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10-빌드업 히어로즈
상황은 그에게 점점 불리하게 변했다. 도망치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와이어와 쇠사슬로 짠 철제 그물이 검은 연기를 타고 공중으로 도망가려는 그를 계속해서 지상에 붙잡아 놓았다.
이대로 흑연이 사냥당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래! 죽여! 내 자식들을 죽인 그 새끼를 죽이라고!”
안전한 곳에서 노인이 전투현장의 영상을 보며 흥분했다. 그의 자식을 죽인 건 흑노야지만 그의 초능력을 이어받아 손주를 두들겨 패고 다리를 부러뜨린 흑연은 노인에겐 흑노야와 동일 인물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흑연의 불리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검은 옷의 남자가 배후에서 청부업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검은 옷의 남자는 카람빗 한 자루를 들고 청부업자들에게 달려들었다. 칼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청부업자들이 인원을 갈라 검은 옷의 남자를 상대하려고 했지만 흑연의 상황 판단이 더 빨랐다. 검은 연기가 검은 옷의 남자를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검은 옷의 남자가 전위, 그리고 흑연이 후방.
두 사람의 호흡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염동력이라는 능력은 둘 사이에 맞지 않은 합도 충분히 메꾸어주었다.
검은 연기는 치명적인 타이밍에 날아오는 석궁의 화살, 투척된 비도 등을 막아 검은 옷의 남자가 달려들 틈을 충분히 만들어주었다.
포위망이 흐트러졌다. 둘의 조합은 초능력 청부업자들을 물리치기엔 부족했지만 몸을 빼기엔 충분했다.
“으아아아! 으아아악!”
도망가는 둘을 보며 누군가가 광기에 찬 목소리로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부수고 집어던졌다.
= = = = =
다시 수도승처럼 조용한 생활을 시작한 경완은 심심함에 온몸을 비틀고 있었다.
남동건이 일을 너무 성실하게 잘해서 경완이 나설 틈이 없었다. 초능력자가 아니더라도 교도소의 기강을 헤치는 자는 일단 지가 나서서 쥐어팼고, 초능력자들 중에선 아직 남동건에 비견될 놈도 없어서 감히 반항할 놈도 없었다.
교도관들도 약간(?) 또라이 기질을 보이는 경완보다 사회재활의 의지를 보이고 싹싹한 남동건을 더 자주 의지했다.
인권위에서 보면 뭐하느냐고 지적질을 할 상황이지만 이미 초능력 범죄자 전용 수용시설이 되어버린 교도소는 정부와 기업의 비호아래에 있는 상황이라 감히 인권위 따위가 뭐라고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인권 운운해도 작금의 상황에서 초능력 범죄자를 문제없이 수용할 곳은 반드시 필요했으니까.
그런 경완의 심심함을 조금이나마 달래주는 건 인터넷 서핑이었다.
요즘에는 미국에서 방영된 ‘더 멘탈리스트’라는 제목의 다큐에 관한 게시물과 댓글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바로 강우빈이 경완을 소재로 찍은 그 다큐였다.
댓글에는 경완에 대한 욕설과 옹호하는 이들의 언쟁이 인신공격 수준으로 오갔다.
핵심은 사적제재의 허용이 만들어내는 법치의 파괴와 그로 인한 사회 불안정, 그리고 불공평할 정도로 망가진 법치에 대한 시민의 저항권 사이의 의견차이였다.
이 둘 사이의 의견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왜냐면 현재 자력구제를 행하고 있는, 소위 빌런들을 잡아들이는 것과 사법체계의 개혁이 동시에 진행되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또 한 가지 쟁점이 설사 빌런을 먼저 잡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사법개혁이 순탄하게 이루어질까라는 점이었다. 애당초 기득권과 결탁해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그들이 순순히 개혁을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않은가? 언론과 정치인, 법조인 등 가능한 인맥을 모두 동원해 개혁을 돈좌시키려고 똘똘 뭉칠 것이 뻔했다.
이렇게 어려운 문제이다 보니 사적제재냐 시민저항권이냐라는 의견의 차이는 비단 경완 한 사람에 대한 호불호나 찬반을 벗어나 소위 빌런이라고 불리는 이들 모두를 뭉뚱그려 반대하는 사람과 인정하는 사람으로 나뉘었다.
‘경축! 그 새끼 손자 입원!’
└빨갱이 새끼
└응, 가스통 틀딱.
└좀 그렇네요. 이 나라에 연좌제는 없는데.
└니 애비애미나 자식새끼들이 길에 나갔다가 군인에게 붙잡혀서 강간당하거나 죽을 때까지 개머리판으로 처맞은 다음 시신도 못 찾게 어디 구덩이에 암매장 당하고서도 그런 소리 나오는지 보자.
└말 너무 심하게 하네
└응 다음 피해자에게 공감 못하고 가해자에게나 공감하는 예비범죄자
└공감 운운하는 거 보니까 페민가 보네
└페미는 가해자에게 공감하는 네가 페미
└어디서 병신 냄새 안 나냐?
└어 난다. 니가 오니까.
“낄낄낄!”
경완은 악동같이 웃으며 타자를 쳤다. 그가 온라인에서 하는 짓은 마치 이쪽에서 장작이 모자라면 저쪽에서 가져오고, 저쪽의 장작이 모자라면 이쪽에서 가져오는 것과 같았다.
그는 자극 받은 사람들의 반응에 낄낄 댔지만 하루 24시간 인터넷을 할 수는 없었기에 다시 독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자기 위해 누운 그는 문득 진한 현자타임에 빠졌다. 이게 다 무슨 헛짓거리란 말인가?
“심심하구만.”
경완은 자신의 병명을 정확하게 진단해냈다. 그에겐 자극이 필요했다.
하지만 돈도, 명예도, 여자도, 사회도 모두 포기한 그에게 무슨 자극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런 고민을 안고 있는 그에게 얼마 후 강우빈이 접견을 왔다. 경완은 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귀찮음보다 심심함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대박이 났습니다.”
“감독님이 잘 만드신 덕분이겠죠.”
경완은 강우빈이 사온 치킨을 뜯으며 공치사를 되돌려주었다.
강우빈이 먼저 돈 얘기를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출연료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글쎄요? 어디 좋은데 기부나 할까요?”
“훌륭한 마음 씀씀이지만 과연 괜찮은 재단이 있는지 회의적입니다.”
부정적인 어조에 경완이 계속 해보라는 듯이 강우빈을 주시하자 그가 말을 이었다.
“사실 기부단체이라는 곳은 사람들의 동정심을 미끼로 하는 사업모델이잖아요.”
인건비, 자재비 등 온갖 명목의 운영비를 제하고 나면 기부금의 몇 퍼센트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전달될까?
이에 경완은 이렇게 대답했다.
“위선적이기는 하지만 아예 안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요?”
위선이 역겨워서 작은 선행조차 베풀지 않으면 단 한 명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누군가 중간에서 기부금을 전달하는 일을 업(業)으로 삼았기에 편하게 기부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강우빈은 여기에 이렇게 대답했다.
“문제는 사람의 선의로 자기 이득을 챙겨먹는 쓰레기가 많다는 거죠.”
기부금으로 호화요트 생활을 하고 성과금이랍시고 돈을 나눠주니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기부단체라고 하면 색안경부터 끼고 보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언제부터 기부단체가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이 되었단 말인가? 내가 기부하는 곳이 진짜 선의로, 최소한의 운영비만 남긴 채 어려운 이들에게 기부금을 최대한 전달하는 것을 기대하는 게 잘못이란 말인가?
강우빈이 말을 이었다.
“허락해주신다면 경완 씨의 출연료와 로열티로 기존의 재단과 성격이 다른 재단을 만들어 보고자 합니다.”
“무슨 재단인데요?”
“내부고발자, 아니 공익신고자들을 경제적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보려는 재단입니다.”
“오호~.”
경완은 흥미가 생겼는지 책상을 향해 상체를 숙였다.
강우빈은 그런 그의 반응이 흡족한지 자신도 살짝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작당모의하듯 이야기를 풀어냈다.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는 재단은 많지만 썩은 사회 때문에 희생을 각오한 이들을 구제하는 재단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더군요.”
“하긴. 그러면 기업들이 기부금을 안 주겠죠?”
“당연히 그렇죠. 치사한 놈들 아닙니까? 사회에 도움이 되겠다고 용기 낸 사람 생계를 그렇게 틀어 막고 말이죠. 그러지 않았다면 제가 이런 제안을 꺼내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기업이 불법적인 일이나 나쁜 짓을 할 때 그것을 일일이 단속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징벌적 배상제도도 없는 이 나라에서?
결국 공익신고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신고한 공익신고자를 제대로 보호해주지도 못하는 게 이 나라의 현실이자 수준이었다.
만일 공익신고자라는 사실이 들켜버리기라도 하면 내부신고자, 배신자라는 딱지가 붙어서 취업도 힘들어진다. 해군 비리를 고발했던 장교도 기업 같은 곳에 취업을 못해서 결국 사회부패를 감시하는 국가기관에 들어가지 않았는가?
이 말은 공익신고자가 그 신원이 밝혀지면 국가가 구제해주는 거 외에는 먹고 살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도 전직 장교씩이나 되고 그만한 능력이 되는 사람이니 가능한 일이었다. 국가조차 아무리 공익신고를 할 정도로 양심적이라도 능력이 모자란 사람에게 자리를 줄 순 없었다. 그걸 가지고 물고 뜯는 인간들이 반드시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기회를 얻으면 누군가는 그 기회를 박탈당한다. 밥그릇은 예민한 문제였다.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제 개런티와 출연료 전부 재단에 출연하죠. 그런데 돈이 충분하겠어요?”
“모자라면 다른 곳에서 기부 받으면 됩니다. 공감할 사람이 적지 않겠지만 재단의 성격상 지출이 그리 많지도 않을 거라서요.”
하긴 공익신고자가 그렇게 많을 리도 없었다. 공공의 이익, 공공선에 대한 개념을 갖추는 동시에 자신의 손해를 무릅쓰고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는 이가 많을 리 있겠는가?
경완은 또 다른 점을 지적했다.
“싫어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 괜찮겠어요?”
공익신고자를 경제적 곤경으로부터 보호한다? 기업들이 싫어할 만하다. 그리고 그런 기업들이 검찰과 법원을 오래전부터 관리해오고 있다는 건 이미 암암리에 퍼진 사실이었다.
이에 강우빈은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전 미국인이랍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인맥도 넓죠.”
“오! 그것 참 든든하네요.”
“그런데 경완 씨는 계속 교도소에 있을 건가요?”
강우빈이 화제를 전환했다.
“왜요?”
“능력이 있으니까 언제든 자유의 신분이 될 수 있을텐데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말이다.
강우빈의 질문은 역설적으로 그가 상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암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이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상상 그 이상의 일이 일어나는 현실이란 세상.
경완이 마음만 먹는다면 한국에서의 사면이든, 미국인으로의 신분세탁이든 이 교도소를 벗어날 능력은 충분히 있었다.
단지 그 지랄 맞은 성질 머리만 아니라면 말이다.
“아유~. 저를 위해서라도 세상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좀 떨어져 지는 편이 좋아요.”
“하긴. 당신은 세속적 가치에 얽매인 사람은 아니죠.”
경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그에 관한 자료와 다양한 전문가의 분석 내용까지 인터뷰하고 취재한 강우빈은 경완이 어떤 인간인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엉덩이가 참 무겁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는 사람이죠, 당신은.”
“린정합네다.”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우빈은 거기서 다시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요새 미국에서 아주 논란이 되는 계약이 체결된 거 아세요?”
“글쎄요? 외신은 거의 안 봐서.”
워낙 다이나믹 코리아라 굳이 외신까지 찾아보지 않아도 무수히 많은 사건, 사고들이 터지고 있었다.
하지만 강우빈이 말한 내용은 심상치 않았다.
“디트로이트 시와 전미 초능력 협회 사이에 MOU를 체결했다는군요.”
“체결 한 것 자체보다는 내용이 핵심이겠네요.”
“네. 계약의 내용은 일종의 치안 조직의 민영화입니다.”
“어.. 그거 사실상의 자경활동 아닌가요?”
“글쎄요. 저도 참 뭐라고 정의내리기 어렵네요.”
군대나 경찰이 일반적으로 국가산하의 조직인 이유는 폭력을 독점함으로써 공권력을 보장하기 위함에 있었다. 북한이 선군정치를 하는 것도, 독재자가 군대화를 사유화 하려고 드는 것도 결국 권력이란 총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치안 조직의 민영화라니? 총기가 자유일 정도로 시민저항권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나라라서 그런가? 한국하고 상당히 정서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