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스캔들
“오빠 왜 휴대폰에 잠금이 없어?”
“귀찮아서.”
“이러면 개인정보 유출되잖아?”
“잠금해 놓는다고 유출 안 되지도 않잖아.”
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개인정보 유출이 되어도 책임지는 놈 하나 없는 세상이었다. 요즘에는 유심까지 해킹·복제해서 돈을 빼간다던데 통신사에서는 모르쇠로 일관한다며?
하지만 어차피 경완은 자기 개인정보가 유출되어도 별로 곤란할 것도 없는 인간이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도 없었고, 누군가 자신의 개인정보를 악용한다면 뚝배기를 깨주면 그만이었다.
“음……. 그렇구나.”
미연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휴대폰을 있던 자리에 놓아두고는 짐을 챙겼다.
“오빠. 그럼, 나 간다.”
“그래, 잘 가라.”
“오빠는 할 말이 그것뿐이야?”
“스케줄 알아서 잘 조정한다며?”
경완은 미연이 집에 드나들기 시작했을 때 탑스타는 안 바쁘냐고 얼른 가라고 종용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그녀가 대답하길, 바쁜 시기와 쉬는 시기가 따로 있고 지금은 쉬는 시기라나? 어차피 좀 있으면 얼굴 보기 힘들 테니 지금 많이 봐두라는 그녀의 대꾸에 경완은 잠시 참기로 했다.
그러면 스캔들도 끝나 있겠지.
평범한 일반인에게 스캔들은 매우 힘든 고역이겠지만 그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가 사회생활을 하기를 하나, 기자들이 이미연과의 스캔들을 캐물으려 파리처럼 달려들기를 하나?
감히 경완을 귀찮게 할 간 큰 기자들이 있을 리 없었고, 그 정도 간땡이가 있는 기자가 고작 연예인 스캔들 따위를 취재하겠다고 달려들 리도 없었다.
그저 힘든 건 이미연 본인뿐이었지만, 어쩌겠나? 본인이 자처해서 뿌린 씨앗인데.
그렇게 끈덕지게 경완에게 들러붙고, 포기 안 하고, 끝내 외간 남정네 집을 드나들면서 스캔들이 터질지 몰랐다고 말하면 둘 중 하나였다.
멍청하거나 염치가 없거나.
물론 미연은 둘 중 어느 것에도 해당이 안 됐지만 말이다.
“암튼, 내가 매일 오기 힘드니까, 반찬 해서 대표님을 통해 보낼게. 밥만 해서 먹거나 햇반 먹어.”
참으로 지극정성이었지만 경완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가라고 손을 휘휘 저었다.
미연이 섬세한 성격이었다면 상처받았을지도 모를 정도로 무심한 태도였지만 그 정도로 상처받기엔 더 냉정한 세상 풍파에 단련된 그녀였다.
그녀가 나간 후, 홀로 집에 남은 경완은 게임 등의 시간 죽이기에 몰두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몰두하면 밥때를 잊게 마련이지만, 그는 아니었다.
밥을 잘 안 먹거나 규칙적으로 식사하지 못하면 건강이 나빠지고, 건강이 나빠지면 편안히 게임 등의 여가 생활을 즐기지 못한다는 논리로, 무려 밥때에 맞춰 알람을 맞춰놓고 게임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알람이 울리면 밥을 먹고 다시 한량처럼 시간을 보냈다.
물론 그가 바쁠 때도 있기는 했다. 황사 시기라든지, 아니면 미국의 의뢰 같은 것을 받아서 한 번씩 진실의 스무고개를 하러 갈 때라든지.
하지만 황사 방어 몇 번으로 대기업 연봉 우스울 정도의 돈을 벌어두고, 또 교소도 밖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자유까지 얻은 그에겐 점점 그것도 뜸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후쿠시마 방사능 제거로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사례금 100억 엔까지. 물론 그중 절반은 부동산이지만 지금 경완은 돈이 전혀 아쉽지 않았으니, 딱히 일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오죽하면 보건부 차관이 방문해서 제발 황사 방어 스마트 포스필드 사용일정을 늘려 달라고 애원할 정도일까?
경완의 게으름에 애가 타는 건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미국에 오는 것도 귀찮아하는 기색을 보이자 오죽하면 중요한 범죄자를 한국으로 보내서 진실의 스무고개를 받게 하자는 안건이 나올 정도일까?
게다가 이런 정기적인 업무(?) 외에, 최근 후쿠시마에 그랬던 것처럼 정부로부터 체르노빌 방사능 처리에 관한 걸 타진 받고 있니,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고, 유니크한 능력을 가진 인간에겐 일거리가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즉, 경완이 이제 경제적으로 곤란할 지경에 이르는 것은 노숙자가 로또 맞고 좋아서 날뛰다가 벼락 맞을 확률과 맞먹을 정도였으니, 역시 초능력이 대세가 된 시대다웠다.
초능력이 사회에 별로 도움이 안 됐다면 강력한 초능력을 가진 경완은 그저 잠재적 위험분자에 불과했을 텐데 말이다.
미연이 일하러 나간 지 3일쯤 되었을 때, JB엔터의 대표인 김길상이 양손을 두둑이 하고 방문했다.
“오랜만입니다.”
“무슨 일이세요?”
“미연이가 이걸 가져다주라고 해서요.”
경완이 김길상이 내민 것을 살펴보니 반찬이 담겨 있는 반찬통이었다. 미연이 해서 보낸 거였다.
경완이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면서 김 대표에게 말했다.
“이런 일은 매니저 시키지 그랬어요.”
한 회사 대표나 되는 사람이 이런 잔심부름을 해서야 쓰겠는가?
어찌 보면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꼰대적 생각이었지만 경완이 한 회사의 대표가 되면 이런 잔심부름을 웬만해선 하지 않을 것이기에 충분히 할 만한 말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입장대로 사고(思考)하게 마련이니까.
그런 경완의 말에 김 대표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연예인이 일할 땐 담당 연예인에게 붙어 있어야죠.”
맞는 말이라 경완은 딱히 대꾸하지 못했다. 그저 방금의 발언으로 김 대표가 정신머리가 어느 정도 박혀 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했을 뿐이다.
하긴 미연이 호구라고 표현할 정도니 아랫사람을 사노비 부리듯 하진 않을 것이다.
경완은 일단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그런 말씀은 미연이에게 하시지…….”
말꼬리를 흐리는 그를 보며 경완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그러면서 말꼬리를 흐리며 현관문 쪽을 보는 것이 아닌가? 볼일이 끝났으면 얼른 가라는 무언의 축객령이었다.
하지만 김 대표는 뭔가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미연이를 잘 봐주십시오.”
그 말에 경완은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귀가 잘못된 줄 알았고, 자신의 귀가 멀쩡하다는 확신을 얻은 후에는 김 대표의 머리가 잘못된 줄 알았다.
“혹시 어디 아프세요?”
“제가요?”
경완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 대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경완은 그런 그의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 말을 이었다.
“도시락 싸들고 말려야 하는 거 아니냐 이 말입니다.”
그제야 경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게 된 김 대표는 허탈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말린다고 말을 듣는 애였으면 진즉에 말렸죠.”
“그렇다고 애가 이상한 짓을 하면 말려야 하는 게 소속사 사장의 역할 아닙니까?”
경완이 그렇게 말하자 김 대표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보아하니 경완이 과거에 그리 칭찬받지 못할 짓을 했다는 걸 본인도 잘 알고 있는 게 이상한 모양이었다. 안 그래 보이는 사람이 양심이 있는 말을 하니 김 대표에겐 신기한 모양이었다.
“당신이 대중적으로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거,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연이가 좋다고 하는데 제가 어쩔 수 있습니까?”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죠.”
경완의 말에 김 대표는 이상하게 열이 받았다. 미연이가 해놓은 반찬을 손수 배달까지 해준 입장에서 그녀의 지극정성에도 전혀 기뻐하지 않는 경완의 태도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니, 우리 미연이가 어디가 모자라서? 돈 잘 벌지, 성격 시원하지, 예쁘기까지 하지.
“미연이 같은 애가 좋다고 달라붙으면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나 같은 놈을 좋다고 하는 게 이해가 안 되잖아요. 좋은 남자가 주변에 수두룩할 텐데.”
“도대체 미연이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 겁니까?”
“걔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가 있다는 거죠.”
경완은 다소 솔직하게 말했다. 그도 양심(?)이 있는 사람인데 좋은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쯤이야 있지 않겠는가?
사랑하니 보내주겠다 같은 쌍팔년도 감성 따위는 아니었다. 그런 감성은 서로의 사랑이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지 못했을 경우에나 해당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경완의 능력이 모자랄 리가 있나? 그의 능력은 이미 자타공인이었다.
설명하자면, 미연에 대한 경완의 감정은 사랑이나 호감보다는 측은함에 가까웠다. 어쩌다가 자신 같은 인간을 좋아하게 되어서 이 개고생을 한단 말인가?
그런 그를 보며 김 대표가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참 자기 객관화가 잘 되시는군요. 그래서 좀 행복하십니까?”
미연이 호구라고 평가했던 것치고는 꽤나 날이 선 말이었지만 경완은 심드렁했다.
“자기 객관화가 잘 돼야 세상이 좀 정상적으로 돌아가죠. 요즘 세상 보세요. 최소한의 객관성도 없이 죄다 주관적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니까 세상이 X 같아지는 거 아닙니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고, 네가 받은 건 뇌물 접대, 내가 받은 건 친분의 증거 등등, 하여간 X같은 소리만 해대면서 세상을 엉망으로 만드는 게 그렇게 자기 객관화 능력이 떨어지는 새끼들이었다.
X같은 짓을 하면 남들이 자신들을 X같이 본다는 사실이 도저히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걸까?
이런 인간들이 다음 두 부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진짜 본인이 하는 행동이 타인에게 어떻게 해석될지 모르는, 소위 감성 지능이 떨어지는 인간들이고, 또 하나는 본인은 X같은 짓을 해도 엿 먹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전자는 과실을 인정하고 반성할 가능성이 많지만, 후자 같은 인간들은 인실X 말고는 계도의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누가 그들에게 인실X을 먹일 것인가? 평범한 새끼도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는 인실X 먹이기 힘든데, 어떤 자리에서 권한을 행사하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튼, 김 대표에게 당장 중요한 건 세상이 아니라 조카 같은 미연이가 행복할 수 있느냐였다.
“암튼 그래서 미연이를 거절하시겠다고요?”
“불같은 감정이 얼마나 오래가겠어요? 잠깐 활활 불태우다가 끝나겠죠.”
경완의 대응이 뭔지 알게 된 김 대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타까움, 안심, 허탈감이 섞인 그 복잡함은 그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리라.
김 대표가 입을 열었다.
“하긴 남의 연애에 제삼자가 끼어드는 것도 우스운 일이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실연해도 세상 끝나는 건 아니니까요.”
제대로 사랑 같은 거 해본 적도 없는 인간들이나 할 법한 소리지만 무수한 전생 동안 갖은 일들을 겪어본 경완의 조언에는 진실함이 녹아있었다.
네가 실연하든, 실연의 아픔에 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든, 심지어 죽든, 세상은 돌아간다. 그리고 흘러가는 시간 동안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지겠지.
강물에 놓인 바위가 점차 풍화되어 사라지는 것처럼, 시간은 도도하게 흐르며 모든 것을 삼켜 버릴 것이다. 자신에 대한 미연의 감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느냐?
본인이 경험해봤기 때문이었다. 격렬했던 감정도, 절대 잊지 않겠다던 각오도, 도도한 시간의 물결 앞에선 풍화될 뿐이었다.
발언의 이면에 자리한 무거움과 별개로 경완의 어조는 참으로 가벼울 정도로 담담했기 때문에 김 대표는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행동이 남의 연애사에 간섭하는 짓이라는 걸 깨닫고 입맛만 다셨을 뿐이었다.
아무리 미연이 조카 같은 아이라고 하나, 진짜 조카의 연애사라도 간섭해선 안 되지 않겠는가?
“우리 미연이 잘 부탁합니다.”
무한전생-더 빌런 17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