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상은 요지경
“하지만 이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치료한 지 하루도 안 돼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요! 전 몇 걸음 제대로 걷지도 못했습니다!”
[개인적인 사고는 유감이지만 그 건과 당신의 부탁과는 별개요.]
양승태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겐…… 아직 자료가 있습니다.”
[허! 그건 진즉 없애야 하는 거 아니었소?]
상대가 어이없어하는 기색이 전화를 통해서도 느껴졌다.
양승태가 대선후보로 언급될 정도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이유.
한국 굴지의 재벌 회장에게 부탁할 수 있었던 이유. 바로 한국 굴지의 재벌도 꽤나 아파할 자료가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양승태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모 아니면 도였다.
“제발!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매우 절박한 어조였지만 치졸한 협박 중이라는 감추기 위한 안간힘에 불과했다.
전화기 너머 정 회장은 고심을 하는지 신음을 흘렸다.
[흐음…….]
꿀꺽.
양승태는 그가 무슨 결정을 내릴까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AS가 되는지 한번 물어는 보겠소.]
“부탁드립니다!”
양승태는 다리만 멀쩡했다면 벌떡 일어나서 연신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할 정도로 극진히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납작 기어야 했다. 실상 정 회장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너무 그렇게 기대하진 마시오.]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 * *
정 회장은 양승태와의 통화를 마치고 인터폰을 눌렀다.
“김 실장, 들어와 보게.”
곧 김 실장이라는 사내가 들어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그런 그에게 정 회장은 김 실장이 듣기에는 참으로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사람이란 건 몸이 병신이 되면 정신도 병신이 되나?”
“……무슨 말씀이신지……”
“양승태 말이야.”
“혹시 문제라도 있습니까?”
“사람이 살다 보면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인데 이 양반은 노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는지 그걸 몰라. 사람이 깔끔하지 못하고 추잡해졌어. 이미 끝난 일까지 들추려고 하지 뭔가.”
이미 끝난 일이란 무엇인지 김 실장이 모를 리 없었다. 정 회장 밑에서 더러운 것들을 치워왔던 기간만 십수 년이었다.
김 실장은 모시는 분의 의중을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그…… 동남아 친구들이 괜찮나, 아니면 남미 친구들이 괜찮나?”
“조용히 치우는 거라면 남미 쪽이 조금 더 낫다는 평이 있습니다.”
김 실장의 말에 정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에 의뢰를 넣으라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을 이었다.
“세상 참 무서워졌어. 초능력이라는 게 말이야 소리소문없이 사람 묻기엔 진짜 효과적이란 말이지.”
김 실장은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였고 그로부터 며칠 후 양승태의 부고 소식이 알려졌다.
사인은 자살.
검찰에선 하반신 마비가 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우울증을 앓다가 끝내 자살한 것으로 공표했다. 물론 거기에 관심을 가지는 언론은 극소수였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작 그 정승이 죽으면 개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양승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장례식장은 대선후보로 거론되던 인사(人士)치고는 휑했다.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후배검사를 해코지하도록 사주한 사람이라 그런지 검찰 출신인데도 검찰에서조차 나온 사람이 없었고, 조화(弔花)하나 보낸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양승태는 끝났다.
그에 반면에 경완은 눈 호강을 한껏 즐기고 있었다.
“끼야호!”
다름이 아니라 이 졸부년이 쉬는 날이라고 워터파크에 놀러 간 것이 아닌가?
덕분에 몸매 자랑하러 늘씬한 비키니를 입고 나온 처자들이 경완의 호르몬을 자극하여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옆에 있는 제프리도 싱글벙글이었다.
경완이 물었다.
“좋아요?”
“좋죠. 여자 만날 일이 없는 직업인데 이렇게라도 보니 좋네요.”
“직장에 여자 없어요?”
경완의 말에 제프리는 주위를 살피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제 취향은 아무래도 한국 여자인 모양이에요.'
한국 사람을 좋아했던 모친 쪽의 피가 흘러서인가……
경완은 딴죽 걸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취향은 존중해야 하는 법이었다.
그런데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늘씬한 비키니의 여자 둘이 접근해서 제프리에게 말을 거는 게 아닌가?
“저기 어디서 왔어요? 같이 노실래요?”
하긴 제프리는 운동으로 탄탄하게 다져진 몸매도 있고 한러의 혈통이 섞인 서구적인 마스크도 매력적이었다.
어머 이게 웬 떡이냐며 좋아하던 제프리의 표정이 이내 시무룩해졌다. 수영복을 입고 노는 척해도 그는 현재 업무 중이었던 것이다.
그때 경완이 말했다.
“놀다 와요. 여기는 내가 보고 있을 테니까.”
경완이 턱 끝으로 가리키는 곳엔 슬라이드를 타고 내려오는 한영미가 있었다.
“정말 그래도 돼요?”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인연을 만들어요?”
“사고 안 칠 거죠?”
“이런 대낮에 무슨 사고를 쳐요?”
경완의 말에 제프리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경완도 흐뭇해졌다. 김준과 달리 확실히 융통성이 있는 녀석이었다. 김준이라면 단칼에 거절했겠지만 사람에겐 사랑과 일 사이의 균형도 중요했다.
“같이 안 노세요?”
두 여자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경완이 짙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던 탓이 컸다. 안 그랬다면 엄청난 소란이 일었으리라.
여자의 물음에 경완은 고개를 돌려 인이어를 보여주며 말했다.
“전 지금 경호업무 중이거든요.”
“그럼 저분은요?”
“슬슬 교대할 때가 됐죠. 아무리 경호원이라도 쉬는 시간 없이 내내 긴장만 할 순 없는 노릇이거든요.”
경완의 말에 제프리의 얼굴은 화색이 되었다. 제프리가 듣기에도 경완이 눈앞의 두 여자와 즐겁게 놀 수 있도록 명분을 깔아주고 있다는 걸 바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와! 그래요?”
경완의 말에 두 여자의 눈이 반짝였다. 그저 외국에서 놀러 온 잘생긴 한량인 줄 알았는데 버젓이 직업이 있는 사회인이지 않은가?
“그러니 방해하지 말로 이 친구랑 절로 가서 노세요.”
경완이 손을 내저으며 축객령을 내리자 두 여자는 까르르 웃으며 제프리의 팔목을 잡고 저쪽으로 향했다. 개방적인 옷차림만큼이나 개방적인 처자들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개방적이려고 놀러 오는 것이 워터파크 아니겠는가?
그렇게 경완은 젊은 친구에게 인생을 즐기도록 놔두고 본인은 비치벤치에 드러누워 한가로운 오후를 보냈다.
그러던 그는 마스크 속의 입술을 비틀었다. 누군가 이 한가롭고 평화로운 시간에 재를 뿌리러 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인이어를 누르며 경호를 담당하는 켈리에게 연락했다.
[습격이다.]
[……무슨 습격이지?]
습격이 일어났다면 켈리 쪽에서 모를 리 없었다. 그는 한영미의 지척에서 경호 중이었으니까.
하지만 보이지 않는 습격이라면 말이 다르다.
[마인드 브레이커.]
보이지 않는 초능력의 끈, 정신계 능력자의 능력 사용 통로인 패스를 이용한 습격이었다.
하지만 켈리는 걱정하지 않았다.
[부탁하지.]
경완에게 말하는 그의 음성에는 짙은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혹시나 해서 경완을 붙인 상부의 현명함에 감탄했다.
전미 초능력 협회가 그 많은 히어로들과 뛰어난 요원들을 다 놔두고 굳이 한국 정부와 미국 당국을 통해서 경완에게 경호를 요청한 이유. 그건 바로 그가 마인드 브레이커의 능력을 파훼한 유일한 초능력자였기 때문이었다.
[알았다.]
경완은 곧장 대답하고는 허공을 흐물거리며 날아오는 촉수를 향해 S입자를 뿌렸다.
그물처럼 뿌려진 S입자는 촉수의 접근을 느리게 만드는 동시에 촉수가 어디에서 날아왔는지도 알려주었다.
경완은 수영복 차림으로 펄쩍 뛰어 워터파크의 담장을 뛰어넘었다.
[파크 내에서 초능력을 쓰시면 안 됩니다!]
안전요원이 주의를 주며 달려왔지만 뭐 켈리가 알아서 조용히 시켜주겠지.
그렇게 생각한 경완은 주차장에서 라틴 계열의 남자를 발견했다. 놈은 랜터카의 운전석에 앉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경완이 다가오는 줄 전혀 모르는 걸 보니까 이 태평양 건너편까지 세뇌 능력을 사용하려는 상황이라 꽤나 여유가 없는 모양이었다.
경완은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경험이 많은 그로서는 한국까지 손을 뻗은 저 집요한 새끼가 이 헛짓거리를 이번 한 번으로 끝낼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놈과 자신이 조우하는 것도 이번에 끝이 아닐 것 같다는 느낌도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드니 굉장히 X같았다. 좋은 사람 만나기도 힘든 이 세상에 저 X같은 새끼랑 자꾸 얽혀야 한단 말인가?
생각은 길었고 결단은 짧았다.
경완은 허공에서 해파리 촉수처럼 하늘거리는 투명한 끈을 S입자를 씌운 손으로 잡고 그대로 자신의 머리에 가져다 댔다.
새삼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가리?’의 지장보살급 희생정신을 발휘해서가 아니라, 저번에 자다가 본의 아니게 세뇌 능력 빌런을 구제(驅除)해버린 사건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마인드 브레이커라는 이 새끼가 자신의 정신 깊숙한 곳과 접촉하고서도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이래서 초능력이 참 편리하면서도 위험하다는 것이다. 자칫 이렇게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으니까.
투명한 끈이 경완의 머리로 들어가기 직전, 그는 문득 놈에게 지배당해있는 사람들의 존재가 생각이 났다.
교도소에 침입했던 세뇌능력자의 경우에도 경완을 세뇌하려다가 실패한 여파가 놈에게 당한 이들에게도 미쳤는데 이번에도 그러지 않겠냐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문제는 그 수가 얼마가 되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경완은 결국 그대로 직진하기로 했다. 에라이 모르겠다. 원래 삶이란 운빨좆망겜이었고 벼락 맞을 놈과 얽혀서 같이 벼락 맞는 건 세상 흔한 불합리함이었다.
모 국회의원도 말하지 않았는가? 인생의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해야지 방법이 없다고 말이다.
좆같다고? 그 좆같음이 경완의 몫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했다.
그는 촉수에 머리를 가져다 대며 과거의 기억을 잔뜩 떠올렸다. 단순히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뇌의 의식적인 정보처리 능력은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무의식의 영역에 도움을 받는 편이 확실했다.
그는 반쯤 명상에 잠겨서 과거를 회상했다. 그에게 그것은 희로애락이 얽힌 과거의 기억이었지만 타인에게 그 방대한 정보량은 감당하기 힘든 기억의 폭풍이었다.
사랑, 증오, 쾌락, 기쁨, 슬픔, 보람, 허무.
그 방대함으로 한데 얽혀 뭉개져 버린 개념의 덩어리는 100년도 못 산 인간의 자아를 뭉개기엔 충분했다. 경완이 조절한 것도 아니고 작정하고 엿 먹어보라고 강제로 패스를 유지하며 밀어 넣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흐웨에에엑!”
눈앞의 있는 라틴계 남자부터 눈을 까뒤집으며 거품을 물고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투명한 촉수가 마치 포식자에게 위협받은 말미잘마냥 수축했다. 하지만 경완은 쉽게 벗어나게 두지 않았다.
S입자로 이루어진 손이 투명한 끈을 붙잡고 늘어졌다. 경완은 아예 그 투명한 끈을 자신의 머리에 돌돌 감았다.
그러길 잠시 투명한 끈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미국의 정신병원에서 조우했던 놈의 목소리 같았다.
[끄아아아아아!]
비명이 끝나자 투명한 끈이 마치 먼지처럼 흩어졌다. 그 비명에 경완은 이것으로 저 새끼와 더 이상 얽히지 않을 거라고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 예감이 틀리진 않았는지 마지막 날까지 별다른 일 없이 임시 경호원 업무도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무한전생-더 빌런 15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