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11-초인충돌
그의 상실을 공감한다. 그의 분노를 이해한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살인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흑노야의 유지를 받아들이는 대신, 그것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행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살인만이 복수나 응징의 유일한 방법은 아니니까.
그러나 독재자는 죽었고 마지막까지 사과는 없었다.
회의감이 없을 수가 없었으나 의무감으로 움직였다.
비극은 그 당사자가 사라지면 잊혀 진다. 하지만 흑연에겐 그 잊혀지는 것이 더 큰 비극으로 여겨졌다.
그 어떤 악행을 해도 천벌은 없으며, 하늘은 무정(無情)하고, 이 땅에도 정의가 없음을 인정하는 건 평범한 일상이 소중한 흑연에겐 끔찍한 일이었다.
정의가 없는 세상, 타인을 속이거나 희생 시켜 부귀영화를 얻지 않는 자가 어리석은 멍청이가 되는 세상.
자신이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친인들이 그런 세상에서 사는 걸 흑연이란 남자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목소리의 조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일상이 소중하다면 더 이상 흑연으로서의 활동은 하지 말라고. 아무리 염동력이 뛰어난 특성의 능력이라고 하나 그 대처법이 나온 이상 흑연으로서의 활동을 하는 것은 분명 위험했다.
[조언 감사합니다. 생각해볼게요.]
[이 불의(不義)한 세상에 당신같이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 불행해지는 건 우리가 애당초 이런 일을 시작한 목적과도 어긋나는 일이니까요.]
그렇게 목소리는 채널을 닫았다.
흑연은 어둠을 날아 허름하지만 소중한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 = = = =
온라인에는 온갖 스트리밍 방송들은 물론 동영상 사이트가 넘쳐났다. 압도적인 점유율을 가지고 있는 플랫폼이 있기는 하지만 그 압도적인 점유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적으로 대중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상엔 다양한 취향이 존재하고, 대중성을 피해 틈새시장을 파고든 사이트들이 있었으니 바로 포르노 사이트였다. 포르노는 대중적이지 않냐고? 전체연령 관람가가 아니면 대중적인 게 아니다.
아무튼, 그런 사이트에서도 1티어가 있고 2티어 및 하꼬들이 있긴 하지만 워낙 사이트가 많은지라 국가에서조차 누가 무슨 영상을 올리는지, 어디서 올리는지 추적이 힘들었다.
그리고 그 여러 사이트에 일제히 한 빌런의 영상이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여러부~운. 오랜만이죠? 네~ 사망기자입니다.]
이마에 태극마크가 붙은 가이포스크 가면으로 유명한 사망기자였다.
[요즘 제가 제법 유명해진 게 실감이 되더라고요. 제가 지금 쓰고 있는 가면을 만들어서 파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라니까요. 실제로 요번 할로윈에선 제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도 적잖았다고 하네요.]
빌런의 코스프레라니.. 제정신인가? 라고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찌 보면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빠가 까를 만든다고, 하도 매스컴에서 히어로를 밀어주는 요즘 세태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은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하지 말라면 꼭 하고 싶고, 뭔가 튀고 싶어서 이상한 짓을 하는 청개구리과 인간도 시대 불문, 장소 불문하고 언제나 꼭 존재했다. 더구나 ‘히어로!’ 할 때 연상되는 건 ‘빌런!’ 아니겠는가?
[아무튼 이번에 또 어떤 기레기를 응징할까 기대를 하신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오늘의 주제는 기레기가 아니랍니다. 그럼, 뭘까~요?]
장난스러운 음성과 함께 화면이 전환되고 누군가의 젊었을 적 시절의 사진이 나왔다.
[아시죠? 요즘 젊은 사람은 당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 바로 그분이십니다.]
사진의 남자는 바로 얼마 전 죽은 전 독재자였다.
[왜 죽은 사람을 거론하냐고요? 그야 깜짝 놀랐기 때문이죠. 욕이란 욕은 다 처먹어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줄 알았는데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죽었다잖아요? 그래서 진짜 심장마비로 죽었는지, 변싼체로 발견된 건 아닌지 확인해봤죠.]
화면이 바뀌고 더블 배드에 누워있는 노인이 비쳤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얼굴이었다. 요번에 뉴스에서 전 대통령 별세라고 일제히 부고 기사까지 뜬 사람이었으니까. 전 독재자, 전 쿠데타 사령관 사망이라고 표현한 언론은 극소수였지만 아무튼 온 나라에 뒈진 걸 광고했다.
화면의 노인은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숨을 들이 내쉬며 상하로 움직이는 흉부의 움직임이 그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이내 수상한 그림자가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그리고는 노인의 얼굴에 무언가 스프레이 같은 것을 뿌렸다.
그러자 노인은 가슴을 움켜쥐고 몸부림을 치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화면이 다시 태극기가 그려진 가이포스크 가면으로 바뀌었다.
[어라? 분명 언론에서는 갑작스런 심근경색으로 죽었다는데 내가 보기엔 독살로 보이는걸요? 확실히 변싼체는 아닌데 과연 어찌 된 일일까요? 흑연이 아니라 다른 원한을 가진 빌런이 등장한 걸까요? 네? 그런데 살인방조죄 아니냐고요? 이제 와 밝히는 거지만 제가 눈여겨보고 있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랍니다. 방금 전의 영상도 녹화본이라는 말이죠. 아무리 저라도 여러 사람을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건 무리거든요. 아무튼 저는 이 미스터리한 사건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과거에 찍어둔 영상까지 모두 확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영상을 찾아냈죠.]
다시 화면이 전환되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구들이 비치된 거실. 두 노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 사람은 죽었다는 노인이었지만 또 한 노인은 낯설었다.
[안됩니다! 사죄라니!]
[내 손자가 그놈의 별장에서 못 나온 지 벌써 몇 달이 되었는지 알아?! 흑연 그 새끼 잡을 수 있다고 장담한 지가 벌써 얼마나 지났냐고!]
[테러범과 협상을 하지 않는다는 국제사회의 원칙은 벌써 잊으셨습니까! 한때 군 통수권자셨지 않습니까!]
[이 나이 되어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내 손자가 편안히 살 수 있다면 머리 한 번 숙이는 게 뭐가 대수냐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시는 겁니까?! 손자분이 누리는 부귀가 몰수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그리 쉬운 문제였으면 진즉에 그랬겠지! 시대가 변했어! 나 때처럼 못해!]
[네, 시대가 변했죠.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질 정도로 말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화면이 전환되고 다시 사망기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노인이 누군지 궁금하시죠? 전직 안기부장 허동세입니다. 과거 군부독재 시절, 실세 중의 실세였으며 최고존엄이신 가카의 오른팔이기도 했죠. 그런데 이런 사람이 모시던 분하고 왜 이렇게 언쟁을 하는 걸까요? 같이 늙어가는 신세인데 이래라저래라하지 말라는 걸까요? 하지만 대화를 들어보니 그게 아닌 것 같죠? 오히려 모시던 분이 하려는 일을 만류하는 모양새죠. 저는 그 전말을 알죠.]
사망기자는 흑노야의 습격 사건, 흑연의 등장, 그리고 흑연이 내건 조건에 관해서 밝히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 허동세는 이 전직 독재자가 과거 자신이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학살을 인정하고 사과하려는 걸 만류하고 있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집요하게 그 이유를 추적했고 결국 하나의 영상을 발견했답니다.]
다시 화면이 전환되었다. 허동세가 비슷한 나이대의 노인네들과 함께 뭔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끝까지 고집을 피우시더군.]
[쯧쯧쯧. 나이가 드니 나약해지셨어.]
[어떻게 해야 하나?]
대책을 묻는 누군가의 말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잠시 뒤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설득은 아무래도 힘들어 보이지?]
[우리가 덤터기를 쓰는 건 상관없는데.. 자식들까지 피해가 가겠어.]
[그건 안 되지.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했는데?]
좌중의 시선이 교차했다. 말없이 모종의 합의가 이끌어졌다.
[.. 쩝.. 별수 없군.]
[장군님이 더 수치스러운 행동을 하기 전에 막는 게 한때 그분을 모셨던 우리들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한 사람이 꺼낸 말에 대부분이 ‘그렇고말고’라며 맞장구쳤다.
[어떻게 막을 건가?]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 와중에 누군가가 흘리듯 말을 꺼냈다.
[.. 오래 사시긴 했지.]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사는 것도 못 할 짓이야.]
[사람에겐 마지막까지 존엄을 유지할 권리가 있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들.
그것은 살인공모였다.
다시 화면은 사망기자를 비추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자연사가 아니라 살인이란 정황이 너무 크죠.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싶겠지만 빨간 마티즈 사건 같은 일은 수도 없이 많답니다. 그런데 주치의가 과연 몰랐을까요? 부검의는요? 그분들의 계좌추적까지 제가 다~ 하기에는 제가 요즘 주시하고 있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요. 그럼, 그건 검찰에게 맡겨볼까요? 우리가 남이가 정신의 검찰이지만 이번에는 그냥 한번 믿어보고 싶네요. 제가 요즘 너무 힘들거든요. 인간 불신 걸릴 것 같아요. 세상에 사람의 탈을 쓴 쓰레기가 이렇게 많다니...]
사망기자는 연기하듯 훌쩍이며 검지로 눈 밑을 닦더니 이내 쾌활한 어투와 행동으로 인사했다.
[그럼, 여기까지. 비질란스의 사망기자였습니다.]
화면에서 사망기자의 모습이 사라지고 살인을 공모한 자들의 신상명세와 그들이 누구를 고용하고 어떻게 과거 그들의 상관이었던 이를 죽일 계획을 세웠는지에 관한 영상이 이어졌다.
사망기자가 공개한 영상은 온라인을 타고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사회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었다.
첫 번째 충격은 여태까지 학살의 책임을 외면하던 이가 마지막에 그것을 인정하고 사과하려 했다는 것.
두 번째 충격은 그러한 시도가 그를 보위했던 이들에 의해서 살인이라는 충격적인 수단으로 와해된 것.
마지막 충격은 사건을 재조사한 검찰에서 질질 시간을 끌다가 국민적 여론과 정치권의 압박에 결국 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타살이라는 증거가 없다고 발표한 것.
멀쩡히 비디오에 찍혀있는데 뭐가 타살이 아니란 말인가?
멀쩡히 용의자의 얼굴이 영상에 찍혀 있어도 그 용의자가 누군지에 따라 선택적 안면인식장애에 걸리는 검찰이니 이미 예견된 결과이기는 했다.
그러나 검찰의 발표가 면죄부가 되거나 비난을 막는 방패가 되어주진 않았다.
지식인들은 국가의 소모적 분열을 막을 수 있던 기회가 날아가 버렸다며 탄식했고, 사과받을 기회를 날려버린 역사의 피해자들은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쿠데타란 하극상을 벌인 죄인이 하극상으로 생을 마감한 이 아이러니한 사건으로 인해 흑연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당신이 허동세 아들 맞지?”
“너, 너 뭐야?!”
누구냐고 묻지만 흑연이란 빌런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었다. 염동력의 매개가 되는 검은 연기는 그를 특징짓는 가장 확실한 트레이드 마크였다.
“원망은 느그 애비한테 해라.”
흑연의 날 선 목소리와 함께 곧장 검은 연기가 움직였다. 몽둥이처럼 휘둘러진 검은 연기에 두 다리, 두 팔이 뚝 부러지고, 주먹처럼 끝이 뭉쳐진 검은 연기가 남자에게 좌우 훅, 그리고 안면 스트레이트를 먹여 옥수수를 완전히 털었다.
순식간에 침대에 누워서 죽만 먹어야 하는 신세가 된 허동세의 아들이었지만, 흑연은 거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허동세의 손자, 손녀들이 습격을 받았다. 그나마 다행인 게 손녀는 그래도 여자라고 얼굴은 봐주었다. 그렇다고 침대 신세를 모면할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허동세와 살인모의 현장에 있던, 과거 군부독재 때 한 자리씩 차지하고, 지금은 대한민국의 기득권 상류층으로 잘 먹고 잘살고 있는 이들의 자식과 손주들이 흑연의 습격을 받았다. 친절하게도 사망기자가 영상의 마지막에 그들의 신상명세를 다 까발린 덕분이었다.
단 사흘 만에 40명가량이나 되는 사람들이 병원신세를 지고 임플란트 시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