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스캔들
헤어지든 사귀게 되든 슬프게 하지 말라는 당부였지만, 곧이곧대로 네네 하고 넘어가면 경완이 아니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거죠.”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개소리지만,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건 사실이다. 병에 걸려 병원에 장기입원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성인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생각 깊은 아이들이 많았다.
본디 고통에는 사람의 생각을 깊어지게 강요하는 속성이 있었다.
하지만 김 대표의 기분은 영 말이 아니었다. 경완을 향한 그의 찝찝한 시선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미연은 왜 이런 새끼를 좋아하는 걸까?’
김 대표는 오랫동안 봐온 미연이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 * *
미연은 만능엔터테이너였다. 노래면 노래, 연기면 연기, 예능이면 예능, 어느 곳에서나 본인의 미모와 재능, 끼를 발휘했다.
이번엔 무슨 드라마를 찍어서 대박이 났다던데, 스캔들이 드라마의 흥행에 꼭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로맨스 드라마가 아니라서 그런 걸까?
경완은 대충 뉴스를 확인한 후 흥미가 떨어져 포탈을 닫고 게임 정보나 검색했다.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는 뭐 평소 굴러가던 그대로였다. 욕심 부리고, 비난하고, 나쁜 짓 하고 착한 짓 하고.
모든 건 생존과 이익에 달린 문제였다. 장밋빛 미래, 거창한 비전도 결국엔 저 두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론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한 시간쯤 패드를 붙잡고 있을 때였다. 초인종이 울리기에 인터폰으로 확인해 보니 김준이었다.
대문을 열어주자 빠른 걸음으로 급히 들어오는 그에게 경완이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미연 씨가 납치되었습니다.”
갑작스런 대답에 경완은 뇌는 잠시 버벅였다. 뜻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일단 정확한 상황이 어떻게 되는지부터 물어보았다.
“어. 음…… 아……. 누가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초능력자라는 건 확실합니다.”
“요즘엔 개나 소나 다 초능력자인가 보네요.”
지금도 꾸준히 각성하는 초능력자가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수는 인구 비율로 따져보았을 때 그리 많지 않았다.
통계청의 공식 발표에 따른 한국의 초능력 각성자는 전체 인구의 약 0.1% 정도로 추산된다고 발표했다. 약 5만 명가량이 초능력자라는 뜻이다.
물론 그 5만 명이 모두 등록되어 관리되는 건 아니었다. 다만, 통계적인 연구 결과로 그 정도 숫자일 거라 예상되는 정도랄까.
“파악된 초능력자는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 납치되었는데요?”
“방금 전에요.”
양평 근처의 야외 로케이션에서 촬영하다가 습격이 있었다. 김준은 경완의 집 근처에서 사무를 보다가 그 소식에 바로 달려왔고 말이다.
납치범의 수는 3명. 모두 초능력자였으며 교전이 있었고, 현장의 경비들이 대응도 하기 전에 순식간에 일을 벌인 납치범들은 그녀를 동쪽으로 데리고 갔다.
“추적은요?”
“진행하고 있지만 그래도 미흡합니다. 그래서 경완 씨가 필요합니다. 세립 초능력 연구에서 있었던 한영미 씨 납치사건 기억나십니까?”
그 말에 경완은 천리안 기계를 떠올렸다.
“천리안 기계를 쓰잔 말이죠?”
“네.”
별수 있나?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야겠네요.”
천리안 장비가 있는 세립 초능력 연구소까지 꽤나 먼 길이었다.
하지만 김준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바로 양평으로 갑니다.”
“왜요?”
“가보시면 아실 테지만 사실 천리안 장비가 이동 가능하게 개량되었습니다.”
김준의 말에 경완이 물었다.
“그럼 장비가 이미 도착해 있는 건가요?”
“연락받은 즉시 움직이고 있으니 우리가 도착했을 때쯤엔 장비도 도착해 있을 겁니다.”
“알았어요. 그럼 가요.”
경완이 날아가는 게 더 빠르겠지만 먼저 도착한다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었기에 그는 김준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양평에 있다는 야외 로케이션으로 향했다.
가면서 경완은 김준에게 습격자들에 관해서 자세히 물었다. 추적을 한다고 하면 어떤 놈들인지 알아놓는 편이 좋았다.
김준은 경완에게 현장에서 촬영된 영상을 보여주었다.
“흐음…….”
영상에는 폭발이 있었고, 난투가 있었으며, 도주가 있었다.
“특이 능력자, 신체강화능력자, 그리고 염동력자로 이루어진 삼인조네요.”
빼빼 마른 놈, 몸 좋은 놈, 키 작은 놈 순이었다.
세 놈은 그렇게 정교하게 호흡을 맞춘 것 같진 않았다. 다만 갑작스럽게 폭발로 기습을 걸어 순식간에 현장 경비와 경호원들을 물리친 빼빼 마른 특이 능력자가 눈에 띄었다.
“이거 무슨 능력인 것 같아요?”
“보시는 그대로 폭발을 일으키는 능력으로 보고 있습니다. 정확한 매커니즘은 모르지만요.”
“걸어 다니는 폭탄마네요. 예전에 어디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전혀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놈입니다.”
미연을 지키던 경호원들을 무력화하는데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놈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일어난 강력한 폭발은 정말이지 위협적이었으니까.
어느새 양평의 촬영 로케이션에 도착하고 보니 어느새 냄새를 맡았는지 기자들이 우글우글했다.
그런 기자들이 유독 한 컨테이너 차량에 몰려있었다.
“소장님. 그럼 저 기계가 납치된 이미연 씨를 찾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요?”
“이 장비만으론 아무런 소용이 없어요. 잘 쓰는 사람이 사용해야 도움이 되죠. 아! 마침 왔네요. 여기에요, 여기!”
마리아 소장이 김준과 경완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기자들이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경완을 발견했다. 그리고 누가 경완을 향해 발걸음을 떼자마자 경쟁적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마이크를 내밀었다.
“이경완 씨! 이미연 씨 납치 사건에 대해 하실 말씀 없습니까?!”
“지금 기분이 어떠십니까?!”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기자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염치가 없거나 간땡이가 부은 건가?
아니다. 그들도 기자라는 명찰을 내려놓으면 평범한 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저 기자라는 명함 자체가 이슈거리를 물고 오지 않으면 밥 벌어먹기 힘든 직업일 뿐이었다. 뭐, 때론 데스크에서 좋아할 만한 기사거리를 물고 오려면 양심도 팔아야 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이해한다고 경완의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 이해한다고 꼭 공감하는 건 아니니까.
“어어?!”
“어어어?!”
기자들이 무중력 공간에라도 들어간 듯 둥실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경완이 힉스장 간섭능력을 사용한 것이다.
“하여간 사람이 납치되었다는데 그렇게 꼭 본인들 용건이 중요해요?”
경완은 그렇게 비아냥거리며 둥실둥실 떠 있는 기자들 사이를 지나 마리아에 앞에 도착했다. 그제야 둥실거리며 공중에 떠 있던 기자들은 바닥에 착지해 지구의 은총, 중력에 감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경완에게 대들거나 항의하지 못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의 상징 같은 인간이 이경완이 아닌가?
“오랜만이네요.”
마리아가 경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경완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잘 지내셨어요?”
“무척 보람찬 나날을 보내고 있었죠.”
위버멘쉬와의 협력연구가 성미에 잘 맞는 모양이었다.
그건 그거고 경완은 마리아의 뒤에 있는 컨테이너 차량을 보았다. 온통 은회색에 세련되어 보이기까지 하는 컨테이너 차량은 딱 봐도 용도가 화물 운반용으로 보이진 않았다.
“저게 천리안 장비인가요?”
“맞아요. 컨테이너 크기 하나로 가능하게 만들었죠.”
“더 작게는 안 돼요?”
“뭐 앞으로 더 작아지겠죠.”
마리아는 희망찬 말을 하면서 경완을 컨테이너 뒤에 달린 문으로 안내했다.
컨테이너 안은 마치 이동형 의료시설을 연상시키듯 전체적으로 하얀색에 깨끗하고 위생적인 느낌을 주었다.
뭔가 좀 더 개량되고 세련된, 감성마저 느껴지는 장비 디자인이었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동일할 거라 생각한 경완은 곧장 정확한 자리에 가서 앉아서는 머리에 장비를 썼다.
“바로 시작합시다.”
인질 사건의 생명은 시간이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납치된 인질의 안전과 생사를 보장할 수 없었다.
마리아는 컨트롤 패널을 두들기며 장비를 작동시켰고 경완의 의식은 육체를 벗어나 확장되었다.
추적의 단서는 미연의 체향이었다.
남자가 여자의 체향을 안다니 좀 변태스럽기는 하지만, 한 번 냄새로 추적해 본 경험이 있는 경완에겐 그게 가장 빠르고 신뢰성 있는 방식이었다. 시간이 아까운데 검증도 안 된 참신한 방법을 쓸 순 없었다.
그의 의식이 촬영 현장을 훑었고 곧 미연의 체취를 발견했다. 수많은 냄새가 있었지만 적정한 필터링을 통해 그녀의 체향에만 반응하도록 감각기관을 조정했다.
그녀의 체향은 이미 평소에 집안에서 충분히 맡아서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를 유혹하려고 끼를 부릴 때마다 확 느껴지는데 기억이 안 나는 게 이상했다.
곧, 그녀의 체향을 맡은 그는 바로 추적을 시작했다. 냄새는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들은 차량을 타고 도주하지 않았다. 그들의 동선은 숲과 산, 능선에 걸쳐있었다. 아마 그런 지형을 통해 추적을 뿌리칠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계속해서 미연의 체향을 추적하던 경완은 마침내 태백산맥 산자락에서 기절한 미연을 어깨에 짊어지고 험준한 산속 안으로 들어가는 삼인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마른 놈, 몸 좋은 놈, 키 작은 놈, 이렇게 세 명이었다.
이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해서 빠르게 달렸다. 도주 능력 하나만큼은 수준급이었다.
그만큼 경완은 곤란함을 느꼈다. 보아하니 계속 이동할 생각인데 어디까지 움직일지 알 수 없었다. 납치당했다던 한영미도 계속 이동하다가 결국 바다를 건너지 않았던가? 어떻게 건넜는지는 안 물어봐서 모르겠지만 미연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경완은 고심했다. 지금 그가 활용할 수 있는 것은 S입자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걸 활용하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S입자를 모아 기절해 있는 미연의 몸에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S입자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기에 단순히 S입자를 밀어 넣는 것만으로는 뚜렷한 변화가 없었다.
그렇기에 경완은 S입자를 가공했다. 마리아 소장의 이론에 의하면 S입자는 의념에 따라 성질이 변하기도 한단다. 그동안 여러 나라에서 초능력자 여럿을 한데 묶어 초능력의 출력을 높이고자 하는 연구를 진행했음에도 실패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각자의 의념이 다 다르기 때문이었다.
경완이 미연의 몸에 밀어 넣은 가공된 S입자는 그녀의 체취를 대신해 경완이 느낄 수 있는 자취를 남기는 용도였다. 그가 천리안 장비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렇다. 그는 직접 미연을 구하러 갈 생각이었다.
그가 천리안 장비를 벗자 마리아는 바로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찾았어요?”
“네.”
“직접 갈 거예요?”
“그게 확실하니까요.”
마리아는 서둘러 움직이는 경완에게 한 가지 부탁했다.
“그럼 폭발능력자는 되도록 사로잡아 주세요.”
“왜요?”
“무슨 능력인지 연구해 보려고요.”
역시 매드 사이언티스트 끼가 있는 소장다웠다. 아니 그보다 사로잡다니? 꼭 누가 들으면 죽이러 가는 줄 오해할라.
하지만 경완은 딴죽 걸 생각도 하지 않고 무던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폭발 능력자가 마리아에게 고문을 당하든, 해부를 당하든 그가 무슨 상관인가? 마리아 소장이 그런 짓을 할 이유도 없겠지만, 나쁜 놈이 나쁜 짓을 당하는 것에 누가 동정하겠는가?
그런 일이 발생하면 고소하다고 생각하는 게 모두의 솔직한 속내 아니겠는가?
무한전생-더 빌런 17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