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12-아무도 나를 말릴 수 없음
경완은 그 질문이 심히 흡족했다.
아마 김준이나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도대체 중국에서 무슨 짓을 했냐고 책망하듯 묻지 않았을까? 지금의 강우빈처럼 그 일을 저지른 원인을 궁금해하기보단 말이다.
역시 자신에 관한 다큐를 찍은 감독이라 자신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말했잖아요. 뒤통수 맞아서 빡쳤다고.”
“그건 너무 짧지 않습니까?”
강우빈이 항의하자 경완은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풀었다. 중국에는 상대를 죽여 초능력을 빼앗는 능력자가 있었고 중국당국에서 자신을 죽여 그 능력을 빼앗으려 했다고 말이다.
“사실입니까?”
“네.”
“증거는요?”
“없어요.”
“골치 아프게 되었군요.”
성의 없기까지 한 대답에도 강우빈의 반응은 마치 경완의 편을 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경완은 어깨를 으쓱했다.
“증거는 중요하지 않아요. 설사 증거가 있다고 하지만 그 중국이 인정하겠어요?”
“……아니죠.”
“결국 남은 건 실력행사를 하거나 아니면 찌그러져 있는 거죠.”
예를 들어 미국으로 망명 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건 경완이 찌그러지겠다고 자인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강우빈은 경완의 말에서 그의 의도가 뭔지 명백히 읽고 물었다.
“아직 모자란 겁니까?”
원전을 폭파하고도 말입니까?
행간에 감추어진 질문에 경완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생각해보니까 제가 빡쳐서 냉정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봤자 고통은 아래로 갈 뿐인데 말이죠.”
경완은 반성했다. 민주주의 국가도 아닌데 윗것의 책임을 그 아랫것들에게 물으려고 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말이다.
잘못을 저지른 지도층을 규탄하기 위해 들고 일어서지 못하는 것이 중국 인민들의 책임은 아니지 않은가? 그랬다가는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져서 신비해지거나 탱크로 싹 밀려버릴 텐데?
이념이냐, 목숨이냐. 경완은 힘없는 자들에게까지 잔인한 이지선다를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생존은 이념만큼이나 중요한 가치였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일단 중국어를 공부할 거예요.”
“왜요?”
뜬금없이 어학공부를 한다고 하니까 강우빈도 당황했다. 말에 맥락이 너무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어진 경완의 대답에 납득이되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일 꾸민 놈들만 골라서 조지려고요.”
“확실히 그편이 온건하긴 하죠. 하지만 괜찮겠습니까?”
“이 지경이 된 마당에 뭐든 안 괜찮을까요? 그렇다고 또 원전에 테러할 수는 없잖아요?”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하기 싫은 것뿐이었다. 괜히 부수적 피해를 크게 줬다가 생판 모르는 새끼가 원한을 품고 달려들면 피곤하잖은가?
그 말에 강우빈은 실소를 지었다. 하긴 그 말도 맞았다.
그날부터 경완은 강우빈의 도움을 받아 그 별장에서 지냈다. 인터넷으로 중국어 강의를 들으며 빡시게 공부했다.
그 시간 동안에도 경완이 저지른 짓이 세계와 한국에 안겨준 충격은 가시질 않았다. 원전테러에 무차별 공안 학살이라니?
한중관계는 험악해져서 좋아질 기미를 보이질 않았고, 중국은 연신 한국에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한국은 결코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할 수 없었다. 땅만 크고 속은 좁쌀만도 못하게 좁아서 중국이라는 불리는 놈들에게 빌미를 잡히면 무슨 요구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이 보름쯤 되었을 때 경완은 드디어 다시 중국으로 가겠다고 강우빈에게 선언했다.
강우빈이 물었다.
“벌써 중국어를 마스터하신 겁니까?”
“아니요. 설마요. 저도 이제 늙었는지 언어가 바로바로 습득이 안 되더라고요.”
언어의 구조는 뇌 활성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떤 언어가 요구하는 정도로 뇌가 활성화되어있지 않으면 언어의 습득이 어렵다는 말이기도 했다.
아무리 경완이라지만 여태 신경을 안 쓰고 산 중국어를 뇌가 빨리빨리 이해하길 바라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고 중국어를 마스터하겠다고 시간을 들이면 상황이 변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시간도 줄일 겸 이번 출장에 필요한 것만 공부했다.
‘이름이 뭐야?’
‘네가 날 죽이고 능력을 빼앗으려고 한 계획의 책임자인가?’
‘그 새끼 이름이 뭐야?’
‘○○○이가 네가 계획한 것이라는 데 사실인가?’
‘네가 마지막이야?’
대충 이따위의 중국어 문장들이 각각의 시나리오에 맞춰서 짜여져 있었는데, 강우빈은 그 내용을 듣고 헛헛하게 웃었다.
솔직히 기가 막혔다.
“대답은 네, 아니오로만 들으시려고 하는 겁니까?”
“뭐 딱히 중국어를 잘 들을 수 있게 되어봤자 쓸데없는 변명만 들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요즘엔 인터넷으로 번역도 잘 되잖아요? 필요하면 번역해서 물어보죠, 뭐.”
경완은 왜 진즉 중국에 있을 때에는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라고 자신의 멍청함을 탓했다. 워낙 뒤통수가 얼얼해서 그랬던 것일까?
아무튼, 그렇게 문명의 이기를 활용할 생각이라면 되도록 눈은 멀쩡히 남겨놓는 편이 좋았다. 그래야 휴대폰이나 모니터 화면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강우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언제 가실 겁니까?”
“어…… 몇 가지 물품이 필요한데…… 혹시 중국 지도책이랑 GPS 좌표기 구할 수 있어요? 중국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걸로요.”
“물론입니다만…… 그걸로 충분하겠습니까? 무기는요?”
“무기는 다 놔두고 왔어요. 누군가 가져갔으면 뭐 공안 사무소에서 훔치면 되죠.”
“……재주도 참 많으시군요.”
“에이, 뭘요. 이런 재주 있어봤자 사회에 하등 도움도 안 돼요.”
경완은 강우빈의 감탄에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도둑질하고, 강도질하고, 남 조지는 재능이 사회에 기여해 봤자 얼마나 기여한다고 이리 감탄한단 말인가? 낯간지러웠다.
그런 경완의 미소에 강우빈은 헛헛하게 웃다가 뭔가 생각나서 물었다.
“아참. 위성폰도 하나 있으면 좋지 않을까요?”
“딱히 필요 없어요.”
“다른 질문을 할 경우 인터넷 번역을 쓰실 거라면서요?”
“훔치거나 빼앗아서 쓰면 돼요.”
“잠금은 어떻게 풀려고요?”
“중국이 세계의 공장, 세계의 짝퉁이라기에 마냥 개발도상국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첨단기술을 많이 도입했더라고요. 지문인식 기능이라고 들어봤어요? 손가락 잘리기 싫으면 얌전히 잠금을 풀겠죠. 아! 생각난 김에 그거 중국말로 어떻게 물어보는지 외워가야겠어요.”
“…….”
강우빈은 자신도 나름 반사회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남자에 비해서는 많이 정상이라는 걸 느꼈다.
“중국은 참 큰일 났네요.”
강우빈은 경완을 건든 인간들을 향해 묵념을 보냈다.
* * *
서해 한복판. 중국의 해역을 벗어난 한국 해역.
거기엔 중국어선 여러 척이 불법조업을 하고 있었다. 한국 해경이 나타나기 전에 얼른 싹쓸이하고 튀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서두르는 와중에도 한 선원의 시선을 끄는 장면에 눈에 들어왔다. 선임이 그런 선원을 다그쳤다.
「야! 어디다가 정신 팔고 있어!」
「저기에 사람이 뛰어가요!」
그 선원의 외침에 다른 선배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럼 사람이 뛰어가지 날아갈까?」
「아니! 바다 위를 뛰고 있다고!」
그제야 후배의 말에 관심을 가진 선원이 그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진짜 동료의 말대로 누군가 바다 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걸 본 선원들은 놀라고 흥분해서 외쳤다.
「등평도수다!」
무협지에서나 볼법한 일을 직접 목격하다니!
하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초능력이라는 것도 생겨난 세상인데 등평도수하는 초능력이 없으리라는 법도 없잖은가?
놀라움은 잠시, 이내 부러움이 몰려왔다.
「거참 밀수하면 잘하겠네.」
저렇게 밀수를 하면 공안에 잡힐 일도 없지 않을까?
그들은 그저 부러워할 뿐 중국 당국에 신고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해봤자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있는 곳은 한국 해역이 아니던가?
한편, 꼬박 만 하루를 달려 서해를 넘은 경완은 해변에 도착하고는 기진맥진했다.
세상에! 이렇게나 힘들다니!
밀항선에서 내려서 바다를 뛰어넘었을 때에는 해변까지 거리가 가까워서 못 느꼈는데 역시 바다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아니, 맨몸이었던 그때와는 달리 짐을 두둑이 챙겨와서 그런가?
경완은 도착하자마자 쉬기 위해 인적 드문 곳을 골라 캠핑을 했다. 캠핑이라 해봤자 비닐로 천막을 쳐서 찬바람을 막고 침낭에 드러눕는 것뿐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확실히 맨몸보다는 장비가 있으니 편하다는 걸 느꼈다. 강우빈이 거의 맨몸으로 가려는 경완을 만류하고 배낭을 챙겨주지 않았다면 이런 편안함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노숙을 하게 되더라도 장비는 갖추고 해야 체력온존과 회복이 용이하다나?
경완은 그의 말에 격하게 동의하며 그가 챙겨준 물품을 사양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다를 건너는 건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일이었다. 다음엔 좀 돌아가더라도 땅으로 다닐 생각이 확고해졌다. 뭐, 북한땅을 통과해야겠지만 그게 그리 크게 문제 될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를 푹 쉰 경완은 GPS를 확인하고 베이징을 향해 이동했다. 일단 모든 것이 시작된 그곳에서 일을 시작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식량을 훔치며 이동하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무사히 그리고 은밀히 북경에 도착한 경완은 공안부 청사로 다시 찾아갔다.
그리고 숨어서 초감각을 이용해 공안부 청사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확인해 나갔다.
그의 초감각은 S입자를 이용하기 때문에 마치 투시한 듯이 벽 너머도 볼 수도 있었고, 손으로 만진 듯 촉감도 느낄 수 있었으며, 파동에 예민하도록 조정하면 멀리서도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가 원하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입이었기에 누구의 어깨에 무슨 계급장이 붙어있는지부터 확인했다.
혹시나 왕샤홍이 여전히 있는지 기대도 해봤지만 아쉽게도 며칠 동안 감시하는 와중에 그가 출근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에 경질된 모양이었다.
아쉽게 되었다. 아무래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면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편했을 텐데 말이다. 본인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경완이 알 바 아니었다.
안타깝지만 인구 14억의 중국이라 그런지 아무리 부총경감이라는 높은 자리라도 대체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아무튼 경완은 며칠 시간을 들여 잠복한 결과, 벼처럼 생긴 것이 월계수 왕관처럼 원과 별을 감싸는 형태의 계급장을 가진 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퇴근하는 그들 중 한 명의 뒤를 몰래 추적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마치 모택동의 헤어스타일을 연상시키는 중년 남성의 차량을 추적하던 그는 중년 남성이 어느 오피스텔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가 초인종을 누르니 딸 또래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나와 그를 반겼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질척할 정도로 진하게 입을 맞추는 것을 보아 부녀 관계는 결코 아니었고 아무래도 내연녀인 모양이었다. 하긴 중국 고위 관료 중에 현지처나 첩 하나 없는 사람은 찾아보기 드물다지 않은가?
경완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기다리지 않고 바로 남자가 들어간 오피스텔로 향했다.
같은 남자로서 떡칠 시간을 주는 것이 인지상정은 아닐까 잠시 고민했지만 밤꽃냄새 그득한 곳에서 신문할 정도로 경완이 배려 넘치는 성격은 아니었다.
문 앞에서 선 그는 굳이 초인종을 누르지 않았다. 대신 잠금장치가 있을 만한 곳에 손을 짚었다. 가느다란 검은 연기 한 줄기가 문틈으로 파고 들어가 잠금장치를 풀었다. 능력의 원본인 흑연이 봐도 놀랄 정도로 정교한 제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