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10-빌드업 히어로즈
그래서 게임을 빨리빨리 깨버리다 보니 하루하루 미 클리어 게임 타이틀이 줄어들었다. 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별로 재미없는 게임은 빨리 손절해서 더 그랬다.
문득 자신이 너무 달린다는 것을 느끼게 된 그는 게임도 아끼고 엔딩 보고 느낀 현타도 삭힐 겸 마리아 소장의 제안대로 연구소로 마실 나왔다.
인생은 여행이다. 여행의 묘미란 뭔가? 빨리 가지 않고 천천히 가며 주변의 즐길 것들을 찾는 것 아니겠는가?
꽤나 신기하기는 했다. 연구소로 가겠다고 연락을 했더니 연구소 쪽의 벽에서 문 크기의 구멍이 열리는 것이 말이다.
그저 벽을 장식하는 직사각형의 패턴인 줄 알았는데 거기에 문을 숨겨놓다니.. 솔직히 제정신이 아닌 여자였다. 매드 사이언티스트 끼가 농후했다.
아무튼 뚫린 문으로 연구소 앞마당에 진입하니 경비원들이 제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뭔가 이상한 장치를 몸에 대고 신원을 확인하더니 그냥 통과시켜주는 것이 아닌가?
새삼 김마리아라는 연구소장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 꼰대와 진상, 불편러 천지인 대한민국에서 이렇게나 자기 마음대로 연구소를 운영하다니 말이다.
마리아는 경완의 옆에 있던 청년에게 시선을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한철 씨. 준비는 다 되었나요?”
“네, 네..”
김한철은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짓에 머뭇거리며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 뒤로 연구원들이 줄을 서서 걸었다.
경완은 도대체 뭔 짓을 하기에 저리 똥폼을 잡고 가는지 궁금해서 줄의 마지막에 서서 따라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높은 천장에 사방이 단단한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환한 공간이었다. 바닥에 칠해진 회색의 우레탄이 인상적이었지만 더 인상적인 건 중앙에 세워진 철제 기둥과 그 주변에 놓인 첨단 장비였다.
경완이 봐도 초능력 연구 관련 장비인 것만 짐작할 수 있을 뿐 도대체 용도를 알 수 없었다.
“자! 그럼 시작합시다!”
마리아가 손뼉을 치며 지시를 내리자 연구원들이 각자 맡은 바 일을 하러 움직였다. 몇 명은 컴퓨터를 조작하고 몇 명은 첨단장비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모두가 제자리에 위치한 것을 확인한 마리아는 김한철에게 말했다.
“이제 당신의 차례에요.”
“제, 제가 뭘 하면 되나요?”
“저기 기둥에 능력을 사용해 주세요.”
“괘, 괜찮을까요?”
김한철은 망설였다.
“괜찮아요. 여기는 당신 생각보다 훨씬 튼튼하니까요.”
그녀의 장담에 김한철은 망설이면서도 철기둥에 다가가 손끝을 가져다 대었다.
곧 철기둥에서 우우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완은 그 실험 장면을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그의 감각에는 김한철의 몸 안에 있는 동심원들이 손끝을 타고 철기둥으로 옮겨가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실험인지 궁금하지 않아요?”
그때 마리아가 경완에게 물었다.
찔러서 절 받기 식이라지만 굳이 물어보길 원하는 것 같으니 경완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물어봐 주었다.
“무슨 실험인데요?”
“초능력 장비 제작 실험이요.”
“초능력 장비요?”
“네. 말 그대로 초능력이 담긴 장비가 제작 가능한지 그 가능성을 타진하는 거죠.”
경완은 마리아가 왜 이 실험을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S입자와 현실의 물질이 상호작용하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매질이 있어야 했다. 초능력의 발현 자체가 인간을 근원으로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S입자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현존 유일의 방법은 인간을 매개로 물질세계 가해지는 영향을 측정하는 간접적인 방법뿐이었고, 이 때문에 장비를 통해서는 S입자가 진짜 어느 정도 있는지 측정이 불가능했다. S입자를 통한 능력의 발현에 개인차가 컸기 때문에 그만큼 간접적 측정도 오차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엄밀한 의미로 S입자 측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초능력 측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마리아가 이번 실험으로 의도하는 바는 인간을 매개로 하지 않고 S입자와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물질 또는 장치의 가능성을 타진해보고자 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경완도 속으로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김한철이라는 청년의 초능력은 그녀의 그러한 의도를 시험하기에 매우 적합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S입자가 잔류하는 초능력 자석이라면 주변 S입자의 농도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설마 그러한 사실을 통찰한 것일까? 과연 연구자였다.
경완이 물었다.
“손에 닿은 철을 자석으로 만드는 능력이라죠?”
“저 아이가 무너뜨린 공장에선 아직 대량의 철들이 자화(磁化)된 상태로 남아있어요.”
“원래 철은 자석이 되면 원래대로 안 돌아가잖아요?”
그렇지 않은 철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경완의 말에 마리아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 공장의 철들은 일반적인 경우보다 훨씬 자력이 강한 상태로 남아있죠.”
“그러니까.. S입자가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
“그렇죠. 그리고 자력이라서 더 좋아요.”
만일 김한철이 초능력 자석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자석이 S입자에 어떤 반응이라도 할 수 있다면 S입자를 측정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진다. 모든 기술은 결국 측정에서 시작되니까.
“잘 되면 저 친구 몸값이 어마어마하겠네요.”
“후후.”
경완의 말에 마리아는 낮게 웃었다. 그를 곁눈질하는 그녀의 표정은 마치 ‘당신도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우우웅! 우우웅!
철기둥이 자화(磁化)되며 진동했다. 김한철이 잔뜩 피곤한 표정으로 철기둥에서 손을 뗐다.
“더 이상은 못 하겠어요.”
“좋아요. 수고했어요. 가서 쉬어요. 수치는 어떻게 나왔어요?”
김한철에게 휴식을 허락한 마리아는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던 연구원에게 물었다.
“아주 강력한 자력입니다. 철이 가질 수 있는 이론한계치를 넘었어요.”
“아주 좋아요.”
흡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인 마리아가 경완에게 물었다.
“과연 저 철기둥의 자력이 얼마나 갈 것 같아요?”
“그걸 왜 저에게 물어요?”
“그냥 직감에 따라 말해줘요. 솔직하게 말해주기로 했잖아요.”
그녀의 말에 경완은 철기둥을 흘깃 쳐다보았다. 집중하니 철기둥에 주입된 S입자들이 동심원의 파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경완은 솔직하게 말했다.
“꽤 오래 갈 것 같네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마리아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대꾸했다.
= = = = =
최초의 한국형 히어로는 과연 민간인일까?
K히어로가 등장한 이래 인터넷에 이와 관련된 온갖 잡설이 돌았지만 사람들이 동의하는 것이 있다면 국가적인 비호나 밀어주기가 아니라면 히어로 산업이라는 것이 성립되기 힘들다는 점이다.
왜냐면 한국의 치안은 상당히 좋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의외로 경찰의 유능함과 시민의식 덕분이었다. 의료보험 등의 제도는 날로 커지는 빈부격차로 인한 사회불안에 김을 빼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고, 경찰의 과학수사 덕분에 강력범죄의 검거율은 90%를 넘어갔다.
조폭들과 붙어먹은 짭새나 먹고 살려고 공무원 된 치안조무사 같은 문제들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한국의 치안은 미국의 디트로이트나 마약조직이 판치는 남미처럼 공권력이 약해서 히어로라도 필요한 상황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가 히어로 산업을 육성하기로 결정한 것은 미국의 입김과 대기업의 펌핑, 그리고 여전히 그 종적이 오리무중인 빌런들, 마지막으로 새로이 등장한 위버멘쉬라는 조직 때문이었다.
사실 위버멘쉬라는 조직이 등장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들은 비질란스가 미국에서 등장했을 시기와 비슷한 때에 유럽에서 등장했다.
하지만 비질란스가 매니 페이스를 살해한 이후 딱히 큰 사건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한 것과 반면에 위버멘쉬는 동유럽, 서아프리카, 중동, 동남아시아 등을 중심으로 전 세계적으로 폭넓게 활동했다.
테러 조직까지는 아니었지만 여러 국가에선 그들을 이미 범죄조직으로 규정한 경우가 많았다. 법을 개똥으로 취급하며 제멋대로 행동한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테러라고 하기엔 인명피해가 미미하면서 불법은 분명한 행동들.
경완을 납치하기 위해서 교도소를 침입한 의문의 이인조가 대표적인 예였다.
신체 강화 계열로 보이는 근육남, 그리고 스스로 힉스장에 간섭하는 능력이 있다고 밝힌 남자.
힉스장 간섭남은 매스 이팩터라는 별칭이 붙었는데 아주 강력한 능력의 초능력자라 어떻게 체포해야 할지 당국에서도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총알도 안 먹히고 완력으로 제압하려고 해도 가볍게 만들어서 던져버릴 테고.
이렇듯 기존의 공권력이 제대로 안 먹히는 무법자의 증가에 초능력 전력의 강화는 국가로서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여기서 히어로 산업이 이를 위한 촉매제로 등장한 것이다.
“이 순경님 수고하셨습니다.”
“네.”
순경 이철은 어디 방송사의 방송 스태프로 보이는 사람의 인사를 받고는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번개 마크가 그려진 전신타이즈를 벗고 경찰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가 자신이 이런 신세가 된 것일까?
K히어로 1호 썬더보이. 그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솔직히 쪽팔렸다. 썬더보이라는 구닥다리 같은 명칭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많은데 왜 하필 자신이란 말인가? 전국 초능력 경찰 격투 토너먼트에서 2등을 해서? 1등인 하 경장님은 안 하는데 말이다.
이게 다 히어로 산업에 정부 영향력을 심어두고 싶으신 높으신 분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좋은 패는 손안에 두고 싶은 분들의 야합이라는 걸 도저히 상상 못한 이철은 초능력 범죄 수사대의 순경, 그리고 K히어로 1호 썬더보이라는 이중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방금 출동한 것도 초능력을 사용한 강도를 제압하기 위한 출동이었다.
그래. 여기까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노란색의 번개 마크가 그려진 타이트한 전신 타이즈 방탄복도 말이다.
하지만 그의 출동과 체포 과정을 찍는 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헬멧에 붙은 카메라와 자신의 활약(?)상을 찍기 위해 붙은 카메라맨이라니?
아주 웃기는 일은 자신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붙은 카메라맨이 신체 강화 계열의 능력자라는 사실이었다. 무겁고 비싼 카메라로 찍어야 영상의 때깔이 곱다나?
알고 보니 나중에 썬더보이가 인기를 얻을 수 있게끔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자료도 찍는다더라. 인기를 얻은 후에는 다큐나 팬들 덕질용 DVD로 만들어서 투자금을 회수할 요량이라더라.
이게 무슨 아이돌 다큐도 아니고...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이철은 자본주의 세상의 신기한 히어로라는 문화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 범인 검거가 쇼가 되었단 말인가?
하지만 별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순경에 불과했다.
뚜루루루룩! 뚜루루루룩!
“네, 원장님 접니다. 잘 지내셨어요?”
[철아! 잘 지냈니?]
반가워하는 목소리다. 하지만 이철은 몇 번을 들어도 행복원 원장님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과거의 그 칼로 자르듯 차갑고 냉정하던 원장이 맞단 말인가?
과거와 지금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행복원에 들러붙어 있던 조폭과 그들과 붙어먹었던 짭새들이 원장님에게 엄청나게 큰 악영향을 끼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고작 그들이 사라졌다고 이렇게나 사람이 변하다니..
그 차이를 생각하면 자신도 경찰이지만 도저히 그자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합법적인 영역을 벗어나 뭔가를 해볼 생각은 없었다. 그는 명색이 경찰이었다.
“요즘 아이들 선물은 뭐가 좋을까요?”
며칠 뒤에 비번 날이라 행복원에 방문할 계획인 이철이었다. 아무리 성인이 되어 시설을 나가야 했지만 남겨진 아이들이 걱정되었다. 자신 같이 재정적인 후원자가 붙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장이 만류했다.
[돈 모아서 장가가야지 뭘 그런 걸 사오냐?]
“괜찮아요. 부수입이 좀 생겨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