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11-초인충돌
앞으로 초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해지는 세상이 올 테지만, 권력이 있다고 초능력을 각성하는 세상은 아닐 테니까.
즉, 경완의 능력은 앞으로 벌어질 초능력 패권전쟁이라든가, 초능력 각성과 권력관계에 대한 중국 공산당 기득권의 고민을 상당히 해소해줄 수 있는 꽃놀이패라는 뜻이었다.
물론 그러한 추론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서 말이다.
[결국 그쪽에 투항하라는 말이군.]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그런 선택지도 고려하라는 뜻일세. 죽지는 않을 테니까. 아니 오히려 옆에 미녀를 기고 온갖 호사를 누릴 수도 있지. 내가 그렇게 해줄 수 있다네.]
[일종의 꽌시 같은 건가?]
[이것도 일종의 인연이 아니겠는가?]
[혹시 스톡홀름 신드롬이라고 알아? 내가 댁을 그렇게 만든 건 잊었어?]
[물론 알고 있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원한을 해소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생존과 국익일세. 내가 방금 꺼낸 말은 냉정한 계산 아래에서 꺼낸 말이야. 승산이 낮다면 말하지도 않았지.]
[내가 죽인 사람들은 어쩌고?]
[성형 수술과 신분 세탁을 보장하지.]
이경완이라는 이름을 가진 중국인은 아마 엄청나게 많을 테니 이름까지 바꿀 필요는 없으리라.
이러한 제안에 경완은 고민에 잠긴 모습을 보여주었다.
[흐음.]
경완은 왕샤홍의 말에 고민에 잠겼다. 왕샤홍은 그 모습에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설득이 먹히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경완의 속내는 이러했다.
‘이 개소리하는 새끼를 어떻게 조지지?’
결국 왕샤홍의 제안이란 짖으라면 짖고 물라면 무는 중국 공산당의 충견이 되란 소리 아닌가?
투항하고 나면 경완의 능력이 무서워서라도 온갖 안전장치를 심어둘 것이 뻔했다.
뇌 주름 사이에 작은 폭약을 심거나 하루 24시간 벗을 수도 없는 폭탄목걸이도 채울 것이 분명했으며 거기에 온갖 약물을 동원해서 공산당에 충성하라는 세뇌 교육을 머리에 쑤셔 넣은 약쟁이로 만들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세상 어느 국가가 그럴 수 있겠냐고 의심하지 마라. 독재권력이란 그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사람 목숨쯤 파리 목숨으로 여기는 것이 세상 다반사였다.
경완은 생각을 멈추고 왕샤홍에게 말했다.
[편하게 있어.]
[결정했나?]
[아직. 좀 더 고민하고 상황을 살필래.]
일단은 인질을 안심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야 쓸데없는 생각을 안 하지 않겠는가?
그런 속내도 모르는 왕샤홍은 유화적인 경완의 태도에 다소 여유로워진 태도로 말했다.
[서두르는 것이 좋을 거야. 높은 사람들은 인내심이 약해.]
[특경대를 몇 번 더 조지면 내 몸값이 더 높아지지 않을까?]
[내 몸값이 그렇게 특경대를 마구 소모할 정도라면 상부에서도 결국 날 포기할 거야.]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헐레벌떡 도망가다가 잡힌 인질 주제에 어떻게 인질범에게 말을 걸 깜냥이 있나 싶었더니 보아하니 자기 목숨줄이 간당간당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왕샤홍이 말한 내용의 대부분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차치하더라도, 그 의도 자체, 경완을 회유해서 투항하면 목숨을 보장해주고 나아가 부귀영화도 누릴 수 있게 해주겠다는 말은 진심일 가능성이 높았다.
뭐, 권력을 쥐기 전과 후의 태도가 다른 권력자의 진심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겠냐마는 말이다.
그는 왕샤홍의 두 팔을 풀어둔 채로 놔두고 잠시 눈을 붙였다.
잠을 자고 싶었지만 잠들면 자칫 지금까지 개고생한 것이 말짱 황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저 눈을 붙여 지친 뇌를 조금이라도 쉬게 해주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완의 모습은 왕샤홍에겐 고민하는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왕샤홍의 가슴 속엔 기대가 은근히 부풀었다.
시간이 계속해서 흘렀다. 밖에서는 인질극을 풀기 위해서 계속 대화를 요구했다. 특경대의 투입은 이미 한 차례 실패로 끝난지라 또 투입하기에는 부담이 큰 것이 사실이었다.
자꾸 대화를 시도하는 그들의 요구에 경완을 귀찮았지만 이를 승낙했다.
협상의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으면 저쪽이 그의 의도를 의심할 수도 있었고 특경이 아니라 군의 특수부대가 인질의 피해를 감수하고 나설 수도 있었다.
“당신이 저지른 살인을 불문에 부치겠소.”
으파룽의 제안은 무척이나 셌다.
왜? 어째서?
경완은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툭 하고 던져보았다.
“주중한국대사는 모습을 보였는데, 왜 주중미국대사는 안 왔어?”
움찔하는 으파룽의 모습에 경완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분명 미국의 압박에 조급해진 것이리라.
“이래 봬도 나 미국국적 있다고. 검은 머리 외국인이란 말이야.”
여윽시 미국국적이다. 혹시나 검머외로 꿀 빨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받기로 수락한 국적이었지만 여기서도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미국의 압박이라면 해가 질 때까지 편하게 시간을 끌 수 있으리라. 미국국적의 사람이 중국 공안과 특경을 죽여대 발생할 외교적 갈등 따윈 경완에겐 아몰랑이었다.
“자기 나라 국민이 이렇게 불합리한 일을 겪고 있는데 외교관이라는 작자가 얼굴을 안 보이네? 혹시 댁들이 못 오게 막고 있는 거야?”
마치 자신이 피해자라고 하는 표현이 심히 거슬렸지만 으파룽은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오. 한국대사를 불렀지 않소?”
“왜 이래? 나 한국인이기만 한 거 아닌 거 알잖아?”
“…….”
골치가 아프다. 어떻게든 미국이 개입하기 전에 범인의 투항을 받아내거나 제압하라는 상부의 지시에 이가 갈리는 으파룽이었다.
권력놀음만 잘하는 탁상물림 새끼들.
으파룽은 최대한 양보 하면서 어떻게든 경완의 투항을 받아내려고 했다. 경완이 저지른 살인에 대한 사면(赦免)은 물론 그를 죽여 능력을 강도질하려 했던 시도에 대한 정신적 육체적 피해보상까지.
이 정도면 정말이지 크게 양보하는 것이다.
하지만 경완은 그런 상대의 태도에 감동하거나 감화되기는커녕 이렇게 생각했다.
‘똥줄이 타는 모양이네, ㅋㅋㅋㅋ.’
미국도 경완의 가치가 높다는 걸 안다. 하지만 설마 중국이 이 지랄을 벌일 정도로 크다는 사실은 아마 몰랐던 모양이다. 아니, 알았더라도 여러 이해관계 때문에 중국처럼 꼴리는 대로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세계경찰의 가오가 있지 중국처럼 꼴리는 대로 개짓거리를 할 순 없지 않은가? 명색이 세계의 자유주의를 수호한다는 국가가 그 명분에 스스로 먹칠을 하면 여러 방면으로 불리한 점이 작용하기 마련이었다.
경완이 물었다.
“흐음. 나쁘진 않은데 투항했을 때의 안전보장은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해야 믿겠소?”
“한번 머리를 굴려보자고. 나 같은 경우엔 미국을 끼는 게 최선이지만,”
“그건 절대로 불가하오!”
“아아. 이해하니까 흥분하지 말고. 그러니까 머리 한 번 굴려보자니까.”
경완은 밀었다 당겼다 솜씨 좋게 협상에 응하는 척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가 문득 어둑해지는 것을 느끼며 창문을 보았다.
“석양이 참 아름답네.”
“…….”
뜬금없는 경완의 혼잣말에 으파룽도 창문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황당했다. 확실히 해가 지고 있기는 하지만 붉은 석양은커녕 그저 뿌연 하늘에 노란 해가 떠 있을 뿐인데 뭐가 아름답다는 말인가?
황당해하는 그의 귀에 경완의 음성이 들려왔다.
“저녁 먹고 할까요?”
다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호의 가득한 목소리는 마치 여태까지의 협상이 잘 흘러가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고 으파룽이 고개를 끄덕이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으파룽은 통 크게 저녁으로 만한전석 뷔페를 보내주었다. 맛있는 걸 먹고 좀 더 유화적으로 되라는 기대가 가득 찬 생각이었다.
덕분에 경완은 배불리 식사한 후 어둑해진 밖을 구경했다. 기자들과 경찰들의 서치라이트가 건물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럼 식사하고 있어요.]
[뭐 하려고?]
경완이 방 밖으로 나가자 왕샤홍이 의아해했지만 대답을 들을 순 없었다. 그리고 그가 마저 식사를 끝내기 전에 불이 팍하고 꺼졌다.
그러자 왕샤홍은 큰일 났다는 생각에 얼른 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고 방구석으로 들어갔다. 결국 인내심을 상실한 상부에서 군부대 투입을 결정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야간 시 테러를 제압할 땐 일단 전력부터 끊는 것이 기본적인 매뉴얼이 아니겠는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얼른 몸을 사려야 했다.
그때, 경완이 들어왔다. 왕샤홍은 더듬거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크, 큰일 났어!]
[무슨 일?]
[이제 곧 군이 공격할 거야! 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날 풀어주면,]
[아아. 불 꺼진 것 때문에 그래? 내가 끈 거니까 너무 겁먹지 마.]
[……어째서?]
[음. 그냥?]
불을 죄다 끄고 어둠을 빌려 저 밖에 있는 모두를 엿 먹일 계획이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여태 협상이 잘 되어서 조만간 경완이 중국의 품에 안길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친구(?)에게 그건 너무 큰 충격이지 않은가?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없는 법. 위선과 거짓은 경완이 어둠 속에서 창밖을 향해 라이플을 조준하면서 깨질 수밖에 없었다.
[뭐, 뭐 하는 거야?]
“쯧! 어쩔 수 없구만.”
“읍! 읍읍!”
경완은 혹시나 왕샤홍이 방해할까 봐 도로 구속하고 재갈을 물린 다음 황당해하는 그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재 내 몸값이 너무 낮은 것 같아서 말이야. 몸값 더 올리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고.]
“읍! 흡! 으읍!”
왕샤홍이 하고 싶은 말은 ‘야이 미친 새끼야! 그게 뭔 개소리야?!’가 아니었을까?
경완은 왕샤홍의 읍읍 거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꺄아악!
어둠이 깔리는 베이징. 발포음과 함께 공안부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조명이 하나둘씩 깨져나가자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현장 책임자와 현장 병력은 혼란에 빠졌다.
응? 분명 협상은 잘 진행되고 있다고 했는데?
으파룽이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마이크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야이 왕빠단 새끼야! 무슨 짓을 하는 거,]
퍽!
경찰차에 붙어 있던 확성기가 터져나갔다.
경완은 노래의 한 구절을 흥얼거리면서 계속해서 밖의 조명을 쏘아 맞혀 화려한 북경의 밤도시에 어둠을 드리웠다.
“암쏘 쏘리 뻣 알러뷰 다 거짓말~이야 몰랐니~ 이제야 알았니~ 너 좆됐단걸?”
그러다 충분히 어둠을 만든 경완은 무기를 챙겨 넣은 더플백을 매고 방을 나섰다.
“씨유 어겐~”
읍읍 거리며 버둥거리는 왕샤홍에서 인사를 남기며 말이다. 굳이 죽이진 않았다. 살려두면 공산당이 알아서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혀 줄 텐데 굳이 시간도 없는 지금 자신이 직접 손을 쓸 필요가 없었다.
경완은 빠르게 옥상으로 올라갔다. 저 멀리서 헬기가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날아왔지만 그의 저격이 곧장 서치라이트를 깨버렸다.
그제야 공안은 ‘경완의 목적이 도주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 다급히 에스퍼 등을 비롯한 초능력 공안까지 투입했다.
하지만 경완은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다루어야 저들의 추적을 뿌리치기 용이한지, 어떻게 해야 공안을 편안히 엿 먹일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탕탕탕! 탕탕탕!
탄알이 공기를 찢고 경완을 추적하던 초능력 공안의 미간에 박혔다.
초감각, 괴력이 가미된 정교한 신체 제어는 백발백중에 가까운 명중률로 경완을 추적하는 이들에게 어마어마한 손실을 가져다주었다.
총알 한 발, 적어도 두 발에 초능력 공안이라는 귀한 인재들이 일거에 소각되자, 현장 책임자와 으파룽은 순식간에 넋이 나갔다.
「이 새끼야! 이걸 어떻게 책임질 거야!」
곧 먼저 정신을 차린 현장 책임자가 으파룽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책임 떠넘기기를 시전했지만 두 사람의 출셋길이 막혀버렸다는 건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