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스캔들
국정원장의 말에 모두 침묵을 지켰다.
솔직히 국정원장의 말은 틀렸다. 이경완이 사면받은 건 딱히 기밀도 아니었다. 진짜 그가 사면받은 걸 기밀로 하고 싶으면 청와대부터 사법부까지, 사면을 허락하는 그 넓은 범위에서부터 협조를 받아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까? 얽힌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설사 협조를 받는다손 쳐도 분명 어딘가에서 정보가 새어나갈 것이다.
애당초 경완에게 자유를 빌미로 딜을 걸려고 했으면 사면이 아니라 가택연금 수준으로 그쳐야 했지 않았을까?
하지만 조직 생활에선 1+1은 3이라는 상사의 개소리에 때론 침묵을 지켜야 하는 상황도 있는 법이다. 특히 저렇게 성질을 부리는 상사 앞에서라면 말이다.
잠시 언성을 높였다가 심호흡을 한 국정원장이 차장들에게 해결책을 요구했다.
“방법은요? 있습니까?”
“…….”
그 말에 서로 눈치를 보는 차장들이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이경완이 사면받은 사실을 감추는 건 불가능했다. 국정원장이 바라는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그런 분위기를 읽었는지 국정원장은 한숨을 내쉬더니 한발 물러섰다.
“그럼 현상황에서 최선은 뭡니까?”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힐 때까지 버티는,”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채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면박을 당하자 다시 잠시 침묵이 돌았다가 대답을 요구하는 국정원장의 눈빛 압박에 다른 방안도 나왔다.
“다른 사건으로 덮는 건 어떻습니까?”
“……쓸만한 소스는 있습니까?”
“마약 한 유명 연예인이 있는데,”
“이미연은 유명 연예인 아닙니까? 아니면 그 연예인이 이미연급이라도 된대요?”
국정원장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싸늘해졌다. 이미연-이경완 스캔들은 연예인이 얽힌 연예가 이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연예인 마약 스캔들? 대중들에게 그게 먹혀들까? 더구나 이미연급도 아닌데?
“그럼 구 북한땅에서 일어난 빌런 사건은 어떻습니까?”
“허! 직전에 트위스터 사건이 있었던 건 기억 안 납니까?”
이미연-이경완 스캔들 직전에 터진 것이 트위스터-선더보이 교전 사건이었다. 그런데 또 빌런 사건을 들고온다? 그것도 빌런과 히어로가 대결하는 구도의 사건이 아닌데 이경완 사면 논란을 덮을 수 있을까?
아직 국정원장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북한땅이요? 안정되어 있다고 광고해도 부족할 판에 그게 지금 할 소립니까?!”
북한을 흡수한 남한의 경제가 여태 망가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이유는 딱 하나뿐이었다.
돈지랄.
막대한 외국의 차관과 시베리아 철도가 연결된 동아시아 경제권에 매력을 느낀 외국의 큰손들 덕분에 빠르게 북한을 안정시키고 개발을 진행하고 있었다.
투자자분들에게 우리 이렇게 열심히, 아무런 문제 없이 일하고 있다고 광고해도 부족할 판에 북한 땅에 빌런이 날뛴다고 불안감을 조성해? 청와대에서 국정원장 자신에게 뭐라고 말하겠는가?
그런 국정원장의 역성에 차장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결국 마지막 카드를 내밀었다.
“저번 선거에서 불법 비자금을 선거 자금으로 받은 정치인이 있습니다.”
원래 정재계에서 사건이 터지면 시선을 돌리는 용으로 사용하는 것들이 연예계 이슈나 범죄 이슈였다.
유명 연예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말할 것도 없지만, 식인이니 토막살인이니 하는 사람들을 자극하는 범죄는 유명 연예인 못지않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근래에 범죄 이슈를 연막용으로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괜히 치안 불안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본질적으로 범죄 이슈는 키핑이 어려워 필요한 순간에 터뜨리기 힘들기도 했다.
반면에 연예계 이슈는 킵해놔도 상대적으로 약발이 오래갔다.
정재계에서 뭔가 사건이 터졌다 하면 연예인 스캔들이 터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
생각에 감기는 국정원장을 보며 3차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 소스가 정확히 뭔지 보여주세요.”
3차장은 서둘러 서류를 챙겨왔고 서류를 확인한 국정원장은 싸늘한 표정으로 결단을 내렸다.
“진행해요.”
“네!”
국내 파트 3차장의 입에서 빠릿빠릿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 * *
[천억대 대기업 비자금, 지난 대선에 야당으로 흘러들어 간 정황 포착!]
[비자금을 제공한 모 대기업의 정체는?]
탕!
각종 포털 헤드라인이 올라온 뉴스를 확인한 정 회장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책상을 내리쳤다. 저 천억 원대의 비자금에 자신이 지출한 금액이 적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그는 자신의 지낭이자 지저분한 일을 마다치 않은 김 실장을 불렀다.
회장실에 불려 간 김 실장은 정중히 허리를 숙이더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여당이 미쳤나 보군. 불법선거자금을 야당만 받았나?”
재벌이 비자금을 쌓아두는 이유는 그저 정계에 상납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본인들을 위해서지.
그런데 정치권에 그 알토란 같은 비자금을 주는 이유는? 안 주면 지랄하니까.
김 실장이 대꾸했다.
“그래도 여당이 야당보다 덜 양아치스럽게 뜯어간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돈에 미쳐서 차떼기로 돈 받는 새끼들이랑, 그래도 어느 정도 염치는 있어서 어떻게든 체면치레하려는 놈들이 다르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김 실장은 상대적으로 여당이 피해를 덜 입는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야당 불법 대선자금을 여당 불법 대선자금으로 물타기를 하려고 해봤자 별로 실익이 없다는 점을 자신이 모시는 회장님에게 미리 말한 것이다.
둘 다 돈을 받았다면 누가 돈을 받았는지 검찰이 캐내려 달려들 테고, 그걸 막으려면 얼마나 돈이 들지 당장에 가늠이 어려웠다. 검찰도 어지간히 돈 밝히는 집단이었으니까.
정 회장 입장에선 자기 사업에 큰 도움이 안 된다는 점에서 그놈이 그놈이었다.
정 회장이 물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하는 점은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이 그저 우연이냐, 아니면 뭔가 의도가 있느냐였다.
그리고 김 실장은 후자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얼마 전 이미연 스캔들이 터진 걸 기억하십니까?”
“그래.”
정 회장은 입맛을 다셨다. 재벌이라도 남자였다. 탐나는 여인에게 임자가 있다면 괜히 섭섭하고 제 여자도 아닌데 실망스러운 마음이 드는 건 당연했다.
이미연 스캔들을 다시 떠올려 보던 정 회장은 이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설마 이경완 그 새끼 때문에? 그 새끼 사면받은 거 가리려고?”
“정황상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아니, 그러려면 다른 것도 많지 않나? 왜 하필 이미 끝난 걸 다시 들추냔 말이야.”
김 실장은 즉시 대답했다.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빨리 알아보고 대책 수립해.”
“네!”
유능한 김 실장은 신속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역시 대기업이라 그런지 국정원이 미처 모르는 내용까지 파악했다.
“그러니까 애당초 이경완 사면 스캔들을 일으킨 게 디디 그룹의 김민식 회장이다? 그 새끼 그거 지 주인 잡아먹은 놈 아냐?”
김 실장의 보고에 의하면, 원래 이경완 사면 사실을 언론에 흘리고 이를 스캔들로 부각되도록 바람을 불어넣은 것이 디디 그룹 김민식 회장이었다.
디디 그룹의 전신은 태광실업으로, 검사 살해 사주를 하고 해외로 도주하려던 오태광을 그의 비서로 있던 김민식이 수사기관에 팔아먹고 회사를 빼앗은 후, 디디 그룹으로 개명한 것은 재계에선 유명한 이야기였다.
정 회장은 미간을 좁혔다. 김 실장이 괜히 김민식 회장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놈하고 국정원이랑 끈이 있어?”
“3차장과 안면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둘이 안면이 있지?”
“오태광 회장을 팔아먹을 때 연이 생긴 모양입니다.”
정 회장은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리다 입을 열었다.
“둘이 짠 건가? 목적은?”
“아마 저번 정권에 입지가 많이 약해진 국정원 국내 파트를 다시 부활시킬 모양입니다.”
정권의 입맛대로 민간인 사찰을 벌이다가 걸린 국정원은 그다음에 정권 교체가 되자 철퇴를 맞았다. 민간인 사찰을 주도하던 국내 파트의 입지가 많이 낮아진 것이다.
“그래서? 야당을 때려서 청와대의 비위를 맞춰주겠다? 미친 모양이군.”
누구한테 폐를 끼치는지도 가늠이 안 되나?
김 실장이 맞장구를 치며 정 회장의 말을 받았다.
“원래 공무원들은 기업을 만만하게 보는 관습이 있잖습니까?”
“흐음…… 그렇기는 하지.”
뭔 헛소린가 싶지만 원래 그랬다. 본디 경제란 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으며, 대한민국 굴지의 기업들은 대부분 산업발전 시기, 독재정권과 짝짜쿵으로 막대한 자본을 쌓아 사업을 해온 것이 사실이었다.
공장을 점거한 파업 노동자들을 쫓아내기 위한 용역 깡패. 예전에는 그 일을 정부가 대신해 준 것이 사실이었다.
그 이름 하야 백골단. 사람 여럿 죽이거나 병신도 만들었지만 책임진 사람이 있다는 말은 어떤 언론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이렇듯 정부가 보호해 주고 아껴주니 기업의 입장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감사를 표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무래도 기업이 을의 입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시대가 변해 재벌 공화국이라는 소리를 듣는다지만 공권력이 작정하고 조지면 안 아픈 기업이 없었다.
검찰 장학생, 판사 장학생, 법무팀 영접에 정치인 정치자금 지원 등등. 이 모든 짓은 재벌과 기업의 입장에선 어떻게든 피해 안 보고 살아남기 위한 발악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더구나 정준호 회장에게 김 실장의 말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양승태라는 인간에게 한 번 데여봤기 때문이었다.
신용도 없는 철면피 새끼들.
“아무튼, 방법은? 선거자금 이슈가 우리에게 오기 전에.”
“다른 이슈로 덮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리스크 관리가 가능하다면 여당도 같이 털어서 일을 키우고, 그사이에 정 회장만 빠지는 방법도 있겠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게 어려웠다.
일단 정권을 쥔 쪽은 여당이라는 점, 그리고 야당에 준 불법 선거자금 중 가장 많은 금액을 준 이가 바로 정 회장이라는 점에서 양비론으로 물타기를 하고 빠져나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일이 혼란해지면 정 회장이 튀어나온 못으로 보일 테니 가장 먼저 망치를 맞을 테니까.
김 실장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서충헌 3차장을 만날 필요가 있습니다.”
“왜?”
정 회장이 미간을 좁혔다. 사실상 사태의 원흉이지 않은가?
“그의 의도가 단순히 조직 내 본인의 입지를 높이기 위한 것이지 딱히 회장님께 폐를 끼치려는 것은 아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김 실장이 말하는 요지는 이랬다. 굳이 지금 당장 피아 구분을 해서 불필요하게 적을 만들어야 할까? 그 3차장이라고 하는 인간은 자신이 저지른 일의 여파가 어디까지인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일 수도 있는데?
원래 욕심에 눈이 먼 인간은 그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이었다.
“아마 생각이 있는 자라면 회장님이 손을 내밀면 외면하지 못할 겁니다.”
이 말도 맞는 말이었다. 국내 파트의 부활을 원한다면 재벌의 협력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본인이 모를 리 없겠지.
정 회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김 실장의 방안은 승낙했다.
“자리를 한 번 마련해 보게.”
“알겠습니다, 회장님.”
김 실장은 정중히 허리를 숙이고 회장실을 나왔다.
* * *
“오빠.”
“…….”
“오빠~.”
“…….”
“오빠오빠오빠오빠…….”
“아! 시끄러! 왜?”
포기를 모르는 미연의 집요한 부름에 경완은 결국 PAUSE 버튼을 누르고 고개를 돌렸다.
미연이 그의 휴대폰을 손에 들고 있었다.
무한전생-더 빌런 17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