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코어
요즘 신작 게임이 풍년이라고 하더니, 요란한 잔칫상에 먹을 게 없다고, 막상 그의 눈높이에 맞는 게임이 없었다. 수많은 전생을 반복한 결과 눈이 너무 높아진 탓일까?
할 게임을 찾는 것도 지겨워진 그는 게임기를 끄고 영화나 드라마를 검색했다.
다시 봐도 재밌는, 시대를 뛰어넘는 명작은 분명 존재했고, 그런 것들이 그의 킬링타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렇게 경완은 아프리카에서 아머드 엘리펀트를 두고 밀렵꾼과 경찰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든, 신장에서 위구르족 초능력자들이 반중 독립을 외치며 관공서를 테러하든, 유럽에서 초능력자 관리법을 두고 초능력자와 시민단체가 충돌하든, 일체의 관심을 끊은 채 세상과 담을 쌓았다.
세상은 하도 희한해서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온갖 일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막상 그 일을 자신의 피부로 실감하는 경우는 많이 없었다. 막상 그 일이 자신에게 닥칠 때야 아! 늦었구나!라고 한탄하는 경우가 많을 뿐.
그러나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잦아들 일 없다고,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능력자인 그를 만나고 하고 싶은 사람은 많았다.
마리아가 경완의 집까지 직접 데려온 이 사람도 그중 한 명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위버멘쉬의 요하네스 벨푸기스라고 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주세요.]
경완은 의아해했다. 위버멘쉬의 사람이 왜?
그의 시선이 마리아를 향했다. 그녀가 요한이 말하지 않은 정보를 말했다.
[저분이 위버멘쉬의 창립자세요.]
창립자? 이 남자가?
경완은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나이 지긋한 게르만계 백인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 철학과 교수 같은 이미지의 남자가 현재 세계에 명성을 떨치는 조직의 창립자라는 말인가?
그런데 그런 사람이 왜?
경완의 시선이 요한에게서 다시 마리아에게 향하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우리 세 사람은 공통점이 있어요.]
공통점? 무슨 공통점?
경완이 다시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코어.]
코어가 왜? 어쩌라고?
경완이 또 그런 표정을 짓자 마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위버멘쉬는 코어를 만든 곳이고, 저는 그런 코어를 연구하고 있으며, 경완 씨는 코어의 구조를 면밀하게 관찰한 사람이죠.]
[에이. 겨우 관찰만 했는데 공통점은 무슨,]
[단순히 물리적 구조만 본 것이 아니라 코어의 S입자 구성까지 확인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요한이 끼어들었다.
경완은 미간을 찌푸렸다. 머리에 직감처럼 떠오른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코어는 단순히 S입자 배터리 따위가 아닌 모양이네요.]
요한은 그 말을 긍정했다.
[코어는 다음 시대의 패러다임을 주도하기 위해 개발된 물건입니다.]
그렇구나. 대단한 물건이구나.
그리고 경완은 그런 대단한 물건에 얽히고 싶지 않았다.
[대단하시군요. 부디 하시는 일 잘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용건 끝났으니 이제 나가라는 말인 걸 모르나?
잠시 서로가 말이 없는 사이, 요하네스라는 사람은 참 눈치가 없다고 경완이 속으로 씹을 때쯤 다시 마리아가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벨푸기스 씨는 경완 씨가 그 패러다임에 동참하길 바라는 거예요.]
[제가요? 왜요?]
[당연하죠. 위버멘쉬의 모토가 뭔지 몰라요?]
[모르는데요.]
들은 것 같은데 별로 관심이 없어서 바로 기억이 나지 않은 경완의 말에 마리아는 어이가 없었고 요하네스는 당황했다.
요즘 시대에 위버멘쉬를 빼놓고 이야기가 되나? 정치나 경제, 사회전반에 걸쳐서 큰 존재감을 보이는 조직인데?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나라에 위버멘쉬 조직이 있었고, 강력한 초능력자를 회원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냐면 초능력자 영입을 두고 히어로 컴퍼니의 경쟁자 위치에 있었다.
물론 위버멘쉬가 회원들의 히어로 활동을 막는 건 아니었지만, 위버멘쉬의 조직 이념과 히어로의 가치가 충돌하는 경우는 많았다.
위버멘쉬는 초능력자의 권익에 관심이 있지만, 히어로 컴퍼니는 아무래도 초능력자의 사회 공헌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가 겉으로 드러나고 알려진 이유지만, 사실 좀 더 내밀한 사정을 들여다보면 히어로 컴퍼니보다는 히어로 컴퍼니를 낳은 모(母)조직인 전미 초능력 협회와의 대립이 더 심했다.
미국의 초능력 업계를 석권한 전미 초능력 협회가 해외로 눈을 돌리려고 보니, 어머나, 씨발? 누가 먼저 업계를 먹었네?라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그 업계란 초능력 인력업계였고, 그 누구는 위버멘쉬였다.
미국 내에서 위버멘쉬의 위상은 전미 초능력 협회만큼은 아니라도, 로컬한 조직인 전미 초능력 협회와 이미 글로벌한 조직인 위버멘쉬 사이의 신경전은 전미 초능력 협회가 히어로 컴퍼니를 전 세계 문화 트랜드로 밀면서부터 이미 시작된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전통적인 자본업계나 문화업계의 푸쉬를 받은 히어로 컴퍼니이니만큼 세간에서 그 인지도나 이미지는 위버멘쉬보다 좋을 수밖에 없었다.
위버멘쉬가 초능력자의 권익 보호로 회원들을 모집했다면, 히어로 컴퍼니는 초능력자에게 사회공헌에 대한 부와 명예를 대가로 내밀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어느 쪽이 더 야심 차고 비전 있는지는 비교할 바가 아니지만 모든 사람이 찬란한 비전을 보고 경주마처럼 달리는 건 또 아니었다.
도리어 조금은 이기적인 속물로 보이는 위버멘쉬의 정체성은 오히려 그들의 장점이기도 했다. 히어로 컴퍼니에서 받기 부적절한, 즉 히어로로서 적절하지 않은 품성을 가진 초능력자도 회원으로 받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경완이었다.
[경완 씨. 세상은 앞으로 계속 변할 거예요. 그리고 초능력에 대한 대처법에도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고요. 지금처럼 소수의 강력한 초능력자에 대한 높은 수요가 영원하진 않을 거예요.]
경완의 필요성이 줄어들거나, 그의 강력함에 대처할 수 있는 다른 카드가 나오는 순간 그의 입지가 불안해짐을 마리아는 지적했다.
경완은 그녀가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저보고 울타리 삼아 위버멘쉬에 가입하라는 건가요?]
요하네스가 대답했다.
[물론 경완 씨의 독립적인 성격은 알기 때문에 굳이 강요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당신에게 우호적인 곳, 비빌 구석은 한 곳쯤 있는 것이 좋다는 건 부정하기 힘들걸요?]
[그거랑 코어랑 무슨 관련이 있는데요?]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굳이 코어를 핑계로 댈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마리아가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요. 코어는 차세대 패러다임을 주도할 물건이라고요.]
[혹시 위버멘쉬에서도 코어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건가요?]
경완의 지적에 마리아가 요하네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한 그녀의 반응은 경완의 지적이 매우 예리했음을 뜻했다.
요하네스가 대신 입을 열었다.
[사실 코어는 우연의 산물처럼 태어난 물건입니다.]
물론 원하는 목적에 부합하도록 개발과 연구를 했으나 그 결과물은 개발과 연구 과정에서 가정한 이론과 맞는 부분이 극히 일부에 불과한, 그러니까 만든 사람도 명확히 이해할 수 없는 물건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굳이 경완을 찾아온 것이다. 코어의 정확하고 상세한 분석, 특히 S입자 구성체와 코어의 물리적 구조와의 상관관계를 밝히기 위해서는 경완의 능력이 매우 필요했으니까.
이러한 사정을 짐작한 경완이 자신이 짐작이 맞는지 확인차 물어보았다.
[다른 초능력자는 안 되나요?]
[현재 천리안 장비 기술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몇 안 돼요. 그중에 위버멘쉬와 협력할 수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고, 무엇보다도 천리안 능력을 현미경 능력으로 전용한 장비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초능력자는 현재까지 경완 씨가 유일해요.]
[저밖에 없어요?]
[부끄럽게도 저희 위버멘쉬의 회원 중에 마리아 씨가 개량한 천리안 장비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마이크로 수준까지만 읽어낼 수 있었죠.]
뭘, 그런 걸 가지고 부끄러울 것까지야.
경완은 분위기에 맞지 않은 딴죽을 속으로 삼키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이들은 차세대 초능력 패러다임을 주도할 코어의 연구를 위해서 자신의 능력이 필요했고, 이러한 우호적 관계가 경완 본인에게도 나쁘지 않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마리아의 지적이 맞는 말이긴 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고, 초능력에 대해 국가적 투자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경완이 딱히 자기 계발에 노력하지 않는 이상 언제 시대에 뒤처진 퇴물이 될지 알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여러 높으신 분들이 탐탁지 않게 여기는 평판인데 그런 상황이 닥치면 ‘요즘 이 새끼 만만하네?’ 따위의 인식이 퍼질 수도 있었다. 그러면 분명 짜증 나고 귀찮은 일이 발생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본인이 일하기 싫은 거 말고는 디메리트가 없었다. 위버멘쉬는 요새 한창 잘나가는 조직이기도 했고, 가입하라는 것도 아니고 우호적인 관계가 되자는 거니까.
하지만 경완은 금방 승낙의 의사를 밝히지 못했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게을러졌는지 깨달았다.
집도 생기고 경제적 걱정도 없고, 홀몸이라 홀가분하며, 마음껏 빈둥거리는 생활에 어느새 몸과 마음에 젖어버린 것이다.
상황을 명확하게 인식한 그의 입에서 저절로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아. 일하기 싫다.”
그건 그가 상대의 말을 인정한다는 방증이었다.
마리아의 눈이 빛났다.
[사람이 살다 보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때가 있더라고요. 경완 씨도 잘 알죠?]
그녀의 말에 경완은 한숨을 내쉬며 끝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 = = =
경완의 노동 리스트에 업무 하나가 추가되었다. 그건 바로 마리아가 천리안 장비를 개조해 만든 초능력 현미경 장비를 운용해 코어를 관찰하고 관찰한 내용을 최대한 상세히 그녀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간단히 생각하면 그저 자신이 관찰한 것을 그대로 설명해 주면 되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말처럼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뭔가 매우 복잡한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설명하는 개념과 그 개념에 따라 정의된 용어를 상호 간에 정확하게 공유해야 했다. 용어의 통일이 전제되지 않으면 대화가 통할 리가 없잖은가?
그래서 경완은 졸지에 마리아로부터 과학 수업을 받아야 했다. 적어도 그가 관찰한 코어의 구조를 그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토폴로지 구조에는 별형, 망형, 선형, 버스형…….”
마리아가 만들어준 자료를 읽으며 암기하고 있던 경완은 어느새 종이를 책상 위에 내려놨다.
옆에 있던 마리아가 물었다.
‘어머? 벌써 다 외웠어요?“
“이걸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경완은 특단의 조치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다. 빈둥거리는 데 쓰기도 모자란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흥미도 없는 곳에 쏟아부을 수는 없었다.
경완이 물었다.
“아는 텔레파시 능력자 없어요?”
그말에서 마리아는 그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경완 씨가 본 것을 바로 전달하려고요?”
“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지 않은가? 아무리 말로 전달해도 직접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효과적이고 빠른 건 없었다.
마리아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나 구체적인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는 텔레파시 능력자가 있을까요?”
“왜 없을 거라고 생각하죠?”
“그야 텔레파시도 정신계 능력이거든요. 상당히 위험하죠.”
무한전생-더 빌런 18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