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인간의 탈을 쓴 카미사마
폭발과 함께 지붕이 무너졌던 후쿠시마 원전 안에서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천천히 떠올랐다.
핵연료와 원전의 금속구조물과 지각 성분이 핵연료의 열로 녹아 엉겨붙은 그것은 붕괴한 원전 구조물을 밀어 올리며 지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핵분열의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 그것의 주변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 방사성 바윗덩이는 둥실둥실 흐르듯 움직이며 미리 준비된 커다란 봉인 컨테이너 안에 떨어졌다.
기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맑았던 후쿠시마 하늘이 마치 황사를 맞이한 듯 뿌예졌다. 방사성 물질이 달라붙은 입자들이 일제히 스마트 포스필드에 의해 밀려올라간 것이다.
하지만 뿌예진 하늘은 오래가지 않았다. 포스필드에 의해서 이동한 입자들은 이내 방사성 폐기물 전용 용기에 수북이 쌓였다.
현장을 관찰하던 이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량의 입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면서 만들어낸 공기와의 마찰은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는 거대한 고기압을 만들어냈고, 응축된 고기압은 마치 허리케인을 연상시키는 용오름을 형성했다.
그 용오름은 방사능 먼지를 한껏 공중으로 빨아올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아래쪽 원전 크기보다 더 큰 흙먼지의 산을 수북하게 쌓았으니, 그것 전부가 방사성 물질이 들러붙은 입자들이었다.
구경하는 모두가 경외감을 느낄 정도의 능력을 사용한 지 약 한 시간쯤 뒤, 경완은 눈을 뜨고 조종석에서 내려왔다.
“끝났어요?”
“아니요. 좀 쉬었다가 다시 하려고요.”
마리아의 말에 경완이 대답했다. 방사능 물질이 워낙 넓은 곳에 퍼졌고, 또 흙 알갱이와 방사성 물질이 흡착된 상태라 양이 많아 걸리는 부하가 꽤나 컸다.
연신 스고이를 외치는 일본인들을 멀리하고 소파에 앉은 경완에게 마츠키가 조르르 다가와 종달새 같은 목소리로 쫑알거렸다.
“피곤하시죠? 어깨라도 주물러 드릴까요?”
“그보다는 안마 의자가 더 좋을 것 같아요.”
경완은 마침 말이 나온 김에 이번에 돌아가면 안마의자 하나 좋은 거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츠키는 그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다음 쉬는 시간에는 준비되도록 하겠어요.”
어유. 그냥 해본 소리에 너무 진지하게 반응하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경완은 그런 티를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야 좋죠.”
그렇게 대꾸하는 그를 더욱 만족스럽게 하는 것은 그녀의 서비스 정신이었다.
그가 보인 이적에 그에게 한마디라도 걸어보고 싶은 일본인들이 다가오자 서둘러 먼저 그들에게 가서는 지금 그는 무척 지친 상태이니 쉬어야 한다며 그들의 접근을 막은 것이다.
그들은 아쉬워하면서도 그녀의 말을 듣고 뒤로 물러섰다. 솔직히 그들의 생각으로도 경완이 보인 이적은 분명 중간에 쉬어줘야 말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기적을 보이면서 전혀 피곤해하지 않는다? 그거 카미사마인가?
그렇게 경완이 잠시 소파에 드러누워 눈까지 감는데 마츠키가 막을 수 없는 사람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커흠! 커흠!”
그는 경완에게 말 한 마디라도 걸어보고자 헛기침을 하며 인기척을 냈지만 경완은 가늘게 눈을 뜨고 슬쩍 그를 올려다본 다음 다시 눈을 감았다.
우주 아이돌이 방문해도 심드렁할 그인데, 머리 반쯤 벗겨진 늙은 사내가 반가울 리 없었다.
“…….”
중년의 일본의원은 무안해져 표정이 굳어버렸고 그의 보좌관으로 보이는 사내가 급히 다가와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뭐라고뭐라고 말했다.
다행히 보좌관의 필사적인 설득에 마음에 풀렸는지 일본의원은 마츠키에게 뭐라뭐라 하면서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경완에게 등을 돌린 그 순간이 경완이 귀신처럼 상체를 일으킨 순간이었다.
그런 경완을 본 보좌관의 눈이 크게 떠졌지만 자신이 모시는 의원님에게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난 경완이 일본의원의 정수리 머리칼을 쥐고는 오금을 밟았다.
“아악!”
이름 모를 의원의 입에선 당연히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 돌발상황에 놀란 마츠키가 경완을 불렀다.
“이 상!”
“마츠키 씨, 약속한 거 하나 있죠? 이런 새끼가 근처에 날파리처럼 윙윙거리지 않는 거요.”
경완은 말문이 막힌 마츠키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원의 턱을 잡고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마츠키 씨, 제 말 통역해 주세요.”
“그, 그럼 놓아주시는 거죠?”
“제 말을 확실히 이해한다면요.”
경완은 의원에게 경고했다.
“내가 바다 건너온 게 너 같은 놈 잘되라고 온 줄 알아? 어디서 숟가락 올리려고 지랄이야, 지랄이? 응? 두피 뜯어지도록 머리털 다 뽑혀봐야 정신을 차릴래?”
아무리 사면을 받았다지만 눈앞에서 으르렁거리는 위험도 S급의 빌런에 의원의 사타구니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마츠키는 서둘러 그의 말을 통역했고 경완의 경고를 들은 그 의원은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탈모는 유전이라 피할 수 없다지만 그렇기에 소중한 머리칼을 사수해야 했다.
“꺼져.”
경완이 머리칼을 놓아주자 일본의원은 겁에 질린 짐승처럼 후다닥 도망갔다.
경완이 도로 소파에 앉으며 조심스럽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마츠키에게 말했다.
“일본에도 말로 하면 못 알아 처먹는 인간들이 많은가 봐요?”
그 말에 마츠키는 어색하게 웃었다. 솔직히 한국 못지않게 일본에도 함양미달의 의원과 고위직 공무원이 적지 않았다.
그녀가 대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마츠키 씨가 사과할 이유는 없어요. 한 번 혼났으니 또 저러는 인간이 있진 않겠죠.”
혹시나 모르지만 진짜 또 그러는 인간이 있다면 머리가 장식임이 틀림없으니 두개골 안에 뇌 대신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해서라도 직접 뚝배기를 쪼개줄 용의가 있었다.
마츠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머리칼을 잡는 건 조금 심한 거 아닐까요?”
그녀가 보기에도 방금의 일본의원은 머리숱이 그리 풍성하지 않았다.
그러자 경완이 상쾌하게 웃었다.
“사람이 마냥 친절하게 굴면 호구 취급하는 인간들이 있거든요. 그런 인간들은 처맞아야 정신을 차려요.”
“아.”
마츠키는 이해가 된다는 듯이 표정을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튼 충분히 쉬었으니 다시 일해 보죠.”
“부탁합니다.”
마츠키가 허리를 숙이자 경완은 손을 저어보이며 다시 스마트 포스필드 장치로 향했다.
그의 후쿠시마 제염 작업은 약 사흘 만에 종료되었다.
* * *
일본은 공식성명을 통해 후쿠시마 재난이 종료되었음을 공표했다.
유출된 방사성 물질의 제염작업을 완벽히 끝냈으며 이를 검증하기 위해 국제원자력 기구의 검증도 기껍게 받겠다는 것이다.
‘그럼 그동안 후쿠시마는 괜찮다, 후쿠시마 농산물을 안전하다고 지랄을 떨었던 건 뭐냐?’
그런 의문을 제시하는 이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냄새나는 건 그냥 덮고 넘어가는 것이 일본 특유의 문화가 아니겠는가?
물론 다 끝난 건 아니고 일본 전국 각지에 보관해 놓은 방사능 오염토가 있기는 하지만 좁은 곳에 쌓여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사온 스마트 포스필드 장비와 일본의 초능력자로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로 답이 없을 정도로 넓게 오염된 지역에 비하면 다른 지역에 보관해 놓은 방사능 오염토는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그렇게 일본 전역이 거대한 축제라도 벌어진 듯 흥겨운 분위기에 젖어갈 때 경완은 느긋하게 온천욕을 즐기고 있었다.
이렇게나 신속한 후쿠시마 방사능 완전 제염을 이룩한 주역이지만 스포트라이트가 그를 비추지 않은 이유는 그를 찾아간 일본의원이 당한 망신이 이미 일본 고위 관계자들에게 퍼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실무적으로는 그다지 믿음직하지 못하지만 정략적으로는 매우 유능한 그들이 그것이 경완의 경고임을 모를 리 없었다.
비록 자신들이 후쿠시마 부활에 커다란 숟가락을 얹지 못한 것은 불안요소라지만 다행히 그 주역의 존재감을 감추는 건 본인조차 원하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고로 지금 일본 전역의 축제 분위기는 밝은 미래를 부각하여 공을 세운 이를 일본 국민의 머릿속에서 최대한 지우려는 일본 고위 관계자들의 피땀 어린 노력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상, 들어가도 괜찮은가요?”
“음? 여기 남녀 혼욕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혼욕이라는데 들어오지 말라고 할 순 없었다. 이 온천을 전세 낸 기억은 없었으니까.
이는 굳이 자기 입으로 전세 내고 싶다고 말할 필요가 없었던 탓이다. 경완의 존재를 감추고 싶은 일본 정부가 알아서 사람을 물렸으니까.
하지만 정부 소속인 마츠키가 이렇게 대놓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그녀는 새하얀 타월로 새하얀 알몸을 가린 채 온천에 몸을 담갔다. 발그래진 안색이 부끄러움 때문인지 뜨거운 온천 때문인지 남이 봐선 알 도리가 없었다.
“으어어. 좋다.”
경완은 한 꺼풀만 벗기면 나신이 될 미모의 여성을 앞에 두고도 태연하게 온천의 뜨끈함을 즐겼다.
마츠키는 그런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등 밀어 드릴까요?”
타월 한 장으로 몸을 가린 일본 미녀가 등을 밀어준다고?
어디 AV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에 불끈할 만도 했지만 경완은 고개를 저었다.
“길쭉한 이태리 타월 없어요?”
“이…… 태리 타월요?”
“그거 하나면 혼자서도 거뜬히 등을 밀 수 있거든요.”
경완의 말에 마츠키는 뭔가 불만인지 귀엽게 입술을 오므리며 내밀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경완 씨는 어떤 여자가 좋아요?”
“엄청나게 예쁜 여자요.”
“…….”
엄청난 답변에 마츠키는 일순 말을 잃었지만 그래도 꿋꿋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보기보다 강단이 있는 여성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 있어요?”
“아니요.”
경완은 고개를 저었다. 전생이라면 있지만 현생에선 마츠키가 말하는 식의 좋아함은 느껴본 적 없었다. 아니, 그가 의식적으로 그런 감정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왜요?”
이유를 믿는 마츠키의 말에 경완은 잠시 머릿속으로 말을 정리했다. 그리고 최대한 솔직하게, 그리고 상대방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했다.
“약점을 잡히기 싫어서요.”
“약점이요?”
“마츠키 씨도 알다시피, 저를 노리는 곳이 많잖아요?”
이경완이라면 이를 가는 중국부터 시작해서 그를 탐내는 여러 국가들.
경완에게 만약 사랑이라는 약점이 생긴다면 그 순간부터 피곤해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여러 귀찮은 신경전은 물론이고 때때로는 실력행사도 나서야 하리라..
그마저 여의치 않으면 그 지랄 맞은 성질을 억지로 죽여야 하지만 그것이 그의 성미로 쉬운 일이겠는가?
100%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사랑을 주저하지 않겠지만 세상에 100%는 없었다. 그는 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사랑은 영원하지도 않았다. 언젠가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것이다. 굳이 죽음이 아니라도, 감정이 식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 그의 설명에 마츠키의 눈에는 아쉬움이 서렸다. 그가 하는 말이 자신의 어필에 대한 거절임을 그녀가 어떻게 모르랴?
“경완 씨는 정말 좋은 남자네요?”
“어디가요?”
“그냥 먹고 버려도 될 텐데…….”
“……우리가 금전을 매개로 그렇고 그런 짓을 하는 관계라면 깔끔하게 끝낼 수 있지만 그게 아니잖아요.”
경완의 대답에 마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방금 막 어필녀와 거절남의 관계가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어색함이 불편했던 마츠키는 결국 먼저 온천을 나가기로 했다.
“저는 먼저 가볼게요.”
“그러세요.”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고 마츠키가 일어나려는 순간 사건이 일어났다.
쿠우웅!
둔중한 충격음과 함께 온천에서 보이는 맞은편 산중턱에서 황색의 먼지가 피어올랐다. 나무도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경완은 그 즉시 초감각을 펼쳤다. 저 멀리 펼쳐진 초감각에 낯선 누군가가 초음속으로 거의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바로 경완이 있는 온천으로 말이다.
무한전생-더 빌런 16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