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10-빌드업 히어로즈
김마리아가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우리에겐 납치당한 여자를 찾을 수 있는 장비가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이 장비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에스퍼 계열의 능력자가 필요하다는 거죠.”
“에스퍼 계열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그냥 에스퍼 계열로는 안 돼요. 능력이 매우 뛰어나야 하죠. 그래요. 당신처럼 저격수의 위치를 곧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말이죠.”
“저는 초능력자가 아닌데요?”
“어머? 우리 말장난은 하지 않기로 해요. 시간 아깝잖아요.”
경완은 은근한 미소를 짓는 김마리아와 물끄러미 시선을 교환했다. 그녀의 눈동자에선 한 점의 의심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경완이 초능력자라는 것을 이미 확신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뭐, 그렇다고 치고, 과연 제가 그쪽을 믿을 수 있을까요? 솔직히 협조를 핑계로 인체실험을 하려는 게 아닌가라는 의심이 강하게 들어요.”
경완의 말에 홍 소장이 놀란 눈으로 김마리아 소장을 향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우리 연구소에서 무엇을 연구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어··· 알고 싶지 않은데요.”
그녀의 눈빛에서 뭔가 귀찮은 걸 느낀 경완이 말했지만 그녀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우리 연구소는 초능력의 개발과 관련 장비를 개발하고 있어요. 다시 말하자면 연구에 협조하는 초능력자들은 누구보다 빨리 자신의 능력을 개발할 수 있다는 말이죠. 앞으로 초능력이 시대를 이끄는 패러다임이 될 텐데 연구소에 협조할수록 그러한 시대에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먼저 탈 수 있겠죠.”
김마리아의 말은 초능력이 있는 재소자들에겐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세속적 가치에 큰 관심이 없는 경완은 별로 그리 끌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기색을 알아차린 김마리아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제적 위상에 대한 자격지심이 좀 있어요.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의 기술력이 세계적 기준에서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도 있고요. 하지만 실제로 우리나라의 기술력은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수준입니다.”
“기초연구 쪽은 떨어진다고 아는데요?”
“우리나라 역사를 반추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죠. 하지만 생각해봐요. 이미 기초연구 쪽을 꽉 잡고 있는 곳들이 있으니 필요하면 거기로 가서 공부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아요?”
이미 기초연구에 열심히 투자해서 감히 덤비기 어려운 아성을 쌓은 나라들이 있다. 후발주자인 대한민국이 굳이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기초과학에 투자를 해봤자 경쟁에서 밀릴 뿐이었다.
막말로 돈이 있어야 연구에 투자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래서 우선 돈이 되는 응용연구, 상용화 기술에 투자했다. 원천기술을 보유하기 어려운 상황에선 그렇게라도 가성비를 추구해야 했다.
학자들이야 이러한 정책을 우려하고 비판하지만,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경제를 일으키고 연구에 투자할 수 있는 기반을 쌓을 수 있었다.
물론 상당 부분을 여전히 외국의 과학 선진국에 의존하고 있고 거액의 로열티를 지불하고 있지만 응용과학분야를 넘어 기초과학분야까지 투자할 여력을 만들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었다.
또한 기초과학보다 응용과학에 집중된 투자는 과학기술의 후발주자로서 ‘견제’를 받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김마리아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초능력은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에요. 모두가 맨땅에 헤딩해야 하죠. 그래서 우리나라는 현재 여기에 큰 투자를 하고 있어요.”
모든 나라가 동시에 같은 라인에 선 경기다. 앞으로 백 년 안에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큰 투자를 한 것 치고는 경비가 너무 빈약한 거 아닌가요?”
경완은 그 연구 자산인지 뭔지 하는 여자가 납치된 점을 꼬집었지만 김마리아는 거기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본인의 생각에는 이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용할 수 있는 자원 안에서 최선의 보안을 유지했어요. 하지만 우리의 연구성과를 탐내는 곳이 많다는 걸 유념해야 해요.”
외국을 암시하는 걸까? 경완이 대놓고 물었다.
“북한,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이 중에 어디에요?”
“일단 미국은 빼고, 그 모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왜 미국을 뺐죠?”
“미국은 당신의 가치를 생각보다 훨씬 높게 평가하고 있거든요. 까도 까도 양파 같은 사람이라...”
한 마디로 경완을 보관(?)하고 있는 우방국과 괜한 척을 질 이유가 없다는 말이었다.
“양파는 다 까면 아무것도 안 남는데..”
경완은 생뚱맞은 농담을 했지만 치맥을 감상하는 듯한 김마리아의 미소에 변화를 줄 순 없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럼 어제 일이 외교문제로 비약될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까?”
“그건 한영미 씨를 찾아봐야 알 수 있는 거겠죠?”
“흐으음..”
경완이 고민하자 김마리아가 물었다.
“무엇을 원하세요? 제가 소장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배경이 좋거든요. 웬만한 건 다 들어드릴 수 있어요.”
“흐으으으음.”
그 말에 경완의 고민이 더 길어졌지만 상대를 그리 오래 기다리게 하진 않았다.
“재벌급 황제 독방 가능합니까?”
“재벌급 황제 독방? 뭔지 상상이 잘 안 가네요.”
“접견실 출퇴근이나 병원 취침 같은 거 안 바라니까 플레이스테이션과 엑박을 독방에 설치해주시고요, 또,”
“야! 그게 말이 되냐?!”
홍 소장이 기가 차서 끼어들었지만 경완의 요구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푹신한 소파도 넣어주세요. 그러면 공간이 부족할 테니 더 넓은 방이 필요하겠죠?”
“그 정도야 어렵지 않아요. 우리 연구소로 이감된다면 얼마든지 가능해요.”
경완의 요구에 대한 김마리아의 대답이었다. 그녀가 해주겠다고?
하지만 경완은 뭔가 쎄~ 한 느낌을 받았다. 죄수가 교도소에서 연구소로 이감된다? 이거 모양새가 영 그렇지 않은가?
경완이 홍 소장을 보며 물었다.
“홍 소장님, 여기선 안 돼요?”
저 조건을 연구소가 아니라 교도소 측에서 들어줄 순 없냐는 물음에 홍 소장은 펄쩍 뛰었다.
“야! 그렇게 형평성이 어긋난 대우를 하면 재소자들이 관리가 되겠냐?”
아무리 경완이 언터처블급 대우를 받는다고 해도 가식적이나마 형식은 유지하고 있었다.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변명의 여지가 있다는 것. 그것은 공무원인 홍 소장에겐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경완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안 돼요? 재벌 회장님들은 버젓이 하는데?”
“네가 재벌급이 되냐?”
그 말에 경완은 고개를 반대로 갸웃했다.
이상하다? 본인은 된다고 생각하는데 세상은 아직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야만적인 폭력보다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제도권 사회의 고정관념이 있으니까 돈이라곤 쥐뿔도 없는 경완이 재벌 회장님급 대우를 받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건방지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홍 소장이 거절하자 경완은 급 귀찮음이 몰려왔다. 협조고 자시고 더 이상의 흥정도 귀찮았고 김마리아와 얽히면 더 귀찮을 것 같았다.
“됐어요. 안 해요. 나 갈래요.”
“해줄게요.”
의자에서 떨어지려는 경완의 엉덩이를 붙잡은 건 김마리아의 대답이었다.
경완은 의아해했다. 교도소의 책임자는 홍 소장인데 어떻게 김마리아가 해준다는 말일까?
김마리아가 홍 소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홍 소장님.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고 계시나요?”
“.. 저 녀석에게 특권적인 대우를 해줘야 할 정도입니까?”
“세상은 저 사람을 범죄자라고만 생각하지만 저 사람이 저지른 범죄를 빼고 생각한다면 엄청난 인재랍니다.”
“....”
아니 그걸 빼고 생각할 수 있나? 의문이 들었지만 사실 거액의 횡령과 배임을 저질러도 국가 경제에 이바지했다고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는, 공과(功過)의 분리와 결합이 재판관 꼴리는 대로인 사법체계를 생각하면 김마리아의 논리는 현실과 잘 부합했다.
그녀는 끼어들 틈도 없이 계속 말을 이었다.
“경완 씨가 조금이라도 얌전히 살 생각이 있었다면 미국에서 거액의 연봉을 주면서까지 귀화시키려고 했을걸요?”
김마리아의 설명이 놀랐는지 살짝 커진 눈으로 경완을 보는 홍 소장의 표정엔 ‘진짜?! 저 미친놈을?’이라는 감상이 서려 있었다.
경완이 그런 홍 소장을 안타깝다는 눈으로 보며 한마디 해주었다.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 같은 것만 보니까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죠.”
홍 소장은 억울했다.
“아니! 내가 그것만 보는 사람이 아니야! 나름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둔다고!”
김마리아가 홍 소장을 두둔했다.
“사실 홍 소장님이 경완 씨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도 이상하진 않아요. 언론에서 경완 씨에 대한 언급을 잘 안 하려고 하거든요.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력은 그리 좋지 않죠.”
대중이 개돼지급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위에서 해쳐 드시는 분들에겐 이 얼마나 큰 축복이란 말인가?
게다가 계속해서 사건이 일어나니 경완이 저지른 일도 점차 존재감이 지워졌다.
하지만 홍 소장은 공무원답게 규정에 어긋날 정도로 경완에게 특권적 혜택을 베푸는 것이 망설여졌다. 그건 교도관들과 경완이 알아서 샤바샤바해서 적당히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나마 혜택을 베푸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후폭풍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김마리아 소장은 새로운 제안을 내어놓았다.
“교도소와 연구소의 경계선에 붙은 우리 쪽 땅에 경완 씨를 위한 작은 부지를 제공하죠. 또 저희 연구소의 예산을 들여 경완 씨만의 독방을 꾸려줄게요.”
“하지만.. 그.. 규정이..”
“상부의 허락은 제가 받겠어요. 어때요, 제 제안이?”
김마리아는 다시 경완을 보며 물었다.
“보아하니, 이 교도소에 상당히 정을 붙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저희 연구소로 이감되길 거부할 정도로 저희를 의심하는 상황에서 서로의 신뢰 관계를 쌓기 위해선 이게 최선일 것 같은데요?”
아니? 이렇게나 편의를 봐주겠다고?
이쯤 되면 흥정이 귀찮아지던 경완의 귀도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방에 이상한 짓을 하는 건 아니죠?”
“당신이라면 알 수 있지 않나요?”
경완의 협조를 바라는 상황에서 수상쩍은 짓으로 자기 발등을 찍을 짓을 하지 않는다는 말에 경완은 그녀의 제안을 전격적으로 수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로 경완은 그 탐지 장비라는 것을 사용하기 위해서 곧장 연구소로 이동했다.
연구소의 내부는 온통 하얀색으로 첨단시대의 병원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어젯밤에 있었던 강탈과 전투의 흔적이 아직 남아있었지만, 첨단 연구시설이라는 느낌을 훼손할 정도는 아니었다.
경완은 김마리아를 뒤를 따라 교도관과 함께 걸었다. 곳곳에 ‘일성경비’라는 글자가 적힌 조끼를 입은 경비들이 서서 연구소장의 뒤를 따라 걷는 경완을 힐끔거렸다.
“여기예요.”
김마리아는 1층 지하로 들어갔다. 방 서너 개는 합친 듯한 넓은 공간에 MRI장치를 45도로 세운듯한 장치가 있었다.
“이것이 우리 연구소의 자랑인 천리안 장비예요.”
“천리안?”
갸웃하는 경완에게 김마리아 소장이 직접 설명하길, 뇌파 자극과 뇌파 스캐닝 기술 등 각종 최신 첨단 뉴럴 공학과 빅데이터 처리 기술 등을 이용한 자신작이란다. 에스퍼 계열의 초능력자를 일종의 4차원의 망원렌즈, 확대경, 안테나처럼 사용한다는 것이 기본 아이디어라는 것이다.
S입자가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받는다는 성질을 이용했다는데 그 이상은 전문적인 영역이고 감춘 기밀도 많아 경완도 대충밖에 알아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