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상은 요지경
[119입니다, 말씀하세요.]
경완은 119가 전화를 받자 휴대폰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닥에 내려놓은 휴대폰 바로 옆엔 얼굴 여기저기가 푸르딩딩 부풀어 있는 얼굴이 넋을 잃고 놓여 있었다.
“우우. 우우우.”
신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를 흘리면서 말이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우우~ 우우~”
박흥태를 그대로 버려둔 경완은 오수민인가 오숫물인가 하는 놈을 찾아가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박흥태는 그냥 하청일 뿐이었으니 원청을 조져봐야 속 시원한 뭔가가 나오지 않겠는가?
이미 박흥태로부터 오수민의 사진과 사는 곳까지 죄다 알아놨으니 찾아가서 물어보면 친절하게 대답해 줄 것이다.
암, 친절하고말고.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오수민이 박흥태를 납치할 때 바로 그 룸에 있던 놈들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미리 알았다면 같이 잡아 와서 물어보는 건데…….
하지만 이것도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한 양심적 행동(?)의 결과이니 받아들여야 했다. 아무나 막 잡아다가 때리고 고문하면 저~어 높으신 자리에서 증거조작, 간첩조작 따위로 꿀 빨던 공안검사 나으리랑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경완은 그런 엘리트분들과 자신 사이에 분명한 차별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찌 자신과 같은 테러 전과자 나부랭이가 그런 높은 분들과 같은 수준으로 놀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하며 오수민이라는 자를 만나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박흥태가 한 말 중에 빠진 건 없는지, 그 전후 사정을 명명백백하게 듣기(?)로 했다.
다행히 그가 오수민의 집에 도착했을 때 오수민 역시 집에 있었다.
평범한 시민이었다면 경찰에 잡혀가서 납치사건에 대해 사정청취를 당했겠지만 역시 재벌집안이라 그런지 밤늦게까지 경찰서에 붙잡혀 있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오수민이 집에 도착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경완도 그의 집에 도착했던 것이다.
스마트 현관 시스템과 경비가 오피스텔의 입구를 막고 있었기 때문에 옥상을 통해 건물 내부로 들어온 경완은 문틈으로 흑연의 염동력을 밀어 넣어 당당히(?)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경완이 오수민의 집에 들어가자 고요한 분위기와 멋진 인테리어 사이로 아련히 샤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걸 조져 말어?
경완은 알몸의 남자와 마주하는 것이 좀 거시기해서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냉장고를 뒤져 맥주도 꺼내고 찬장을 뒤져 안주로 먹을 건어물도 찾아서 TV도 보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니 이놈이 알몸으로 나오는 거 아닌가?
“헉! 너, 너 누구야!”
오수민은 경완을 보자마자 기겁해서 소리를 질렀다. 샤워해서 찜찜한 기분도 날리고 상쾌한 기분으로 나왔는데 난데없이 낯선 놈이 소파에 앉아서 술도 처먹고 안주도 처먹고 TV도 처보고 있으면 어느 누가 놀라지 않겠는가?
하지만 경완은 놈의 외침에 대답하지 않고 손으로 눈앞을 가리며 말했다.
“옷부터 입고와. 덜렁거리는 거 꼴 보기 싫으니까.”
“너 누구냐니까!”
“변태냐?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그리 알몸으로 있게?”
“나가! 당장 나가!”
“생각보다 많이 멍청하구나. 나가려면 들어오지도 않았지. 그나저나 남자한테 알몸 보여주면서 흥분하는 취향이니? 옷도 안 입게?”
경완의 말에 오수민은 급히 반바지를 챙겨 입고 곧장 휴대폰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저 미친놈을 쫓아내기 위해서 얼른 경찰을 불러야 했다.
어느 화끈한 가풍을 가지고 있는 재벌집안이었으면 직접 몽둥이찜질을 하는 솔선수범(?)을 보여줬겠지만 오수민은 아니었다.
설마 그도 나름 재벌인데 맷값이 걱정되겠는가? 그저 원래 몸 쓰는 천한 일이 적성에 안 맞기 때문이었다. 명색이 재벌이면 그런 건 원래 사람 시켜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오수민은 그렇게 배워서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끝이 휴대폰에 닿기 직전,
팍팍팍!
“……꿀꺽!”
그는 휴대폰 근처에 박힌 포크와 젓가락, 부엌칼에 움직임을 멈추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시선이 두려움에 젖어 경완을 향하자 경완은 손끝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이제 그만 현실 인식을 했으면 마저 옷 입고 이리 와서 앉지?”
보통 놈이 아니다. 오수민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벗어두었던 셔츠를 입기 시작했다.
그런데 단추를 끼우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엔 워낙 당황해서 놈이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조금 차분해지자 놈의 얼굴이 선명히 떠올랐던 것이다.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근 한 달 동안 내신은 물론 외신의 전면을 장식했던 얼굴인데?
그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두려움을 꾹 눌러 참고 상의까지 걸친 다음 경완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아니 앉으려고 했다.
“누가 소파에 앉으래? 여기 앞에 꿇어앉아.”
경완의 말에 오수민을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목숨은 소중하기에 감히 대들 생각 못하고 경완이 오만하게 손목을 꺾어 가리킨 그의 발치 아래에 얌전히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굴욕감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감히 재벌을 꿇리다니! 아버지 앞에서도 이렇게 꿇어앉은 적이 없었는데!
아마 경완이 그런 속내를 알았다면 가정교육이 그 모양이니 싸가지도 없다고 한 소리 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원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게 세상의 진실이라고 훈계도 해주고 말이다.
경완이 오수민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여기 왜 왔는지 궁금하지?”
끄덕끄덕.
퍽!
“악!”
“입이 있으면 대답을 하세요. 왜? 너도 입 하나 더 뚫어주랴?”
입을 하나 더 뚫어준다면 도대체 어디다가 뚫어준다는 말인가? 그리고 ‘너도’라니? 이미 하나 뚫었단 말인가?
도저히 상상이 안 돼서 더 무서웠던 오수민이 대답했다.
“아니오!”
“아니오?”
“아, 아닙니다!”
굴욕적이지만 존댓말을 쓰는 오수민이었다. 지금 나이와 장유유서를 따질 때인가?
“암튼. 내가 왜 왔는지 궁금하지?”
“그, 그렇습니다!”
“이미연.”
“…….”
경완의 한 마디에 오수민은 말문이 턱 막혔다. 아마 말을 했어도 ‘아!’란 탄식 한 마디 외엔 나오지 않았으리라.
“박흥태가 다 불었더라. 너한테 부탁받았다고.”
‘그 씨발 새끼가…….’
“그래서 그놈 말이 맞지?”
“아, 아닙,”
짝!
“어디서 거짓말이야?”
속으로 박흥태를 씹던 오수민을 반사적으로 위기를 회피하기 위한 거짓말을 내뱉었다가 따귀를 맞고 옆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자신의 멍청함을 탓했다. 상대는 살아 움직이는 거짓말 탐지기로도 유명했다.
“대답 안 해?”
“마, 맞습니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얼굴이 얼얼했지만 급히 대답해야 한다는 정신줄만큼은 붙들고 있었던 오수민이었다.
“왜 그랬어?”
“…….”
왜 그랬냐는 말에 오수민은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가오 상하는 일이지 않은가? 재벌집 자제분이 연예인 좀 따먹어 보겠다고 추잡하게 뒷공작이나 부탁했다는 것이.
“재벌이겠다, 외모에 돈 좀 처발라서 관리도 잘 되었겠다, 그냥 들이밀 자신감도 없었던 거야?”
“아, 아닙니다.”
“아닌데 왜 그랬대?”
“…….”
“아! 한 번 했는데 까였구나?”
오수민의 얼굴이 벌게졌고 경완의 혓바닥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날뛰었다.
“한 번 꼬셔서 따먹어 보려고 했는데 까이니까 열 받고, 그렇다고 포기하긴 아쉽고, 재벌 주제에 질척대긴 싫고. 참나. 너 찐따냐?”
“아닙니다!”
수치심에 자극당한 분노가 잠시 두려움을 밀어냈지만 경완은 클클클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찐따는 자신이 찐따인지 몰라. 다른 사람 의견을 듣기 전엔 말이지.”
사람은 타인을 겪어봐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가늠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재벌도 마찬가지다.
어디 재벌은 알에서 태어나나? 그들도 결국 인간일 뿐이었다.
“주변에 네 찐따성을 지적해 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나 봐?”
불쌍하게시리…….
그런 어조라 오수민은 울컥할 뻔했다. 나 찐따 아니라고! 세상 재벌 중에 어떻게 찐따가 있을 수 있나?!
경완이 그런 그의 표정을 읽고 말을 이었다.
“싫다는 여자한테 질척대다 못해 뒤로 음습한 수작을 부리는 게 진따가 아니면 뭔데?”
말문이 막힌 오수민에게 경완은 계속 말했다.
“남자라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각오로 임해야 할 거 아니야? 쥐뿔도 없는 일반인이라면 세 번만 찍어도 스토커라 잡혀가는 세상이지만 넌 재벌 집안이잖아? 열 번은커녕 백번을 찍어도 아무 일 없을 텐데 단순히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고백만 해도 웬만한 여자는, 아! 네가 왜 까인 건지 알겠다. 진심 없이 그냥 예쁜 딴따라 한 번 따먹어보겠다는 심정으로 찝쩍였으니까 까인 게 100%네.”
미연은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건지 한 번 가지고 놀아보려고 하는지 구분하는 판단력쯤은 있었다.
그러니 까이지.
경완은 미연이 자신을 좋아해서 거절했다고는 생각하진 않았다. 미연 정도로 세상 물 좀 먹으며 갖은 고생으로 성공한 사람이라면 첫사랑의 낭만이나 환상에 얽매이지 않을 수준으로 성장했다고 봐야 했다.
그러니 탑스타 연예인이 멀끔하게 생긴 재벌을 깠다면 답은 뻔했다.
한편, 경완의 말에 오수민은 수치스러워 미간을 좁혔다. 이 무서운 상황에 말만 나누고 있으니 무서운 끼도 조금은 사그라들었다.
“그런데 왜 내가 이 지랄을 벌이는 건지 궁금하지?”
그래! 네가 무슨 상관이길래 이 지랄을 하는데?
“네.”
대답하는 오수민은 역설적으로 속 시원함을 느꼈다. 문제의 당사자가 속 시원하게 대변해주다니 말이다.
경완이 말을 이었다. 자신과 미연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오수민은 황당해졌다.
“고작 그거 가지고…….”
겨우 고아원에 있을 때의 인연 가지고 그런단 말이야?
그런 반응에 경완은 자신이 박흥태에게 했던 논리를 다시 한 번 읊어줬다. 중국에서의 일 때문에 예민해졌다고 말이다.
하지만 오수민은 어이가 없었다. 혹시 경완을 건드려서 간을 보려는 놈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이렇게 불법 침입에 폭행과 위협까지 한단 말인가?
“표정이 좀 그런데? 혹시 내가 너무 한다고 생각한다면 네가 여태 생명의 위협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게 분명해. 그러니 내 말에 공감을 못하지.”
굳이 공감까지 해야 해?
오수민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질문한 것이 아니니 대답을 할 필요는 없다고 믿었지만 상황은 나아지질 않았다.
“그러니까 생명의 위협을 느껴보자고.”
“나, 난 당신에겐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고!”
“그러니까 정말 그런지 확인해 보자니까. 혹시 주마등 학습법이라고 알아?”
“……?”
뭔 학습법?
“죽기 직전에 과거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는 말 못 들어봤어? 죽기 직전까지 처맞아보면 왜 자신이 미연에게 관심을 가졌는지, 누가 부추긴 건 아닌지 죄다 기억나게 될 거야.”
경완이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뚜둑뚜둑 꺾으며 일어나자 오수민은 저절로 뒤로 엉덩방아를 찍으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야! 아무도 부추긴 사람 없었어!”
“아직 주마등 기억법을 쓰기 전이라 믿기 힘드네. 사람의 기억이란 불완전한 부분이 많으니까.”
오죽하면 리플리 증후군이 있을 정도일까?
하지만 오수민은 경완의 궤변에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사람의 기억은 불완전하다면서! 그럼 주마등 기억법을 써봤자 불완전한 건 마찬가지지 않은가!
그의 입장에선 그저 경완이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할 구실을 찾고 있는 것이라 생각될 뿐이었다.
그러한 생각은 반쯤은 정답이었다.
무한전생-더 빌런 14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