 하는 것이 서로의 이익을 위한 지혜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에 빌붙는 전략은 꽤 괜찮은 편이다. 만일 미국이 중국같이 꽌시나 권력의 향방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는 곳이었으면 경완도 생각을 달리 먹었을 것이다. 그런 아귀다툼의 틈바구니에서 휘둘리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데?
게다가 솔직히 경완이 한국의 장교들처럼 군사 기밀을 팔아먹은 적은 없지 않은가? 그들이 진짜 매국노지.
예를 들자면 록히드 마틴에 군사기밀 팔아 수십억 챙겨 드신 전직 공군참모총장은 집행유예로 감방에서 하루도 지내보신 적이 없으시다. 뭐, 록히드 마틴이 미국의 주요한 방산업체이니 따지고 보면 혈맹과 협조를 했다고 포장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일본에 2급 군사기밀을 팔아먹은 장교는 빼도 박도 못 할 매국노 아닌가? 일본도 혈맹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토착왜구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실제로 이 장교분은 토착왜구였는지 일본에서 교수 및 지식인으로 잘 먹고 잘살고 계신다.
이런 이들에 비하자면 경완은 그냥 적극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국익 도모에 활용하지 않았을 뿐 결코 매국노라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에게 매국노라고 하는 것은 심각한 인지부조화에 빠져있거나 선택적 애국주의에 불과했다.
뭐, 이런 사정들은 경완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딱히 애국자도 아닌데 진짜 매국노들과 다른 기준의 잣대가 들이대지는 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그는 그저 이런 느낌만 들 뿐이었다.
‘감히 어디서 한국 수사기관 주제에 미국 FBI하고 같은 취급을 받으려고 하고 있어?’
한편, 김준은 경완을 데리고 주한미군 부대로 향했다. 부대 안으로 들어가진 않고 근처에 마련된 안가로 향했다. CIA에서 준비해준 장소라나?
도착하니 제프리가 손에 드는 막대기 같은 장비로 집안 곳곳을 뒤지며 도감청의 유무를 점검하고 있었다.
김준이 그에게 물었다.
“이상한 점은요?”
“없습니다.”
도청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김준이 경완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샌드맨과 상당히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압니다.”
“이미 참고인 조사과정에서 다 이야기했어요.”
“알고 있습니다. 다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관련 자료를 요청하기가 좀 그래서요.”
경완은 미국 FBI가 데려왔다. 사망기자 사건 수사본부의 입장에서는 자기들 말 안 듣고 미국말만 듣는 경완의 태도도 배알이 꼴리는데 경완이 수수방관해서 동료 수사관이 병신이 되어버린 샌드맨 습격 사건의 조사내용을 또 미국이 요청한다?
이건 뭐 잡음이 안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피해자가 동료 수사관이었다. 물론 종이봉투남이 그 수사관을 조진 이유가 강간 피해자를 또 강간한 개자식이라고 경완이 밝혔지만 쉽게 믿질 않았다.
이해못할 바는 아니었다.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문제가 한둘인가?
사망기자 사건처럼 중요한 사건에 파견되어 올 정도의 능력 있는 수사관이 그런 소시오패스였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진 않았을 것이다. 샌드맨이 놈을 죽이려 한 걸 경완이 나서서 겨우 사지 골절에 반신불수로 끝났다고 잘 설명해줘도 욕만 바가지로 먹었다.
경완으로선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자기가 경찰도 아니고 샌드맨이 자기한테 피해를 주거나 공격하는 것도 아닌데 왜 ㅈ같은 강간 경찰을 위해서 위험을 감수해야 하냔 말이다. 샌드맨이 딱히 조지고 싶을 정도로 ㅈ같은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무튼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FBI에서 샌드맨 관련 수사자료를 요청한다고 그 자료를 순순히 줄지, 제대로 된 자료일지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 김준의 입장이었다.
차라리 경완이 다시 입을 놀리는 편이 더 빠르고 믿을 만했다.
“오오~. 천하의 미국이 이렇게 눈치를 보다니!”
경완의 과장된 말투에 김준이 또 시작이라며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대꾸했다.
“미국은 깡패 국가가 아닙니다. 그리고 한국은 미국의 속국이 아니라 동맹국이고요.”
“하긴 똥개도 자기 집 앞마당이라면 절반은 먹고 들어가니까요. 그래, 뭐부터 물어보고 싶어요?”
딴죽을 걸고 싶은 부분은 많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김준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샌드맨의 얼굴은 보셨나요?”
“아니요.”
“특징 같은 건?”
“딱히 말해줄 건 없어요. 묘사해 달라거나 하진 마세요. CCTV에 다 나와 있잖아요.”
CCTV가 있는데도 그 사달이 난 건 사람이 직접 감독하는 CCTV는 돌발 상황이 일어날 수 있는 철창 쪽뿐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설마 수사관들이 잔뜩 있는 수사본부를 습격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김준이 말을 이었다.
“혹시 경완 씨는 그와 마주치면 다시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아니요. 위장 능력이 대단하더군요.”
경완은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S입자를 느끼는 감각을 끌어올리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지만 그랬다간 미국에서 샌드맨 잡아달라고 징징 거릴까 봐 말하지 않았다. 여기가 무협지 속 세상은 아니지만 강호에서도 실력의 삼 할은 감추라지 않은가?
경완은 김준이 혹여나 자신에 대해 의심하는 마음을 품지 않도록 그 샌드백에 관해서 더 자세히 설명했다.
“김준 씨도 알다시피 제 눈썰미가 끝내주잖아요?”
김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완의 통찰력 못지않게 관찰력도 대단했다. 사실 충분한 관찰력이 없다면 통찰력도 발휘할 수 없었다. 모든 지식과 지혜는 관찰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상한 종이봉투는 뚫린 구멍조차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져서 눈이 안 보이더라고요.”
“이상하군요.”
본다는 행위는 빛을 받아들이는 행위다. 그리고 빛은 그 특성상 반드시 반사된다. 번들거리고 매끄러운 각막에 싸인 인간의 하얀 안구를 생각하면 그 안광이 희미할 수는 있어도 절대로 없을 순 없었다.
경완이 맞장구를 쳤다.
“그쵸? 빛을 99.9999% 흡수한다는 밴타블랙 도료를 안구에 바르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현상이죠. 그러고 보면 그 종이봉투를 괜히 쓰고 나온 게 아닌 것 같아요.”
“초능력이라는 겁니까?”
“물리적으로 감출 수 없는 빛을 감추는 것도 능력이라고 하면 샌드맨은 단순히 광역 강제 수면을 일으키는 능력자가 아니라 복합 능력자가 되는 건데 어느 쪽이 맘이 편해요?”
“···.”
마치 남일 이라는 듯이 알아서 선택해서 생각하세요라는 태도를 앞에 둔 김준은 잠깐 마른세수를 하며 복잡한 심경을 달랬다.
그런 그에게 경완이 말을 이었다.
“아 맞다! 그놈이 그 강간 수사관을 조질 때 힘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세 보였어요. 혹시 괴력 능력자가 아닐까요? 수면 능력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원한 형태고요.”
경완의 말에 김준을 그럴 리가 없을 거라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진 않을 겁니다. S입자가 활성화된 이들은 대부분은 신체능력 향상의 효과를 받거든요. 주변에 다른 수상한 사람도 없었고 말입니다.”
일전의 올림픽을 생각해보면 될 일이다. S입자가 활성화된 초능력자들은 어느 정도 신체보정을 받게 되는데, 전미 초능력 협회에서 초능력 각성을 판정할 때 쓰는 주요 지표이기도 했다.
하지만 경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왜 난 힘이 안 세져요? 나보고 각성했다면서요?”
그 말에 김준은 잠깐 당황했다.
“.. 힘을 감추고 있었던 게 아니었습니까?”
“완력 세지면 평소에도 얼마나 편한데요?”
일상생활에서 짐을 나르거나 좆같은 새끼들 팔다리 분지를 때에도 힘 덜 들고 말이지.
김준은 경완이 중얼거리는 말에 짜게 식은 눈빛을 보내더니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반응에 경완은 S입자의 활성도가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가 싶었다. 자신은 S입자의 농도가 짙기는 해도 항상 그것이 활성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그렇다면 샌드맨은 팀으로 활동하는 건 아니겠네요?”
“그래도 조력자는 있을 겁니다. 분명 비질란스라는 곳이겠죠.”
김준이 그렇게 판단한 건 상황이 너무 공교로웠기 때문이다. 하필 사망기자 용의자를 특정해 수사관들이 대거 빠져나간 상황에서 샌드맨이 등장에 해묵은 원한을 풀었다?
정보력이 없으면 그렇게 정확한 순간을 노릴 수 없었다. 분명 조력자가 있을 거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경완은 독방에 있을 때 자신을 포섭하려고 했던 텔레파시 능력자를 떠올렸지만 그것을 언급하진 않았다. 사람이 상도덕이 있어야지, 괜히 입을 털어 분란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솔직히 그 매끄러운 혓바닥을 놀려서 그들의 정보나 캐 달라고 귀찮게 엉겨 붙을 게 뻔한데 왜 경완이 별로 유감도 없는 상대를 향해 번거롭게 이빨을 까야하는가?
그리하여 김준과 경완의 문답은 샌드맨 사건에 대해 경완이 한국 수사기관에 밝혔던 것들을 다시 한번 전부 털어놓고 나서야 끝났다.
“미국에서는 이 사건을 엄중하게 보고 있는 모양이죠?”
“물론입니다. 정말 이 사건 뒤에 비질란스가 있다면 놀랍도록 잘 조직된 초능력 집단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될 테니까요.”
시금석이라···
“혹시 한국을 테스트 베드로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음모론적인가요?”
“테스트.. 배드요?”
경완의 말에 김준의 눈이 가늘어지고 태도는 신중해졌다.
“경제나 치안 수준,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이나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를 생각하면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해보기에 적절한 곳이라고 하잖아요?”
의약, 패션, 화장품, 새로운 앱 등 다양한 기업에서 코리아를 시장 테스트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한국에서 먹히면 세계에서도 먹힌다나?
김준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목적으로 테스트를 하고 있는 걸까요?”
“그거야 뭐 시간이 지나 보면 알겠죠.”
아니면 그냥 우연일 수도 있고.
경완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고 김준은 조국에서 나타났던 비질란스를 떠올리며 이 조직이 부디 법치를 어그러뜨리거나 테러를 목적으로 결성된 것이 아니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