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09-다크 히어로와 빌런은 종이 한 장 차이
[.. 혹시 나중에 도움을 청해도 될까요?]
“어.. 음.. 보고.”
경완은 일축하지 않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살다 보면 저 새끼는 내가 귀찮더라고 꼭 조지고 만다라는 생각이 드는 놈이 있을지도? 그럴 때 비질란스는 유용한 수단이 되리라..
가능성을 열어둔 대꾸에 목소리는 저번처럼 귀찮게 자기들 단체에 들어오라고 제안하지는 않았다.
[고마워요.]
그저 그 한 마디만 남기고 채널을 닫았다.
여전히 이름을 모르지만 경완은 굳이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때론 이름조차 묻지 않는 것이 상대방을 배려하는 방법일 수 있었으니까.
물론 그가 배려한다고 그러는 것은 아니라 혹여 이름까지 알게 되면 불필요할 정도로 깊이 엮이게 될까 봐 일부러 묻지 않은 것이지만, 생각해보면 그편이 저 텔레파시 능력자에게도 안심이었다.
그렇잖은가? 아무리 경완이 범죄자에 죄수 신분이라지만 FBI 등 미국의 수사기관과 긴밀한 협조관계에 있는데 말이다.
아무튼, 경완이 수사 중인 흑연 사건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와중에 뜻밖의 접견이 있었다.
“어.. 누구시더라?”
어디서 한 번 본 것 같은 얼굴에 경완은 고개를 갸웃했다. 눈앞의 남자는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번에 사망기자 수사본부에서 한 번 뵀었죠.”
“음.. 이름이..”
“강우빈입니다.”
“아! 그랬었죠!”
경완이 맞장구를 쳤다. 사실 이름 같은 건 기억나지 않았지만 치킨을 사 들고 온 성의가 있는데 그 정도 립서비스가 어려우랴?
솔직히 말해 경완에겐 강우빈은 본명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별명으로 기억되어 있었다.
‘샌드맨’
경완은 이슬이 맺힌 콜라병에 슬쩍 적은 글자를 강우빈에게 보여주고는 그대로 콜라병의 뚜껑을 따서 한 모금 삼켰다.
“캬아~!. 그래, 엔터 업계에서 일하고 계신다고 하셨는데 왜 저 같은 죄수를 만나러 오셨나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당신이라는 존재가 그리 실감 나진 않았거든요.”
“그래서요?”
“그런데 경찰서에서 직접 만나서 그 유명한 진실의 스무고개를 경험하고 나니까 당신에 대해 깊은 흥미를 느꼈습니다.”
“죄송합니다. 전 그런 취향이 아니라서요.”
경완의 급발진 농담에는 ‘샌드맨’이란 글자를 보고도 동요하지 않은 강우빈도 살짝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하하. 재밌는 분이군요.”
“좆같은 인생 재밌기라도 해야 버티죠. 암튼, 본론으로 넘어가죠.”
“드시며 들으시죠. 조금 설명이 길어질 수 있으니까.”
경완은 그 말에 사양하지 않고 뜯고 있던 닭다리를 마저 뜯기 시작했다.
이어진 강우빈의 설명은 절차적으로는 복잡했으나 핵심은 간단했다. 경완에 대한 다큐를 찍고 싶다는 것이었다.
“왜요?”
“일단 영상을 제작하는 사람으로서 그러고 싶다는 창작욕구입니다.”
“겨우?”
“또 이거죠.”
강우빈은 경완에게 검지와 엄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였다. 돈이 된단 말이었다.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라면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허락이 나올까요? 알다시피 내가 이 나라에 저지른 짓이 있는데 말이죠.”
그 말에 강우빈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가능성을 피력했다.
“하나, 대한민국은 표현의 자유가 있는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둘, 저는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이죠. 셋, 당신은 미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것도 주기적으로요.”
“국가기관의 허락을 필요하지 않다는 말인가요?”
“한국 정부의 허락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죠.”
“미국의 허락은 필요하다?”
“아무리 자유주의국가라지만 공권력은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아주 똑똑하게 구도를 짜시는군요.”
경완의 말에 강우빈은 미소를 지었다.
경완은 미국인이 아니다. 경완이 한국 국회의사당에서 저지른 짓이 미국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할리우드는 미국 정계와 관련이 깊으며, 미국인 강우빈 역시 엔터 업계 종사자로서 할리우드에 인맥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조합하면 한국의 기득권이나 국회의원들이 질색을 해도 경완에 대한 다큐는 충분히 만들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단 한국에서의 방영은 힘들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강우빈은 개의치 않았다. 정보화 시대에 영상물이 국경을 넘는 건 너무나 쉬웠으니까.
경완이 물었다.
“그러다가 한국 정부에서 출국을 거부하면요?”
“무슨 명분으로 출국을 거부한다는 거죠? 이미 수사 공조까지 하기로 협상한 상황에서?”
경완은 유용한 수사자원이었다. 이미 국제적 범죄에 대해 서로 협력하기로 했으면서 경완을 미국으로 보내지 않는다는 건 한국 측의 일방적인 계약위반이라고 해석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한국은 국제 범죄의 청정국도 아니다. 외노자들과 함께 국제 범죄조직들도 기어들어 왔으며, 부산항은 마약 물류의 허브로 이용되는 동시에 마피아의 자금까지 세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번에 흑노야 사건만 해도 그렇다. 그를 잡기 위해 해외의 청부업자들이 잔뜩 들어오기까지 했잖은가? 그들도 따지고 보면 국제적인 범죄자들이다.
경완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렇다면야. 전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알아서 하세요. 혹시 제가 이렇게 저렇게 해줘야 한다는 건 없죠?”
“인터뷰만 정성껏 해주시면 됩니다.”
“뭐, 그런 거라면..”
강우빈의 설명에 경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큐를 수락했다.
= = = = =
경완의 미국행은 정기적이었다. 나라가 넓으니 사건도 많고, 사건이 많은 만큼 좀처럼 용의자를 추정할 수 없는 사건도 많았다.
하지만 그 모든 사건에 경완이 능력을 사용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FBI만 경완의 능력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CIA에선 자신들이 구금한 이들이 어디의 스파이인지 경완을 통해 확인하려 들었고 NSA에선 자신들이 체포한 해커로부터 다른 해커의 이름을 듣기 위해 경완을 이용하려고 들었다.
그뿐인가? 딱히 증거가 없어 용의자를 특정하지 못한 미결사건에서 용의자를 특정하기 위해 FBI 텍사스 지부까지 가야 했다.
그리고 그 길에 강우빈이 따라붙었다.
“허락받은 거예요?”
“네, 여기 공문서요.”
강우빈이 서류를 보여주었다. 뒤에서 김준이 못마땅한 눈으로 강우빈의 등을 보고 있었지만 뒤통수에 눈에 달리지 않은 이상 그걸 볼 리가 없었다.
뭐, 경완이 느낀 강우빈의 성격대로라면 김준의 저런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해도 끄떡도 하지 않을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강우빈은 경완이 일하는 모습을 간략히 찍었다. 물론 찍은 내용은 김준과 톰의 검열을 거쳐 내보내면 안 되는 장면들을 수정하고 삭제했다.
“언론 자유랍시고 버틸 줄 알았는데 순순히 수정하네요?”
경완의 한 마디에 강우빈은 어딘가 뼈있는 대답을 돌려줬다.
“자유는 항상 책임과 의무를 동반하기 마련이죠.”
고소미가 졸라 고소한 미국 출신다운 말이었다.
“그런데 이런 거 정말 방송해도 돼요?”
테러단체나 범죄조직들에게 새삼 경각심을 심어주지 않을까?
그러한 뜻에 강우빈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차피 당신이 미국에 어떤 식으로 협조하고 있는지는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을 겁니다. 당신이 한국 국회에서 한 일이 워낙 임팩트가 있어서 말이죠.”
한국 정부 차원에서 그 장면을 삭제하려고 사방으로 힘을 써보았지만 이미 전 세계적인 밈의 원천이 되어버린 상황이라 여전히 잊을만하면 짤방이나 동영상이 올라왔다.
경완이 물었다.
“그럼 지금도 절 싫어하는 놈들이 노리고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지 않을까요?”
강우빈의 반문에 경완은 김준과 톰을 보았다. 강우빈도 경완을 따라 두 사람에게 시선을 주었다.
“....”
“....”
말 없는 두 사람의 압박에 김준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톰과 쏼라쏼라 뭐라고 하더니 경완에게 말했다.
“미스터 리의 경호 등급은 매우 높습니다.”
“그렇겠죠.”
“당신을 해하려는 어떤 시도도 사전에 감지하고 막을 수 있습니다.”
“역추적도 가능하겠죠?”
“.. 음.. 그렇습니다.”
말을 망설이는 김준은 경완에게 말하지 않은 내용을 들켰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경완에 대한 모든 테러와 암살시도는 감시망에 의해서 걸러진다. 그것은 그를 보호하겠다는 순수한 목적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 뒤가 구린 놈들이니 그놈들을 역으로 추적하는 태세가 동시에 갖춰져 있었다.
즉, 경완은 미끼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것이다.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기는 힘들다는 건 알죠?”
한 번에 두 가지 목표를 설정하면 자연스럽게 역량도 나뉜다.
그 점을 지적하는 경완의 말에 김준은 진지한 표정으로 약속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번에 있었던 하이잭 같은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경완은 그 말을 받아들이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속내는 두고 봐야 안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텍사스에서의 일이 이번 미국 출장의 마지막 일이었다. 경완의 능력은 법적으로 증거능력이 없었지만 그가 조용히 용의자를 특정해주는 것만으로도 막혔던 수사의 물꼬가 트였기에 충분히 가치 있는 일정이었다.
일행이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댈러스에 도착했을 때 강우빈이 김준과 톰에게 부탁했다.
“잠시 인터뷰 시간을 낼 수 있을까요?”
김준이 대꾸했다.
“지금까지 인터뷰할 시간은 많이 주지 않았습니까?”
“네. 하지만 이번 인터뷰는 게스트를 초청해서 진행할 생각이거든요.”
“게스트?”
김준이 고개를 갸웃하자 강우빈은 경완이 듣지 못하게 김준의 귀에 뭐라고 속삭이더니 말을 이었다.
“신원이 확실해서 문제 될 건 없을 겁니다.”
김준은 톰을 보았고 톰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톰의 허락을 받은 김준이 강우빈에게 말했다.
“하지만 인터뷰 장소에 우리도 함께할 겁니다.”
“물론이죠.”
선뜻 고개를 끄덕인 강우빈은 경완을 향해 엄지를 쳐들었다.
“기대해도 좋습니다.”
뭘 기대하라는 건지..
네 사람은 공항 근처의 호텔로 향했다. 어차피 비행기 이륙까진 시간이 남아있었다.
경완이 방안에 비치된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김준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경계하는 기색으로 문을 열었다. 그 와중에 톰은 강우빈을 주시했다. 여전히 감시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베테랑이었다.
“반가워요.”
“네, 반갑습니다.”
방문객이 여성인가? 김준과 방문객이 인사를 나누는 소리에 여성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곧 김준이 터준 문을 통해 저절로 와우!라는 탄성이 튀어나올 정도의 미녀가 들어왔다.
머리는 흑단같이 까맸고, 피부는 투명할 정도로 하얬으며, 촉촉한 입술은 붉고 싱그러웠다. 이목구비는 요염한 듯 청순했는데 몸매는 늘씬하면서도 나올 곳은 확실히 나온 것이 어디 슈퍼모델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과연 강우빈이 기대해도 좋다고 장담할 정도의 미녀였다.
하지만 경완은 그녀의 아리따운 자태보다는 얼굴에 시선을 집중했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어.. 그러니까.. 음.. 얼굴은 알겠는데..”
경완의 말에 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빠. 설마 내 이름 까먹었어?”
“미연이었던가 미역이었던가?”
경완의 말에 미연은 발끈했다.
“미연! 이미연! 벌써 치매가 온 거야?”
“미연이었던가 미역이었던가?”
“오빠!”
“미안. 내가 치매기가 있어서 말이야.”
경완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미연은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그녀가 어처구니없어하며 입을 벌리는 와중에 경완이 강우빈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