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10-빌드업 히어로즈
홍 소장은 그런 경완을 짜게 식은 표정으로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김준을 보며 물었다.
“그럼 이제 미국 교도소로 이감되는 거요?”
“... 그건 아닙니다.”
김준이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미안한 티를 안 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걸 결코 홍 소장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미스터 리에 대한 대우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미스터 리에게 미국국적을 준 이유는 타국이 그를 납치하거나 탐낼 경우를 대비한 것이니까요.”
요컨대 우리가 침 발라놨으니 건들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고 만일 경완에 대한 납치 시도가 일어난다면 미국이 개입할 수 있는 명분도 되고 말이다.
“그리고 미스터 리.”
“응? 왜요?”
“죄송하지만 한 사람을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누군데요?”
“저예요!”
벌컥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리따운 중년 여성이 있었으니 경완도 익히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연구소장님!”
하얀 가운을 망토처럼 펄럭이며 검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들어오는 김마리아를 발견한 홍 소장의 얼굴에 화색이 끼었다.
“오랜만이에요, 홍 소장님.”
“하하하! 네 반갑습니다.”
그 모습에 경완은 홍 소장의 집에 보낼 편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사모님. 바깥양반이 외간 여자한테 헤벌쭉하고 있어요~.
그런 줄도 모르는 홍 소장과 인사를 나눈 마리아는 경완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경완 씨. 잘 지내고 있어요? 게임은 잘하고 있고요?”
자신을 보며 눈을 반짝이는 그녀의 모습에 경완은 심히 부담감을 느꼈지만 그녀가 마련해준 아늑한 소파와 배려심 넘치는 여러 게임 타이틀을 떠올리며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었다.
호의를 베푸는 상대를 찌푸린 표정으로 대하는 것이야말로 무례가 아니겠는가?
“아유~. 아무렴요, 소장님. 소장님도 잘 지내셨죠?”
“한영미 씨를 잃은 이후로 상심하고 있었는데, 매우 흥미로운 초능력자를 발견해서 한시름 놓았어요.”
“아, 그거 잘됐네요.”
경완은 마치 그 초능력자가 마치 자신이 아니라는 듯이 축하해주었다.
다행스럽게도 정말 그 초능력자가 경완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경완에 대한 마리아 소장의 흥미가 줄어들었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최대 관심사 안에 있었다.
그녀는 경완을 보며 이렇게 이야기를 꺼냈다.
“근래에 미국으로부터 좋은 제안을 받아서 말이에요.”
“무슨 제안이요?”
“간단히 말하자면 연구협약이에요.”
“혹시 제가 뭐 거기에 필요하다는 건 아니죠?”
경완의 말에 김마리아는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했다.
“경완 씨가 도와주면 많은 도움이 되겠죠. 제가 들어보니까 경완 씨 이번에 또 각성했다면서요?”
“누가 그래요?”
“경완 씨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요.”
“그런 관심 별로 달갑지 않네요.”
경완의 심드렁한 대꾸에 그녀는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원래 능력 있는 사람은 관심을 받게 되어 있답니다. 그러니 그냥 즐겨요.”
“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피하지 못하면 즐기라는 말은 그저 피하지 못한 놈들의 정신승리에 불과했다. 해일이 닥쳐오는데 서핑보드를 준비하는 놈은 용자 아니면 미친놈, 둘 중 하나에 불과했고 경완은 미친놈이 아니었다.
물론 거기에 동의할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말이다.
마리아가 웃으며 대꾸했다.
“호호! 경완 씨는 농담도 잘하네요. 아무튼, 경완 씨에게 달콤한 제안을 하나 할게요.”
그녀의 제안은 전혀 어려운 것이 없었다. 그냥 심심할 때 자유롭게 연구실을 드나들면서 뭔가 생각나거나 조언할 것이 있으면 솔직하게 말해달라는 것이 전부였다.
경완은 황당함에 눈을 껌벅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제정신이세요?”
초능력에 대한 지식이야말로 국익의 중심이 될 비전이었다. 그런데 그런 연구를 하는 연구소에 경완같이 법을 개똥같이 알고 국회의원을 테러한 범죄자가 심심하면 드나들 수 있게 한다고?
이게 말인가 방귀인가?
김마리아의 제안이 얼마나 황당한지는 옆에서 듣고 있던 김준이나 홍 소장의 아연실색한 표정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김 소장님, 자, 잠시 진정하시고..”
“김 소장님. 방금 하신 발언 상부에 보고해도 됩니까?”
그런 두 사람의 반응에 마리아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상식적이지 않은 사람이 흥미를 보일만 한 제안을 하려면 상식적이지 않은 조건을 내놔야죠. 안 그래요, 경완 씨?”
“흐음..”
맞는 말이라 경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많은 돈이라도, 미녀를 한 아름 안겨준다고 해도, 그에겐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인류애나 감정에 호소하기엔 그동안 그가 보여준 행적이 있지 않은가? 이미 그의 능력을 이용해보려고 감정에 호소했다가 실패한 여러 수사관도 있었다.
그러니 김마리아는 발상을 바꾼 것이다. 상식적이지 않은 사람은 상식적이지 않은 걸 좋아한다고 말이다.
경완은 그녀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했다. 그러니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녀의 수작질에 넘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녀의 제안이 싫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솔깃했다. 이런 개또라이 같은 제안은 무료한 그에겐 무척이나 자극적이었다.
“왜 그런 제안을 하신 거예요?”
“그야 연구에 당신의 조력을 받으려고요.”
“저는 딱히 연구원도 아닌데요?”
“하지만 초능력 연구에 있어서 초능력자의 협조가 가장 중요하다는 건 이미 기정사실이에요. S입자를 감지하고 거기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건 지금으로선 인간, 아니 초능력자의 정신이 유일하니까요. 그리고 당신은 현재까지 제가 알고 있는 초능력자 중에서 가장 특이한 케이스고요.”
“뭐가 특이한데요?”
“벌써 세 가지 능력이나 가지고 있잖아요? 저격이 가능할 정도의 감각강화, 이번 납치 사건에서 드러난 괴력 능력, 그리고 상대의 능력을 약화 또는 무효화시키는 능력까지. 아무리 복합 능력자라고 해도 능력 사이에 공통분모가 있는데 경완 씨의 능력은 공통분모라고는 S입자를 사용한다는 거 하나밖에 없단 말이죠.”
눈치 빠른 년.
하지만 경완은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순진한 척했다.
“그래서요?”
“그렇다고요.”
그렇게 끝맺음을 하는 김마리아의 표정엔 미소가 서려 있었다.
이거 밀당이 쥑이는데?
경완은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물고 늘어졌다.
“뭐가 그런데요?”
“그런 경완 씨의 특이점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초능력 연구에 신선한 관점을 제공해주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도움이 된다는 거죠?”
“음음!”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경완이 말했다.
“그럼 저는 뭘 얻을 수 있을까요?”
그래, 연구소에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솔직하게 말해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치자. 그래서 자신에게 뭐가 이득이란 말인가?
그런 그의 말에 마리아는 미소와 함께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어머, 경완 씨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뭐가 아닌데요?”
“돈, 여자, 명예. 정말로 당신은 이런 걸 원해요? 정말 그런 걸 원했다면 여기에 이렇게 있지도 않았을 거잖아요.”
“.....”
경완은 대답하지 않고 김마리아를 쳐다보았다. 정말 자신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한 것 같았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경완 씨 같은 사람들 여럿 봤어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고, 뭘 원하는지도 몰라서 갈팡질팡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결국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돈 버는 일을 하게 되지만 그것마저 포기한 이들이 있죠.”
그녀가 미소를 없애고 진지한 표정으로 경완을 마주하며 물었다.
“경완 씨. 진짜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뭔가요?”
뭐긴 뭐야? 죽는 거지.
삶에 지친 무한전생자가 원하는 게 그거밖에 더 있겠는가? 그것도 아니면 삶에 대한 번뇌를 잠시 잊을 수 있는 것들이겠지.
경완은 졌다는 듯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어깨를 으쓱했다.
“뭔 말을 못 하겠네. 일단 나에게 뭘 원하는지는 알겠어요. 아무튼 심심할 때 종종 놀러 갈게요.”
경완의 말에 모두 어처구니없어했지만 마리아만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와 함께 이렇게 말했다.
“문 열어 둘게요.”
= = = = =
미국의 히어로 1호는 디트로이트에서 탄생했다.
그 이름은 스톤 브레이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돌도 부수는 강력한 완력을 가진 사내였다.
히어로물의 법칙에 따라 그는 신원(身元)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가 등장하면 누구나 그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특수 티타늄 합금으로 만든 슬래지 해머와 검은색의 첨단 신소재 전신 방탄복.
유니크한 디자인의 그것들은 스톤 브레이커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의 강력한 각력과 완력은 초능력을 이용해 은행도 털어대던 디트로이트의 심각한 초능력 범죄에 제동을 걸었다.
한 번의 점프로 100미터 이상 날아가는 각력은 그에게 교통 상황에 상관없이 범죄 신고를 받고서 몇 분 안에 현장에 도찰할 수 있는 기동성을 부여했고 전신 방탄복과 괴력의 조화는 총기를 든 초능력 범죄자를 적은 피해로 충분히 제압할 능력을 주었다.
스톤 브레이커로 얻은 성과로 히어로 산업에 자신감을 얻은 히어로 컴퍼니는 연속으로 2호, 3호의 히어로들을 선보였다.
대중들은 처음엔 그들에게 열광하지 않았다. 영화와 현실은 다른 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시민을 범죄와 재난 등에서 보호한다는 것을 피부로 실감하게 되면서 점차 여론이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언론에서 그렇게 되도록 펌프질을 한 것도 촉매가 되었다.
그렇게 한 번 히어로 산업에 대한 물꼬가 트이자 범죄가 많은 지역부터 하나둘씩 히어로 컴퍼니 지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히어로 컴퍼니의 본부는 워싱턴에 있었다.
초능력 히어로들이 하나둘씩 나타나 범죄를 소탕하고 시민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또 관련 상품이 판매되면서 여러모로 경제에 도움이 되는 것 같자 이를 따라 하는 나라들도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국도 그중 하나였는데 경완은 대한민국 히어로 1호의 이름을 듣고는 배꼽을 잡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푸하하하! 썬더보이가 뭐래? 도대체 언제적 감성이래?”
“···.”
“안 웃기냐?”
경완의 물음에 젊은 청년이 불안한지 눈알을 좌우로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은 지금의 상황이 무척이나 불편했다.
자신은 왜 여기에 죄수복이 아닌 옷을 입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저 사람은 죄수복을 입은 주제에 어떻게 여기를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걸까?
경완은 자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청년을 보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넌 참 세상 살기 힘들겠다.”
“왜, 왜요?”
“썬더보이라는 히어로 이름에 촌스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감성은 곧 센스가 없다는 뜻이거든.”
청년은 억울했다. 그런 센스 없이도 여태껏 잘만 살아왔다.
하지만 따지기 무서웠다. 자신은 그냥 잠깐의 실수로 죄를 저지른 사람일 뿐이고 눈앞에 있는 이는 유명한 범죄자였다.
“야. 씹냐?”
“.. 아니요.”
그렇게 경완이 숫기 없고 어수룩한 청년에게 장난질을 치고 있을 때 김마리아가 연구원들을 대동하고 등장했다.
“경완 씨. 결국 왔네요?”
“다회차는 제 스타일이 아닌 모양이에요.”
하루 종일 할 거라고는 게임밖에 없으나 수집요소나 도전과제 등은 결국 포기한 그였다. 재미로 시도는 해봤지만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현탐이 밀려왔다. 수집요소 모을 시간에 다른 게임을 하는 편이 더 나아 보였다.
세상은 넓고 할 게임은 많지만 하루는 짧다.
음. 명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