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11-초인충돌
하지만 청년으로서는 그가 범인이라고 확신하기가 어려웠고, 또 고문하기도 싫어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진실 판명으로 유명한 경완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경완은 그 말에 청년의 눈을 슬쩍 살피다가 포대자루에서 머리만 나온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눈을 껌벅이며 눈알만 뒤룩거리는 걸 보니 초능력이 틀림없었다.
“이거 초능력으로 이런 거예요?”
“네.”
경완의 시선이 감방의 철문으로 향했다. 신기하게도 강철로 만들어진 문이 촛농 흘러내린 듯이 녹아내려 있었다. 더 신기한 건 열기가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에 있었다. 분명 특별한 초능력으로 녹인 것이 분명했다.
청년은 그의 시선이 어딜 향하는지 알아차리고는 주눅이 들었다.
“죄송해요.”
“뭐, 됐고. 아무튼, 그 부탁만 들어주면 돼요?”
“네.”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자 경완은 포대자루에 담긴 남자의 몸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이미 몸의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있어서 신체반응을 읽기 힘들었다. 경완은 아마 저 청년의 초능력 때문일 것이라 짐작하고 말했다.
“이거 초능력 해제 가능해요?”
“왜, 왜요?”
“몸이 너무 굳어서 신체반응을 읽을 수가 없어요.”
경완의 말에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힘을 풀었고, 굳어졌던 몸이 다시 움직이게 된 포대자루의 남자는 다급히 입을 벌렸다.
“사, 사람 살, 읍!”
하지만 미처 소리를 지르기 전에 경완의 슬리퍼가 그의 입을 막았다.
“다른 사람 잠자는 거 깨우지 말고 귓구멍이나 처열으세요.”
잘 자다가 일어난 터라 경완의 입은 상당히 거칠었다.
“쟤가 말한 거 사실이에요? 댁 강간범이라는 거? 그 두 자매라는 여자들 강간한.”
“읍읍!”
남자는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의 육체가 하는 대답은 달랐다.
경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청년을 보았다.
“맞네. 강간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얼른 가요. 나는 잘 테니까.”
경완은 얼른 축객령을 내렸다.
청년이 고개 숙여 경완에게 인사한 후 남자를 도로 굳혀 마대자루에 넣는 그때! 서치라이트가 경완의 감방 입구를 비췄다.
[거기 누구야!]
스피커로 울리는 교도관의 외침과 함께 비상벨이 울렸다.
청년이 다급한 얼굴로 마대자루를 질질 끌고 나가다가 안 되겠다 싶으니 마대자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마대자루에 담긴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어찌나 큰 고통을 느끼는지 목소리만으로 그 끔찍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단말마 같은 비명소리는 금방 잦아들었고 청년은 벽에 뚫어놓은 구멍을 향해 뛰어들었다.
[이경완! 그놈 잡아!]
스피커가 경완에게 지시를 내렸지만 경완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가리며 표정으로 물었다.
‘나?’
내가 왜?
경완이 싫다는 듯이 두 팔로 소중히 자신의 몸을 감싸며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자 스피커에서 절로 튀어나오는 한 마디.
[어우, 씨발.]
하지만 별수 있나?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파야지.
무장한 교도관과 초능력 경비가 출동해 도망간 침입자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경완은 그저 녹아버린 철문을 보며 고민할 뿐이었다. 요새 모기들이 극성인데 어쩌지?
경완은 연구소에 비치된 수면실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감방에 비치된 전화기로 마리아 소장에게 연락해 사정을 설명했다.
방문이 녹아서 잠자기가 힘들다는 사정을 들은 그녀는 흔쾌히 연구소 입장을 허락했고, 경완은 연구소의 수면실에서 모기 걱정 없이 푹 수면을 즐겼다.
마리아 소장이 교도소 측에 미리 연락해 놨는지 경완이 탈출했다고 난리가 나는 일은 없었다. 감탄할 정도로 섬세한 배려였다. 이러니 썅년 냄새가 풍겨도 경완이 참아낼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아무튼, 다음 날. 경완은 간밤에 침입했던 이의 정체를 들을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요새 이름이 뜨고 있는 빌런인 트위스터였다.
연구소의 식당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교도소로 돌아가려 했던 경완은 아침을 먹던 중에 일찍 출근한 마리아에게 붙들렸다.
“어젯밤에 트위스터가 방문했다면서요?”
“트위스터라고 불리는구나.”
경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밥을 싹싹 긁어 입에 넣었다.
그런 그에게 마리아가 물었다.
“남자였어요?”
그녀는 경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앞에 사진 하나를 내려놓았다.
“아으~ 밥 다 안 먹었는데 뭐하는 거예요?”
경완은 오만상을 찡그리며 손톱 끝으로 사진을 탁 쳐서 도로 그녀에게 날렸다.
“어젯밤 트위스터가 남기고 간 포대자루예요.”
트위스터는 그 빌런명에 걸맞게 포대자루 안에 있던 남자를 비틀린 느낌의 기괴한 덩어리로 만들었다. 피해자로 이루어진 덩어리에는 나선형의 패턴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는데 살과 피부, 근육과 뼈가 입은 옷가지와 함께 녹은 듯이 엉겨 붙어 긴급히 병원으로 후송했다.
당장 생명에 지장은 없다지만 평생 원래대로 돌아올 가능성은 작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었다.
“하아……. 한영미 씨가 있었다면 치료를 시도해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경완을 지그시 보았다.
책임감이나 죄책감을 느끼라는 압박인가? 그래서 한영미를 찾아내든 트위스터에 대한 단서를 내놓든 뭔가 얻어내 보려고?
하지만 경완의 두꺼운 낯가죽은 김마리아의 말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치유 능력자가 그렇게 없어요?”
“우리나라에서 겨우 한 명 발견되었어요.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만한 수밖에 발견되지 않았고 그 치유 메커니즘도 명확하게 규명이 되지 않았죠.”
“그럼 그 새끼는 평생 그렇게 사는 거예요?”
경완의 말에 마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누구요?”
알면서 굳이 경완의 입을 통해 들으려는 것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가 분명했다.
하지만 경완은 전혀 꿇릴 것이 없었으므로 당당히 대답했다.
“그 사진에 나온 흉물 말이에요.”
“그렇죠. 대단한 자산가나 유력가가 아니라면 다른 나라에 있는 치유능력자의 도움을 받기 힘들 테고 또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이런 상태에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다고 장담하기도 힘들죠.”
경완은 턱을 쓰다듬었다. 그럼 다른 유력가는 충분히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가 직접 허리를 접어버린 놈들도?
아~씁! 그거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경완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렇게 생각할 때 마리아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이 당신의 눈앞에서 일어났을까요?”
“그러게요.”
생각해 보니 그렇다. 자신이 이 교도소에 산다는 건 뉴스에도 여러 번 나왔으니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정확히 어느 감방에 있는지는 대외비이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눈앞의 중년 여성이 알고 싶은 건 그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정정하죠. 왜 당신은 트위스터가 그런 짓을 하는 걸 수수방관했을까요?”
그녀가 듣고 싶은 말이 뭔지 명확해졌다.
경완은 미운 새끼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그야 그 남자가 강간범이라서요.”
“그런데 왜 트위스트는 굳이 그 강간범을 당신의 눈앞에서 데려왔을까요?”
그녀의 손끝이 흉물이 찍힌 사진 위에 놓였다.
경완이 당당히 대답했다.
“그야 제가 확인해줬으니까요.”
“뭐를요?”
“그놈의 유죄를요.”
“흐응~”
마리아가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경완을 보았다.
그 뒤로 몇 번의 문답이 더 오고 갔으나 경완은 짜증 내지 않았다. 이번 겨울에 그녀가 질러줄 트리플 A급 신작을 생각하면 저절로 마음이 넉넉해졌다.
이렇듯 뭔가 수상하지만 그의 마음을 너그럽게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로 수상하지도 않으면서 그를 부담스럽게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김준이었다.
트위스터가 방문한 지 사흘쯤 됐을 때 경완을 찾아온 그는 이렇게 물었다.
“트위스터와 만나셨다고 하셨죠?”
“네.”
“혹시 그가 어디 소속인 줄 아십니까?”
“모르는데요?”
별로 관심이 없어 하는 경완의 태도에 김준은 뭔가 고민하더니 자신이 그를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얼마 전 한국에서 비질란스와 위버멘쉬가 충돌했습니다.”
“이야기의 맥락을 보니 트위스터라는 사람이 얽혀 있는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경완을 만나러 교도소에 침입한다고 종적을 드러낸 트위스터. 그를 잡기 위해서 초능력 수사대가 추적을 시작했고 마침내 꼬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하지만 그를 추적하던 와중에 초능력 수사대는 초능력자들이 인적이 드문 곳에서 싸우는 것을 발견했다.
한쪽은 초능력 수사대에서도 수사를 진행 중인 위버멘쉬 이인조, 힉스남과 근육남이었고, 또 한쪽은 아는 매스컴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검찰과 경찰 사이에선 높으신 분들 거시기를 잘라서 거세범이라고 불리는 상해범과, 쿠데타 사령관과 얽혀서 너무나 유명해진 흑연이라고 불리는 빌런이었다.
왜 서로 싸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초능력 수사대의 입장에선 어부지리를 노릴 수 있는 상황.
경찰에선 급히 초능력 수사대의 최대 전력인 하정훈과 히어로 컴퍼니의 히어로들, 그리고 초능력 보안업체에 연락해서 초능력자를 지원받았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한 놈이라도 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과연 범죄자라서 그런지 수상한 낌새를 기가 막히게 눈치채고는 급히 도주를 시작했다.
에스퍼로 이루어진 수사대로는 그들을 붙잡을 수 없었다. 심지어 총기로 무장했다고 하더라도 힉스남의 힉스장, 흑연의 검은 연기에 총탄의 위력은 무력화되었다.
“총기가 안 통한다니 일선 경찰들은 걱정이 많겠네요.”
“미국에서도 골치입니다.”
모든 초능력자가 총알을 막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흑연이나 힉스남처럼 총알에 면역인데다가 공권력을 개무시하는 초능력자가 나오는 순간 골치가 아팠다. 괜히 각국 정부가 초능력 범죄에 대응하는 산하기관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지 않은가? 폭력의 독점이 전제되지 않는 공권력은 결국 쿠데타나 당하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아무튼, 위버멘쉬와 비질란스가 도주한 현장을 조사하던 수사대는 그들이 누군가를 두고 싸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녹아내린 듯 기괴하게 엉겨 붙은 나무, 바위, 땅바닥이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추적과 도주의 흔적까지.
도주의 흔적은 분명 트위스터의 것이었지만, 그 추적자가 비질란스인지, 위버멘쉬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특정하기는 쉽지 않았다. 분명한 건 그 두 곳에서 트위스터의 신병(身柄)을 원한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으로서는 경완 씨가 트위스터를 만나본 유일한 사람이니까 정보를 얻고자 해서 왔습니다.”
“제가 말해줄 수 있는 건 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모른다는 점과 남자라는 점, 그리고 독심술이 없다는 것밖에 없어요.”
“독심술이요? 설마 피해자가 강간범이라는 걸 확인해 준 겁니까?”
“그럼 어떻게요? 애먼 사람 잡게 놔둬요?”
“……후우…….”
공권력을 다루는 정부 기관에 속해있는 김준으로서는 애먼 사람이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었지만, 어차피 씨알도 안 먹힐 걸 알기에 그저 작게 한숨만 내쉬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 사건이 계기가 되었는지 세계 각지에서 초능력자들이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요?”
“네, 세계 각지에서요.”
김준이 말하길 그 분쟁의 한쪽엔 대부분 위버멘쉬라는 조직이 있다고 한다. 그 상대편으로는 비질란스만이 아니라 지역조직이거나 기업의 사조직, 또는 카르텔이 직접 꾸린 조직 등이 있다고 했다.
김준이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큰 변화가 시작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