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한전생 더 빌런-86화 (86/367)

085-09-다크 히어로와 빌런은 종이 한 장 차이

아프고 수치스러워서 눈물이 났다. 놈의 주먹은 도저히 악과 깡으로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방씩 맞을 때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이러다 맞아 죽겠다는 공포심이 일어났다. 자신이 언제 이렇게 맞아본 적이 있었던가?

“니 할애비에게 전해라. 손주 새끼 떳떳하게 하늘 보고 살게 하려면 처신 잘하라고.”

“흐어엉! 흐으으으!”

그는 서럽게 우는 청년의 등을 두드려두며 위로의 말이랍시고 이렇게 말했다.

“야. 그래도 너는 사과해야 하는 당사자가 남아 있잖아? 노덕술같이 이미 뒈진 놈 후손들은 지금도 지들 족보 세탁한다고 좆 빠지고 있을걸?”

살아있어도 사과하거나 업보 청산을 하기 힘든데 뒈진 놈은 오죽하랴? 그러면 결국 그 업보는 고스란히 후손이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그 후손들은 세인들에게 손가락질받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조상을 지우고 자신의 가계도를 위조, 세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연좌제는 없다고? 제도적으로는 그래도 현실적으로 과연 그게 가능할까?

노덕술 손자라고? 응, 거래 안 해.

노덕술 증손자라고? 응, 고용 안 해.

세상에 어느 미친 기업가나 정치인이 그런 이들과 관계를 맺겠는가? 기업 이미지 씹창 내려고? 정치 생명 쓰레기통에 처박으려고?

노덕술의 자손이나 후손의 행적을 아는 이가 있는가?

이미 널리 얼굴이 알려진 매국노의 후손들이 기득권을 결코 놓지 않으려고 하거나 하다못해 외국으로 이민 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들에게 기득권은 단순히 부귀영화가 달린 문제가 아니라 먹고 사는 생존이 달린 문제기 때문이다.

조상의 업보가 수치스러워서 그 업보를 갚아 어떻게든 후대에 전달하지 않게 하려면 마치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가듯 위대한 희생정신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희생정신을 발휘한 사람은 정말 소수에 불과했다.

“흐어어엉!”

검은 연기를 부리는 초능력자의 위로에도 청년은 울기만 했다. 죽을 것같이 아픈데 그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겠는가?

그러던 말던 초능력 폭행범은 이렇게 말을 남겼다.

“다음에 볼 땐 내가 더 이상 안 건들겠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뒤늦게 경찰이 도착했지만 검은 안개에 휩싸인 폭행범은 종적을 감춘 후였다.

= = = = =

“이 새끼야! 내 손주는 안전하다며!”

흉신악살 같은 얼굴을 마주한 허동세는 허리를 숙였다.

“설마 그 늙은이 같은 놈이 또 있을 줄 알았겠습니까?”

전직 쿠데타 사령관은 화내기도 이제 힘에 부쳤는지 노구를 털썩 소파에 떨어뜨렸다.

“놈이.. 또 찾아온다고 했어. 손주놈이 떳떳하게 하늘 보고 살게 해주려면 나보고 처신 잘하라고..”

“협박에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허동세가 강조했다. 놈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뻔했다.

전직 쿠데타 사령관의 언성이 다시 높아졌다.

“안 된다 안 된다 하지 말고 대안을 가져와!”

허동세는 허리를 숙이며 반드시 그럴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는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이다.

전직 사령관이 과거의 일을 반성한다?

말로만 하는 반성은 반성이 아니다. 말로만 하는 반성은 일본우익세력이나 하는 짓이라는 인식이 이미 대중들에게 박혀있었다. 토착왜구 종자들이라는 비난을 피하고 싶으면 사과 후에 반드시 배상이나 그에 준하는 행동이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후손들의 풍요와 생존을 위해서라도.

허동세와 그의 동지들은 그들에게 이 미쳐버린 일의 불씨가 그들에게까지 번지지 않도록 다시 힘을 합쳤다.

출국하려던 초능력 청부업자들이 다시 불려왔다. 그것으로도 불안해 초능력 청부업자를 더 고용했다.

청부업자들이 이런 대목을 놓칠 리 없었다. 이번 의뢰는 청부 살해가 아니라 전직 쿠데타 사령관의 손주를 경호하는 일이라 법적인 부담이 줄었지만 가격은 두 배로 올려 받았다.

의뢰인은 어떻게든 그 흑연(黑煙)이라는 놈을 잡고 싶은 모양이었다.

흑연(黑煙). 검은 연기.

흑노야의 후계자.

흑노야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등장한 이 흑연이라는 폭행범은 이미 세간에선 사망기자에 이은 빌런으로 유명해졌다.

사법당국은 골머리를 앓았다. 사망기자에 샌드맨에 이어 이제는 흑연이라는 놈까지?

그나마 샌드맨의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수밖에 없는 일을 다루는 사망기자나 흑연이라는 놈들과 달리 샌드맨은 사적인 원한으로 움직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한 건 외에는 다른 활동도 없었고 말이다.

경찰은 이미 샌드맨 수사본부 습격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 수사관이 강간했던 여성을 수소문해서 주변인에 대한 탐문을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그들을 참고인으로 불러서 조사하려고 한 수사관들은 뜻하지 않은 난관을 만났다.

“왜 안 해주겠다는 건데!”

“전 그 개자식 못 도와요.”

수사관의 말에 경완은 보는 사람이 가증스러움을 느낄 정도로 새초롬하게 고개를 모로 돌리며 대꾸했다.

그가 말한 그 개자식이 누군지는 자명했다. 샌드맨 사건의 피해자이자 강간범인 수사관을 말하는 것이었다.

“범인을 잡는 게 왜 그놈을 돕는 건데!”

“범인을 잡으면 그 염치없는 새끼가 민사를 걸지 않을까요? 그리고 사적 제재를 인정하지 않는 이 나라의 사법체계는 분명 그 새끼 편을 들어주겠죠. 그러면 모처럼 좋은 일을 한 사람이 경제적으로 사망지경에 이를 수 있잖아요? 난 그런 꼴 못 봐요.”

“이 씹새끼야! 그걸 말이라고 해?!”

“거 수사관님. 주둥이 좀 조심합시다.”

경완의 싸늘한 표정에 정수리까지 뻗쳤던 열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대체 자신이 누구에서 쌍욕을 박았던 걸까? 수사관은 너무 흥분했다는 걸 자각하고 호흡을 고르더니 침착하게 설득을 시도했다.

“이건 사법질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야! 이대로 두면 나라꼴이 말이 아니게 된다고!”

그 말에 경완은 코딱지를 파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명색이 수사관인 인간이 강간 피해자를 또 강간했을 때부터 사법질서나 나라꼴 따위는 말이 아닌 것 같은데요?”

“....”

“헛된 곳에 힘쓰지 말고 알아서 자~알 수사해 보세요.”

경완은 무심한 표정으로 파낸 코딱지를 저 멀리 튕기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수사관을 향해 말을 이었다.

그런 단호한 태도에 도저히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수사관이 일어났다.

경완이 돌아서는 수사관의 등을 향해 말했다.

“다음부터 올 때는 치킨 좀 사 들고 와요. 사람이 성의가 있어야지. 다른 사람 시간을 사용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회생활 안 해봤어요?”

“어우, 씨발!”

“김 형사! 김 형사! 진정하고 얼른 가자!”

복장이 뒤집어진 수사관이 발걸음을 돌려 경완에게 향하려고 하자 동료 수사관이 속으로 ‘이 새끼가 분노조절장애가 있었나?’라고 기겁하며 얼른 붙잡았다. 흥분한 수사관은 동료를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돌아갔고 경완은 독방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다시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려던 경완의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응, 안녕. 그런데 왜 댁은 꼭 잘 때만 말을 거는 거야?”

[그게 폐를 덜 끼칠 것 같아서요.]

경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하긴 남들 눈에는 허공에 대고 혼잣말하는 미친놈으로 보일 테니까.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솔직히 당신이 흑노야를 도와줄 줄은 몰랐어요.]

“거 살날 얼마 안 남은 한(恨) 많은 노인네를 외면할 정도로 내가 그렇게 매정한 인간은 아니야.”

[하긴. 당신이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인간이었다면 그렇게 감옥에 얌전히 있지도 않았겠죠.]

“딱히 그런 것도 아냐. 여기도 적응하면 나름 편해.”

경완은 누워서 팔베개를 하며 목소리와 약간의 잡설을 나누다가 물었다.

“혹시 당신 비질란스야?”

[음.. 네, 맞아요.]

“그렇게 솔직하게 대답해줄 줄은 몰랐는걸?”

[예상하고 있었으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잖아요.]

그건 그래.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준에게 들어보니 비질란스 수사는 좀처럼 진척이 없었다. 미국과 한국을 오갈 수 있는 루트는 물론 인터넷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국제 범죄 조직의 연락망과 밀입국 방법만을 찾을 수 있을 뿐 비질란스라는 조직의 그림자조차 찾아낼 수 없었다.

뭐, 다크넷이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루트가 많기는 하지만 비질란스가 그러한 루트까지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역사가 깊고 규모가 거대한 조직이라고 생각할 순 없었다.

그런 힘이 있는 자경단이었다면 진즉 예전부터 활동해 왔을 텐데 왜 굳이 최근에 모습을 드러냈겠는가?

답은 한 가지다. 기존의 수사망에 전혀 걸리지 않는 방법으로 태평양을 뛰어넘는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는 능력.

목소리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존의 그 어떤 도청이나 감시망에도 걸리지 않고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었다. 정확하게 경완에게 텔레파시 능력을 연결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역량의 발로일 것이다.

목소리가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어떻게 한 거예요?]

“뭘?”

[초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 상속? 그래요, 상속시켰잖아요.]

“채널을 통해서 다 보고 느끼고 있었던 거 아니야?”

[기절하지 않으려고 간신히 정신줄만 붙잡고 있었답니다.]

목소리는 그때 느껴진 감각의 폭풍을 떠올렸다. 거센 S입자의 물결이 채널을 찢을 듯 역류하다 저 대한민국에 넓게 퍼졌을 때에는 시원한 카타르시스마저 느꼈다.

분명 자신의 채널을 매개로 이용한 것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지금 그때의 기억과 감각을 떠올려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경완이 대답했다.

“다 그 노인장이 씨앗을 만들 정도로 마지막까지 집념이 대단했기 때문이야. 그의 의지가 강하지 않았다면 결코 S입자를 씨앗으로 만들 수 없었을걸?”

경완이 한 일은 그저 자신이 가진 모든 S입자를 응축시키도록 염을 투사하는 요령을 텔레파시 능력으로 감각적인 요령을 전달한 후 만들어진 씨앗을 자신이 만든 천라지망과 결합시킨 것뿐이었다. 초능력의 씨앗 자체는 그것의 소유주가 직접 그것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염이 투사된 S입자는 자연스럽게 그 염을 투사한 본 주인의 특질을 어느 정도 담을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되면 그것을 이어받은 자는 그 특질에 영향을 받아 비슷한 초능력을 개화하게 된다. 마치 사람들이 앞서 간 사람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가는 경향이 있듯이 말이다.

경완은 이것을 경로의존성이란 개념으로 이해했다. 여기에는 양면성이 있는데, 상속자는 초능력을 상속받음으로써 쉽게, 그리고 강력한 초능력을 개화할 수 있지만 혹시 개화했을 모를 자신만 고유한 초능력의 가능성을 빼앗기는 면도 있었다.

[본인의 의지라.. 그럼 강제로 초능력을 상속할 일은 없는 건가요?]

“쉽지 않지. 세뇌나 협박을 써야 하는데 그런 걸 당할 정도의 의지력이 씨앗을 만들 수 있을지 보장할 순 없어. 그리고 씨앗을 전달해줄 매개 능력자도 필요하고.”

[그럼 지금으로서는 당신만이 할 수 있다는 말이군요.]

“모르지. 세상은 넓으니까.”

경완은 자신의 힘을 과신하지 않았다. 세상은 넓고 힘에 대한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었다. 일제의 741부대처럼 인간을 이용한 비윤리적 초능력 실험이 지금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을 수도 있었다.

연구윤리를 무시하면 기술적 진보는 가속되는 법.

인간의 추악함을 알고 있다는 뉘앙스에 목소리는 말을 아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