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코어
정신을 연결하는 S입자 구성체, 패스를 사용하는 정신계 능력은,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물론 훈련하는 과정에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특히 상대를 향해 능력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말이다.
아니, 각별한 주의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정신계 능력을 다루는 이의 비범한 각오와 정신이 필요했다. 패스를 잘못 다루면 자칫 서로의 정신이 연결되어 정신오염이 발생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텔레파시 능력이 초능력의 또 다른 핫이슈이기는 해요. 인간의 소통 방식을 근원적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거든요.”
인간의 소통은 언어를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텔레파시는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언어로는 표현되지 않는 것들조차 상대방에게 전달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정신계 능력자 중에 텔레파시 능력자는 더 희귀해요. 그 이유를 설명하는 가설이 있죠.”
마리아의 설명에 의하면 초능력의 각성은 재능에 따라 육체, 정보, 강화, 변질, 특이, 이 다섯 가지 계열을 하나, 또는 둘 이상을 포함하는데, 그 각성의 형태는 개인의 심상에 따라 다르게 발현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체강화능력자는 육체, 강화 계열이며, 여기서 방어적 심상이냐, 공격적 심상이냐에 따라 재생 및 회복 능력이 강해지냐 괴력 능력이 강해지냐로 나뉜다.
지금은 FBI에서 일하고 있는 각질 경화 능력자인 찰스 아메드를 이러한 분석방법에 적용하면 육체, 강화 계열에 약간의 변질 계열을 가지고 있는데, 방어적 심상으로 인해 각질 경화를 획득했다는 것이다.
그와 동일한 계열을 가지고 있지만 고무처럼 늘어나는 능력이거나, 몸 전체, 혹은 일부가 거대화하는 능력자의 존재는 심상에 따른 발현의 차이로 보인다는 것이다.
“정신계 능력은 정보와 특이 계열을 기반으로 하는데, 텔레파시는 여기에 딱 하나, 강화 계열만 허용되고, 다른 계열은 허용되지 않아요. 다른 계열이 포함될 경우 텔레파시가 아니라 정신지배나 간섭, 혹은 이론적인 이야기지만 예지 능력으로 발현된다고 해요. 설사 텔레파시를 각성할 계열을 맞추어도 개인의 심상에 따라서 텔레파시 대신 탐지에 특화되거나, 사이코메트리 등의 능력을 발현할 수도 있어요.”
FBI의 스테이시가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했다.
“정신계 능력의 핵심은 패스고, 이 패스는 특이 계열에 포함되는 특질인데, 이 특이 계열은 패스만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서 또 수가 적어지죠.”
특이 계열은 다른 네 가지 계열로 분류할 수 없는 특성을 분류할 때 사용되는 개념으로, 여기에 포함되는 특질들은 공통적으로 S입자에 대한 밀접한 감응력 및 제어력과 관련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희소하다는 거네요?”
“그렇죠.”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이 계열 중에서도 패스 특질을 얻은 이들은 대부분 강력한 정신 방벽 혹은 정신 지배 능력을 개화하지 텔레파시 같은 능력을 개화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는데, 그 이유는 개인의 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텔레파시는 소통을 핵심으로 하는 능력이기 때문에 그런 가치를 내재한 심상의 소유자만이 각성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만큼 확률이 또 낮아지는 말이다.
그만큼 인재가 적다 보니 텔레파시 능력의 훈련은 되도록 최대한 안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정신접속의 심도가 낮다는 뜻이며 그만큼 텔레파시를 통한 정보의 전달량도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부분이 문제였다.
“경완 씨가 여태 설명한 것만 봐도 코어의 구성은 말로 전달하기 어려울 정도로 굉장히 복잡하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런데 그만한 정보량을 명확한 이미지로 전달할 수 있는 텔레파시 능력자가 과연 있을까요?”
“있지 않을까요?”
마리아의 말에도 경완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런 희망이 있지 않다면 텔레파시 능력을 도입해 공부를 회피하자는 발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말이 일리가 없진 않았다. 아무리 텔레파시 능력자가 소수라지만 세상은 넓었고, 마리아의 인맥은 작지 않았다.
특히 위버멘쉬 같은 경우 세계 최대의 초능력자 회원을 보유한 조직이 아니던가?
경완이 이를 언급하자 마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하지만 경완 씨. 그렇게 되면 위버멘쉬에 빚을 지게 되는데 괜찮겠어요?”
“왜 빚진다고 생각하죠? 제가 공부를 언제 끝낼지 알고요? 텔레파시 능력자만 섭외하면 모두가 신속하고 빠르게 결과를 얻을 수 있는데요?”
경완의 말에 마리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뭔가 의미심장한 느낌에 경완이 물었다.
“뭔가 있어요?”
“위버멘쉬의 행보를 봐요. 목적을 위해서 얼마든지 위선을 부릴 수 있는 곳이잖아요.”
“그 힘을 가지고 위선조차 안 부리는 건 더 큰 문제 아닐까요?”
“…….”
마리아는 경완의 결심이 변할 것 같지 않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연락해 보죠.”
“고마워요.”
마리아의 연락을 받고 경완은 다시 요하네스를 만나게 되었다. 마침 그는 한국에 머무르고 있었다.
[굳이 이런 일에 직접 오실 필요까지 있나요?]
경완이 물었다. 위버멘쉬의 대변인인 나탈리 햅번이라는 여자가 있지 않던가? 그 여자 말고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닐 테고.
그런 의문에 요하네스는 이렇게 답했다.
[당신의 생각보다 코어는 더 중요한 물건입니다. 상상하는 것보다 더요.]
그 말에 경완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세대 패러다임을 주도한다는 건 차세대의 패권을 쥔다는 것과 거의 비슷한 말이기도 했으니까.
요하네스는 그런 경완의 수긍을 그러한 중요성을 이해한다기보다는 그저 단지 자신의 말에 맞장구를 치기 위한 수준으로 이해하고는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텔레파시 능력자가 필요하시다고요?]
[코어의 구조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려니까 너무 복잡해서 제가 다 공부를 해야 되더라고요. 저에 대해 조사해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저는 교육이라는 걸 받아본 적이 없는 놈이거든요.]
[글쎄요. 저는 킴에게서 경완 씨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상당히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미 녹슨 머립니다.]
타고난 머리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자신은 그러한 노력을 하지 않을 거라는 뉘앙스에 요하네스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킴이 많이 섭섭해하겠군요.]
[마리아 씨가 왜요?]
[경완 씨처럼 기본적으로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S입자에 매우 민감하며 제어력까지 뛰어난 사람이 학문적인 지식을 쌓으면 초능력 연구에 정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
어쩐지……. 예전부터 틈만 나면 뭘 가르치려고 들기에 왜 그러나 싶었다.
[아무튼 위버멘쉬에 괜찮은 텔레파시 능력자가 있기는 하죠?]
[물론입니다만…….]
왜 말꼬리를 흐리는 걸까?
요하네스가 이내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위버멘쉬는 회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조직된 집단이라 맨입으로 텔레파시 능력자를 섭외하기는 어렵군요.]
[힉스, 아니 매스 이펙터라고 하는 남자도 무슨 대가를 받고 위버멘쉬를 위해서 일한 건가요?]
경완이 애용하는 중력장 제어능력의 원본이 된 남자.
한국인이지만 위버멘쉬 소속인 그의 언행은 뭐랄까, 자신의 권익보다는 위버멘쉬라는 조직의 비전에 충성하는 느낌이었다.
경완의 말이 예상치 못한 곳을 찔렀던 모양인지 요하네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긴 그는 경완의 앞에서 위버멘쉬를 그저 서로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모인 초능력자 동호회 같은 뉘앙스로 말해왔다.
하지만 사실 그 이면에 생각보다 확고한 규율과 통제가 있으니 뭔가 말에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지적받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일반 회원으로 만족하는 이들과 위버멘쉬의 중추에서 활약하고 싶은 사람들을 같이 취급할 순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일종의 열정페이 같은 건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조직에 헌신하는 만큼 더 많은 권한이나 혜택을 주는 방식이겠지.
합리적인 조치이기는 했다. 조직에 헌신하지 않는 사람에게 권력과 지위를 줄 순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데 그 텔레파시 능력자를 섭외하는 것에 대해 대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제가 왜 알아야 하죠? 저 혼자 좋자고 하는 일 아니잖아요?]
위버멘쉬가 코어 연구를 중요시 생각하는 만큼 위버멘쉬 역시 그만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에 요하네스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 측 텔레파시 능력자들이 현재 매우 바쁩니다.]
[누구는 안 바쁜가요?]
적어도 그 바쁜 사람이 경완 본인은 아니지만 그는 뻔뻔하게 내질렀다. 그 부분을 눈앞에 지적할 거야 뭐야?
그 뻔뻔한 말에 요하네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는데 그 말이 경완을 살짝 당황하게 만들었다.
[비질란스라고 아십니까?]
그게 왜 여기에서 나와.
경완은 당황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고 태연하게 대답하는 것에 성공했다.
[네, 알죠.]
알다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초능력 자경단, 일명 빌런이 아니던가?
경완은 단순히 아는 거에서 그치지 않고 거기에 소속된 사람하고 같이 불씨재단이라고 사회공헌 활동도 하고 있었다.
뭐 경완이 하는 일은 재단에 기금을 보내는 것뿐이지만 남들 눈에는 그와 비질란스가 붙어먹은 것으로 보이기엔 충분했다. 돈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것이 또 있겠는가?
요하네스가 말을 이었다.
[비질란스에는 오라클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있습니다. 비질란스 조직의 핵심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으로 매우 강력한 텔레파시 능력을 가지고 있죠. 저희가 파악하기로는 오라클의 텔레파시는 전 지구에 닿을 정도로 강력합니다.]
[그래서요?]
[텔레파시 능력자 역시 정신계 능력자인만큼 패스를 사용합니다. 그만큼 패스의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하죠. 현재 위버멘쉬의 텔레파시 능력자들은 이 오라클을 찾기 위해 대부분 투입된 상황입니다. 남은 텔레파시 능력자는 훈련 중이라 경완 씨가 원하는 일을 하기엔 능력이 모자랍니다.]
[금방 끝나는데 잠시 동원하는 것도 안 되나요?]
[얼마 전이라면 괜찮지만, 지금은 힘듭니다. 꼬리를 잡았거든요.]
[오~ 대단하시네요.]
경완은 감탄사를 터뜨렸지만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위버멘쉬의 창립자가 한국에 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었던가?
그런 그의 의문은 곧이어 다음으로 넘어갔다.
오라클이 잡힌다? 그건 비질란스가 와해된다는 뜻이었다.
뭐, 그게 경완과 무슨 일이겠냐만은 자신의 돈이 들어간 불씨재단에 생각이 미쳤다. 그 불씨재단을 운영하고 있는 강우빈 감독이 비질란스 소속의 샌드맨으로서 활동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만약 그가 잡혀가거나 증발해버리면 불씨재단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경완이 거기에 쏟은 돈이 한두 푼이 아닌데 말이다.
돈이 아까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 공중에 붕 뜬 재단을 눈먼 돈이랍시고 엉뚱한 새끼가 가로채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다.
눈먼 돈, 주인 없는 돈이랍시고 달려드는 새끼들은 100% 양심 없는 놈들이었다. 요즘같이 지폐 하나하나에 일련번호가 박히는 시대에 눈먼 돈, 주인 없는 돈이 어디 있나?
재단 문제만이 아니었다. 비질란스와 경완 사이의 밀착 의혹으로 인해 빚어질 갈등도 예단할 수는 없지만 분명 그를 편안하게 지내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설사 그와 재단이 결백(?)을 인정받는다고 해도 강우빈이 사라지면 재단은 누구에게 맡겨야 한단 말인가?
다시 말하지만 경완은 재물에 미련이 없더라도 양심 없는 새끼들이 자기 재물에 욕심내는 꼬라지는 기분이 더러워서라도 가만히 있지 않을 인간이었다.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무한전생-더 빌런 184화
17-코어
[그럼 언제쯤 끝날까요?]
경완은 태연한 표정으로 정보를 캐물었다.
[조만간에 결과가 나올 거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때까지 기다리죠, 뭐. 어차피 연구라는 것도 하루아침에 성과가 나오는 건 아니잖아요?]
[하하. 마리아 소장이 답답해하겠군요.]
[원래 결과가 나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인내심이야말로 연구자의 덕목이자 자질이잖아요. 별문제 없을 거예요.]
경완은 당사자가 들으면 어이가 없어서 귀를 후빌 말을 하며 요하네스와의 만남을 끝냈다.
그리고 오랜만에 불씨재단의 이사(理事) 자리에 있는 강우빈에게 연락하고는 방문을 약속했다. 불씨재단의 사무실은 수도권 밖, 교외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사장님. 언제 찾아오시나 싶었습니다.”
강우빈이 나와서 경완을 직접 맞이했고 경완은 이사장님이란 표현에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으. 이사장이라니요. 기분 나쁩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게 사실이니까요.”
불씨재단의 자금 80%가량은 경완이 낸 것이었으니까. 지금도 계속 내고 있어서 비율이 높아지면 높아졌지 낮아질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축! 환영! 이사장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아예 플래카드까지 붙어 있었다.
경완의 발걸음이 멈추니 강우빈이 의아해했다.
“왜 그러세요?”
“쪽팔려서요.”
세상은 기브앤테이크. 불씨재단의 직원들이 재단의 자금 상당 부분을 충당한 경완을 반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었다. 그들 중 몇은 내부고발했다가 직장에서 따돌림당하고 결국 퇴출당한 사람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돈이 다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완은 그런 그들의 환영은 양심을 찌르는 꼬챙이가 되었다.
그의 그런 반응에 강우빈은 피식 웃으며 박수를 치며 주변을 물렸다. 환영은 여기까지니 돌아가서 할 일을 하라고 말이다.
그리고는 경완을 데리고 접객실로 향했다.
접객실은 매우 조용했다. 창문조차 없어서 화분이나 소품 등으로 화사하게 꾸며지지 않았다면 자칫 심문실로 오해받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찾아온 방문객들 대부분이 내부고발을 고민하거나, 아니면 이미 내부고발을 해버린 이들이라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는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럼 이사장실이나 높은 상사의 사무실로 가면 되지 않냐 싶겠지만 강우빈은 그런 걸 만들지 않았다. 재단의 성격이 성격이니만큼 권위주의적인 요소를 싹 빼려고 한 노력의 결과였다.
경완이 강우빈의 말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직원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감독님은 재단 경영도 참 잘하시는 것 같아요.”
“사람 다루는 거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죠.”
감독이라서 그런지 스태프들을 다뤄본 경험이 적잖은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강우빈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의외네요.”
“뭐가요?”
“경완 씨는 재단에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알았거든요.”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그렇다. 그가 굳이 여기에 온 이유를 설명하자면 구구절절했다. 위버멘쉬에 비질란스가 털리면 샌드맨 강우빈도 털리고, 그가 운영하고 있던 불씨재단도 털리며, 거기에 집어넣은 경완의 돈도 털린다.
그러한 상황에 닥쳤을 때 생각나는 시나리오는 몇 가지 있었지만 경완에게 긍정적인 시나리오는 단 하나도 없었다. 죄다 엿 같고 귀찮은 시나리오가 예상되는 것이다.
그나마 최선의 시나리오는 오라클이 잡혔을 때 입을 끝까지 다물고 강우빈이 의리를 저버리고 제 살길 찾아 그런 오라클을 외면하는 것인데, 정신계 초능력까지 있는 세상에서 오라클이 끝까지 입을 다물 수 있을 가능성과 강우빈이 의리를 저버릴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그가 제 일신의 안녕에 신경을 썼다면 애당초 샌드맨 노릇을 했겠는가?
결국 경완이 재단에 찾아온 이유는 새삼 재단이 하는 일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비질란스의 일원인 샌드맨 강우빈에게 경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강우빈은 경완이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줄은 전혀 모르는 상태라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경고를 할지 머리를 굴려야 했다.
그는 먼저 신변잡기부터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요즘 이렇게 지낸다, 그쪽은 어떻게 지내나 이런 말부터 말이다.
“늦었지만 사면받으신 걸 축하합니다. 마땅히 받아야 하는 걸 받으신 거죠.”
“감독님은 이제 완전히 재단 일만 하시는 건가요? 더 이상 다큐는 안 찍으시고요?”
“아닙니다. 지금도 다큐를 준비하고 있어요.”
“소재가 뭔데요?”
“요새 돌아가는 초능력 패권에 대해서랄까?”
오! 드디어 물꼬를 틔울 기회를 발견한 경완은 은근슬쩍 위버멘쉬의 이름을 꺼냈다.
“초능력 패권이라면 위버멘쉬를 빠뜨릴 순 없죠.”
“그렇습니다. 처음엔 빌런 조직으로 낙인찍혔었잖습니까. 그런데 그런 낙인을 벗고 글로벌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조직으로 거듭난 건 보통 일이 아니죠.”
보통 일이 아니다라…… 경완은 거기에 담긴 뉘앙스를 잠시 곱씹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죠. 보통 일이 아니죠. 위버멘쉬의 지도자들은 참 대단한 것 같아요.”
“맞습니다. 참 대단하죠. 누구도 자본 없이 그런 조직을 일구어내진 못할 테니까요.”
역설적으로 막대한 자본이 들어갔는데 그걸 감추고 있다는 의미일까? 한 번 의심해 볼 가치는 있었다.
하지만 경완은 모른 척 다음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여기서부터가 그가 재단까지 찾아온 이유였다.
“그렇게 대단한 줄 알았으면 요하네스 씨가 찾아왔을 때 좀 더 이것저것 물어볼 걸 그랬습니다.”
그 말에 강우빈의 얼굴이 미소를 머금은 그대로 살짝 굳었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동요하고 있음을 경완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누구요?”
“요하네스 벨푸기스 씨요. 자기 입으로 위버멘쉬의 창립자라던데요?”
“위버멘쉬의 창립자가 한국에 있단 말입니까?”
“네. 뭔가 중요한 일이 있는지 꽤 오랫동안 있네요.”
경완은 자신이 그를 만난 계기를 설명했다. 코어에 관한 건 일단 감추고 호신장비를 구하려 마리아 소장을 찾아갔더니 그녀가 소개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너무 TMI를 남발해도 오히려 의심을 받는다.
“혹시 무슨 일인지 아십니까?”
“언뜻 들은 바로는 오라클인가 하는 사람을 잡기 위해 왔다고 하던데 별로 관심이 없어서요.”
“……오라클이 누군지 아십니까?”
“아니요. 전 그때 처음 들어봤어요. 뭐 기껏해야 아는 사람만 아는 빌런이 아닐까요?”
강우빈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오라클은 비질란스의 수장이라고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알아요. 하지만 경완은 놀란 척했다.
“그래요?”
“이거 큰일이 생기겠군요.”
“설마 큰일이 생기겠어요?”
“언론이 다루지 않지만 비질란스와 위버멘쉬의 충돌은 물밑에서 수시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위버멘쉬의 규모를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데요?”
비질란스의 규모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비질란스가 위버멘쉬 규모의 반만 되었더라도 큰 뉴스가 되었을 것이다.
경완의 말에 강우빈은 쓰게 웃었다.
“비질란스 같이 자신만의 정의를 추구하는 자경단은 상대가 누구인지 가리지 않죠.”
“비질란스에 대해서 잘 아시는 모양이네요?”
그 말에 뭐가 찔리는지 강우빈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제가 아는 바로는 비질란스의 신념은 복수를 바탕으로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쉽게 꺾이기 힘들죠.”
“그렇구나.”
경완은 흘려듣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각한 이야기지만 사실 심각해 봤자 지구멸망이나 인류멸망보다 심각한 문제겠는가?
아무튼, 심각한 이야기를 계속하기엔 손님 접대에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강우빈이 화제를 바꾸었다.
“미연 씨와 동거하고 계신다면서요?”
“……어떻게 아셨어요?”
스캔들이 나기는 했다. 하지만 미연이 경완과 한 집에서 기거하고 있다는 건 알려지지 않았다.
미연과 경완에 대한 스캔들이 이경완 사면 스캔들로 정치권까지 번질 뻔했던 일 때문에 윗분들이 모두 합심해서 막고 있어서 더 이상 미연과 경완 사이를 파는 기자는 없었다.
아니, 있어도 데스크에서 까이니 기사가 날 일이 없었다.
“저에게도 그렇고 주변 지인에게 자랑하는 것 같더라고요. 함락이 멀지 않았다고 말이죠.”
“…….”
살다 보면 사람의 미소가 참 얄밉게 느껴질 때도 있는 법이다.
아무튼, 경완은 새롭게 바뀐 화제에 대해서 강우빈과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재단으로 화제를 돌렸다.
강우빈은 경완에게 그간 자신들이 어떤 공익제보자들을 도와줬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고, 경완은 기분이 묘해졌다.
공공의 이익, 얼굴도 모르는 타인을 위해 희생을 감수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뭐랄까, 앞뒤 분간 안 되는 어둠 속에서 밝은 횃불을 발견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에서 옳다는 것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무릅쓴 이들은 누군가에겐 어리석다 손가락질받겠지만 오래 살아본 경완은 잘 알고 있었다. 사회의 질서가 유지될 수 있는 건 그 바보들 덕분이라고 말이다.
조금도 손해 보지 않고 자기 잇속만 차리려는 인간들만 모인 세상이 바로 지옥이었다.
강우빈이 들려준 이야기에 인간에 대한 경멸이 조금을 씻겨지는 듯한 기분이 든 경완은 쓰게 웃었다. 맑게 씻겨진 이 기분을 더럽힐 존재 역시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그렇지만 항상 인간이 문제였고, 인간이 답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자주 오세요.”
“생각해 보고요.”
단칼에 거절하지 않았지만 일단 거절이라는 건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경완은 자연스럽게 비질란스에 경고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 * *
경완의 일상은 평온했다.
저 멀리 아프리카 대륙에선 총알이 통하지 않는 코끼리가 밀렵꾼들을 죽였다는 외신이 잠깐 포털 검색순위에 들어왔다가 내려갔지만 그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다만 마리아가 종종 연락해 와서 언제 코어 분석할 거냐고 조금 귀찮게 하기는 했다.
경완이 그녀에게 ‘공부하기 싫어요’라고 단칼에 거절한 며칠 후, 그는 세 사람의 방문을 받았다. 한 사람은 마리아였고 또 한 사람은 요하네스였으며, 또 한 사람은 낯선 사람이었다.
“누구예요?”
“경완 씨가 그렇게 찾던 텔레파시 능력자예요.”
마리아의 말에 경완은 낯선 여자를 쳐다보았다. 전형적인 북유럽계 금발 미녀랄까?
[사만다 홉킨스라고 해요. 잘 부탁합니다.]
“아, 네.”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으로는 샌드맨이 자신의 경고를 듣고 조치를 취한 것인지, 아니면 경완의 주체할 수 없는 게으름을 참을 수 없었던 마리아가 위버멘쉬 측을 쪼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걸로 마리아가 시키는 공부는 안 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굳이 찾아오실 필요까지 있나요. 전화로 부르면 갔을 텐데.”
“음…… 이 일은 기밀이라서요.”
“기밀이면 더 오면 안 되죠. 여기 국정원이랑 FBI가 도감청하고 있을 텐데.”
경완의 말은 일견 맞는 것 같지만 마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경완 씨는 자신의 위치를 여전히 잘 모르는 모양이군요. 과연 당신하고 척을 지고 싶은 정부가 몇이나 있을까요?”
수틀리면 원전도 폭파하는 인간인데 말이다.
그런데 그런 인간의 집 안에 함부로 도감청 장치를 설치한다? 경완의 집에 누가 방문하는지 확인하는 것까지는 문밖의 일이니까 그렇다 치지만 그의 집안에 그런 짓을 하면 과연 그가 가만히 있을까? 더구나 유명 여배우와 동거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에서?
분명 뭔가 보복성으로 큰일을 저지를 것이 분명했다.
경완은 그러한 인식이 섭섭한지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제가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이 아닌데…….”
“경우 없는 사람에게 경우 없게 굴기는 하잖아요.”
무한전생-더 빌런 18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