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상은 요지경
김길상은 어떻게든 그녀를 말리고 싶었지만 이미 그녀는 그가 말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그녀의 상상은 계속해서 미래로 향했다.
“남자를 포섭하는 일에는 미인계가 최고죠. 다큐를 본 사람들은 경완 오빠에게 부와 명예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는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럼 남는 건 뭐겠어요? 하나뿐이잖아요.”
이미 그에게 롸끈한 포상이었던 에스코트걸이 방송에서 썰을 푼 거 봐라. 딴 건 몰라도 여자가 통한다는 건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전 오빠 옆에 다른 계집이 있는 꼴을 못 보겠어요. 미인계의 수단으로 다른 사람이 선택되느니 차라리 제가 낫죠.”
상상만 해도 질투가 끓어오르는지 눈빛이 활활 타는 소속 연예인을 보며 김길상은 마른침을 삼켰다.
* * *
위버멘쉬가 양지로 나온 후 세상은 숨 가쁘게 변화했다. 무려 EU에서 위버멘쉬를 테러단체에서 제외하자 미국을 비롯해 영국에서도 위버멘쉬를 테러단체 목록에서 제외했다.
혹자는 인간의 초월을 추구한다는 이 단체가 혹여나 초능력으로 인간의 우월을 논하는 새로운 인간계급론, 초능력 시대의 나치즘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위버멘쉬의 공식 대변인, 나탈리 헵번의 기사회견으로 그러한 우려는 종식되었다.
[현재 위버멘쉬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각성의 빈도와 특성은 유전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보다는 지역적인 특색이 더욱 강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각성이 유전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니 적어도 위버멘쉬가 초능력 우생학을 강조할 일은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보다 지역적인 특색이 더 강하다고?
이에 관한 기자들의 질문에 위버멘쉬의 대변인 나탈리 헵번은 이런 가능성을 점쳤다.
[시기적으로, 또한 발생 빈도를 보았을 때 초능력의 각성은 동북아 지역 어딘가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일단 각성 이후가 개인의 자질과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부연 설명은 기자들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초능력의 시작점이 동북아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 들어왔다.
이것은 특종일까?
그들은 좀 더 심층 취재를 했고, 위버멘쉬의 기사회견에서 했던 추측을 자국의 연구자들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도 나탈리 대변인의 말에 동의하며 통계학적으로 봤을 때 분명 동북아에서부터 초능력이 시작되었다는 정황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이에 동북아 삼국에선 온라인에서는 댓글 배틀이 벌어졌다. 중국은 당연히 자신들이 초능력의 원조라고 주장했고, 일본도 이에 지지 않았으며, 한국은 그런 둘을 비꼬았다.
‘그래, 원조라서 차~암 좋겠다.’
그래서 초능력 사용에 로열티라도 물리고 싶니?
아무튼, 초능력 기원설이 대두되자 그 발상지로 추측되는 동북아에 세계의 시선과 조사원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그 조사원들은 대부분 한국으로 향했다.
왜냐? 중국은 초능력의 기원이 있다면 그것을 독점하고 싶어했기에 조사원의 입국을 불허했고, 일본은 겉으로는 그러지 않았지만 은근히 외국인 차별이 심한 곳이라 조사원들에게 비협조적인 건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유명 언론사가 일본 총리 좀 비판했다고 정부 기자회견에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은 치졸함을 봐라.
명예백인, 동아시아의 유럽이라고 자찬하는 자의식 가득한 정신머리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조사원들을 환영하는 건 한국이었다. 설사 초능력의 기원이 한국에서 발견된다고 해도 어차피 한국의 국력으론 그걸 독점하는 건 불가능하고 딱히 자원이 없어서 해외수출입으로 먹고사는 나라 아닌가?
두루두루 여러 나라와 원만한 관계를 지키는 것이 국익을 지키는 일이었다. 마침 두 옆 나라와 비교가 되어서 이미지도 좋아지니 일석이조였다.
그런 와중에 한국에 위버멘쉬의 대변인 나탈리가 입국했다. 그녀는 과거 위버멘쉬 회원이 교도소를 무단침입했던 개인적 일탈(?)을 사과하며 앞으로 한국과 위버멘쉬 간의 상호호혜적 발전을 도모하고 싶다는 위버멘쉬의 의사를 전달해왔다.
미모의 젊은 백인 여성이 상당히 능숙한 한국어로 사과하며 한국식 인사로 허리까지 숙이는 진정성은 한국인들을 설득시키는 충분했다.
피해자가 다름 아닌 ‘이경완’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한국인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예컨대 이런 식의 반응이었다.
‘그 미친놈을 납치하려고 했다고? 간도 참 크네.’
물론. 한국의 공권력을 무시한 주제에 뭔 개소리냐고 발끈하는 한국인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정부 관계자들의 대응은 조심스러웠다. 왜냐면 제3세계나 분쟁이 심했던 지역에서 무력으로 위상을 드높인 위버멘쉬는 이미 국제적인 영향을 행사하는 집단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국익을 생각하면, 또한 상대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생각해봤을 때 마냥 범죄집단으로 보고 적대적으로 대하는 건 일단 지양(止揚)해야 했다. 실제로 한국 내 위버멘쉬의 활동이 직접적으로 공권력과 부딪혔던 일은 교도소 불법침입밖에 없었지 않은가?
그 외에는 뭔가 위버멘쉬가 관여된 일들이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뚜렷한 물증은 없었다.
아무튼 한국으로 들어온 위버멘쉬의 대변인, 나탈리가 경완을 찾아와 사과했다.
“그래서 저희 멤버가 경완 씨에게 저지른 무례를 사과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미모의 젊은 금발 백인녀의 사과에도 경완은 시큰둥했다.
“사과라는 건 당사자가 와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물론 두 사람도 미안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 들어오기 힘든 상황임을 감안해 주셨으면 합니다.”
“위버멘쉬의 영향력이 좀 더 커질 때 들여보낼 생각인가요?”
경완의 날카로운 질문에 나탈리는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전후 사정을 모른 남성이 봤다면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경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얼른 안색을 바로 하고 설명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두 사람은 지금 여러 일로 많이 바쁩니다.”
“흐음..”
하지만 석연치 않은 경완의 표정을 보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위버멘쉬는 더 이상 빌런집단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불법 자경단으로 간주되는 면이 있는 ‘동시에’, 하나의 국제적 세력으로서의 면모도 인정받았다.
그 매스 이팩터라는 힉스맨과 그의 사이드킥 위치에 있는 머슬러가 지금 당장 한국에 들어온다면 엄격한 재판을 받아야겠지만, 나중에 위버멘쉬의 위상이 더 커지고 한국에 대한 영향력도 커진다면 아마 보석으로 풀려날 가능성이 더 커질 것이다.
지금 당장 들어오지 않는 것도 그것을 노리고 있다는 게 경완의 판단이었다. 그는 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깍지 낀 손에 얼굴을 올리며 말했다.
“우리는 사회인이잖아요. 사회인에게 사과란 말로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보상을 원하시는 건가요?”
말이 잘 통하자 경완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이 안 피곤해서 다행이다.
“얼마를 원하시나요?”
“주고 싶은 대로 주세요.”
김준에게 시전했던 ‘알아서’가 또 나왔다.
당연히 나탈리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가 이내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략적인 액수라도 말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에 경완은 상큼하게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많이 주시면 흡족할 것이고, 적게 주면 불쾌하겠죠. 어느 쪽이든 사과는 받았다고 치죠.”
적게 주면 불쾌하다는데 사과를 받았다고 친다는 건 또 뭔가?
나탈리의 표정에 고민이 서렸고 접견을 지켜보던 교도관의 경완을 향한 시선엔 비난이 서렸다.
하여간 예쁜 여자가 곤란에 빠졌다 싶으면 바로 감성에 젖어가지고는.. 남자 새끼들은 이게 문제였다. 예쁜 여자에게만 공감하는 선택적 성인지감수성 말이다. 그러니 다른 쪽이 빡이 치지. 아! 여자도 마찬가진가?
경완은 나탈리의 고민이 길어지는 듯하자 지루해져서 말했다.
“왜 고민하세요? 그냥 위에 보고하면 되지.”
“제가 이번 일의 책임자라 그렇습니다.”
“무슨 일요?”
“한국에서 위버멘쉬의 이미지를 재고하는 일이요. 경완 씨에게 사과하는 것은 그 일환입니다.”
그녀의 말에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고민은 자신의 일이 아니니까.
“암튼, 보상금 줄 때는 저에게 주는 게 아니라 재단에 제 이름으로 기부하면 됩니다.”
“어디 재단입니까?”
“불씨재단이라고 있어요.”
나탈리는 경완의 설명을 듣고는 의외라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그런 재단을 후원하다니.. 놀라워요.”
“왜 다들 놀라는지 모르겠네요.”
노동자를 착취해 자선 사업을 했던 철강왕에 비하자면 자신은 성인군자나 마찬가지 아닌가? 자신이 번 돈 어디에 가난한 자의 손때 묻은 돈이 있단 말인가? 눈먼 나랏돈과 매국노를 양성하기 위한 뇌물 빼고 말이다.
나탈리는 어깨를 으쓱하는 경완을 잠시 말없이 뚫어지게 보더니 말했다.
“왜 당신 같은 사람이 감옥에 있는 걸까요?”
그 말에 접견실 교도관은 나탈리의 뒤통수를 아연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저 희대의 범죄자가 감옥에 있지 않으면 어디에 있어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경완은 그녀의 말에 동의라도 하듯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아마도 법이 그래서 그렇겠죠.”
난 착하지만 법이 나쁘다는 뉘앙스에 교도관은 입을 벌리며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그리고 나탈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법을 어기고서는 그 법을 지키기 위해서 감옥에 있는 건가요?”
“그렇죠.”
맞는 말이기에 경완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탈리는 갸웃하며 말했다.
“당신은 참 특이한 사람이군요.”
거기서 접견은 끝났다. 그녀는 보상액이 정해지면 알려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바로 교도소 옆에 있는 세립 대한 초능력 연구소에서 말이다.
스마트 포스필드의 산업용 장비 제작을 위한 파라미터 조정 작업을 위해 불려간 경완은 그 자리에서 나탈리를 발견했다.
“저 여자가 여기엔 왜 있어요?”
마리아 소장이 대답했다.
“위버멘쉬도 나름 초능력 연구에 일가견이 있다고 하더군요.”
“설마 위버멘쉬랑 손잡기로 한 거예요?”
“비난하는 건가요?”
김마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경완의 물음에 되물었다.
경완은 고개를 저었다.
“비난이라니요. 그냥 그러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윗대가리들이 많을 텐데요.”
위버멘쉬는 새롭게 떠오르는 신흥세력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세력이 떠오르면 그 세력에 의해 압박을 받고 견제하고 싶어 하는 기득권이 발생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위버멘쉬의 행보를 보면 특히 높으신 분들이 많이 불안해하는 건 당연했다. 제3세계에서 위버멘쉬가 초능력이란 무력을 앞세워 쌓아 올린 것들을 보라. 권력과 영향력을 향한 그들의 행보는 기득권이 아닌 사람이 보기에도 노골적일 정도였다.
아마 초능력이 새 시대의 패러다임을 이끄는 요소가 아니었다면 초능력자 전체를 탄압해서라도 위버멘쉬를 솎아내려고 하지 않았을까?
마리아 소장은 경완의 우려(?)에 이렇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도태될 테니 말이죠.”
그러니까 아무리 높으신 분이라도 시대의 조류를 거스를 순 없다는 말인가?
“소장님께선 위버멘쉬가 새로운 시대의 조류가 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굳이 그런 건 아니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바가 새로운 시대의 조류에 걸맞기는 하다고 생각하죠.”
“초능력으로 인간을 초월하자는 것이요?”
“이상할 거 있나요? 초능력이 나타나기 이전에 과학 기술의 발전 역시도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해서잖아요?”
장애를 극복하고, 노화를 극복하고, 죽음을 극복하고, 신체라는 감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과학적인 노력과 투자는 초능력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나타났음에도 변함이 없었다.
아니, 기존의 과학과 결합해 한층 가속화되고 있었다.
무한전생-더 빌런 14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