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코어
맞기는 맞는 말인데, 말에 뼈가 있었다. 마리아의 성심을 다한 설득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코어 연구의 물꼬를 틔울 수 있는 경완이 빈둥거리니 홧병이 살짝 올라온 모양이었다.
경완이 화제를 전환했다.
“아무튼. 그럼 여기서 바로 텔레파시 쓰는 건가요?”
“경완 씨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면요.”
“제가 기억을 제대로 못 하고 있으면 어쩌려고요?”
“경완 씨 기억력은 좋은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
아니, 어떻게 알았지? 자신에게 이것저것 가르치면서 짐작한 모양이었다.
그녀 말이 맞았다. 아마 빙의하면서 뭔가 뇌에 영향을 준 것인지, 아니면 원래 이 몸의 두뇌가 기억력이 좋은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초능력이 뭔가 했는지 말이다.
그 좋은 머리가 바탕이 된 덕분인지 자극적일 정도로 신비하고 장엄한 코어 내부의 구조는 더욱 잊기 힘들 정도였다.
뭐, 마리아의 태도가 오늘따라 꽤나 틱틱거리기에 살짝 꼴이 받아서 ‘기억 안 나요’라고 한마디 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그랬다간 다시 코어 관찰을 하러 가야 할 것 같다는 이성의 읊조림에 정신줄을 단단히 붙잡았다.
“아무튼, 그럼 바로 시작하죠.”
경완의 말에 마리아는 사만다와 잠깐 대화를 나누더니 경완에게 말했다.
“준비가 좀 필요하데요. 조용한 방 있어요?”
“제 침실 쓰세요.”
마리아와 사만다가 텔레파시 연결 준비를 위해 경완의 침실에 들어갔다.
경완은 그런 두 사람의 등을 보더니 요하네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굳이 창립자께서 오실 필요까지 있었나요?]
[중요한 일이니까요.]
[바쁘실 텐데 직접 오지 않으셔도 되지 않나요? 햅번인가 하는 대변인도 있잖아요.]
[대변인이 위버멘쉬의 모든 일을 알 필요는 없죠.]
나탈리 햅번이 들었다면 상당히 섭섭해했을 것 같은 말이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요하네스가 경완에게 물었다.
[혹시 이번에 저희와 비질란스가 한국에서 충돌한 걸 알고 있습니까?]
[언제요?]
[이틀 됐습니다.]
[이틀 됐으면 언젠가 뉴스로 나오지 않을까요?]
위버멘쉬라는 단체의 영향력과 비질란스를 묻어버리고 싶은 한국의 높으신 분들의 소망을 생각해 봤을 때 두 단체의 충돌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건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었다. 아니면 그대로 묻히거나.
경완의 판단으론 아무래도 후자 쪽이 더 가능성 있었다. 비질란스의 자경행위가 심히 눈꼴 시리신 어르신들이 굳이 위버멘쉬와 비질란스의 충돌을 대서특필해서 대중에게 두 단체가 비슷한 급이라는 오해를 심어주고 싶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위버멘쉬 아니면 비질란스 못 잡아?’ 이런 비판이 나올 여지도 있잖은가? 원래 높으신 분들일수록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법이었다. 그러니 주둥이를 막든, 비판이 나올 껀덕지를 막든, 어떻게든 막으려고 드는 거고.
그 말에 요하네스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경완의 표정을 관찰하더니 물었다.
[혹시 위버멘쉬가 오라클을 잡으려 한다는 말을 누구에게 한 적이 있습니까?]
[네? 아니요.]
경완은 고개를 저었다.
묘한 표정의 요하네스가 그런 경완의 얼굴을 보았지만 두꺼운 낯짝을 꿰뚫어볼 순 없었다.
경완이 뻔뻔하게 물었다.
[왜요? 뭐가 잘 안 돼요?]
[덫을 잘 쳐놨다고 생각했는데 꼬리가 빠져나가 버려서 말이죠.]
참으로 아쉬워하는 기색이 양심을 찌를 정도였지만 경완의 양심에 난 털은 고작 그 정도로 뚫리진 않았다.
[경찰이나 국정원 같은 기관에서 도움을 받지 않으셨나요?]
[…….]
경완의 물음에 요하네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 그려셨어? 안 받았다고? 남의 나라에서 허락도 안 받고 멋대로 하셨다? 이 양반 이거 큰일 낼 양반일세?
위버멘쉬를 설립한 만큼 이미 큰일 한 사람이긴 하지만, 학자 같은 겉모습과 다르게 상당히 과격한 면이 있었다. 하긴 그러니 위버멘쉬도 초기엔 빌런 집단으로 분류된 것이 아니겠는가?
경완의 시선에 뭔가 변명을 해야 한다고 느껴서인지 요하네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국가기관을 믿기 힘듭니다.]
[왜요?]
[비질란스를 여태 못 잡은 것을 생각하면 국가기관에 그들의 프락치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에이. 설마요. 명색이 공권력인데.]
그 프락치 눈앞에 있어요, 이 양반아.
하지만 요하네스는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정부 조직도 결국 사람이 모여서 만들어진 곳이죠. 오히려 법과 가깝다 보니 법의 한계를 피부로 느끼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요?]
[법의 한계와 굴레, 비현실성에 질려버리면 비질란스 같은 자경단을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보게 되죠.]
[개연성이 있네요.]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렇게 한 마디 했다.
[잘 알고 계신 거 보니까 위버멘쉬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잘 아나 보네요.]
[……하하.]
요하네스가 곤란하다는 듯이 웃자 경완은 굳이 캐묻진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위버멘쉬는 처음엔 빌런 집단으로 규정되었다.
[아무튼, 덫이 실패해서 데려올 텔레파시 능력자가 생긴 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아무에게도 말 안 한 거 맞습니까?]
[네, 맞다니까요.]
[얼마 전에 불씨재단이라는 곳에 방문한 것으로 아는데요.]
경완의 머릿속에 빨간 등이 들어왔지만 겉으로 드러난 태도는 침착했다.
[그동안 돈만 넣고 한 번도 안 가봤거든요. 그래서 혹시나 제 돈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진 않나 한 번은 확인해 봐야 했어요.]
[경완 씨는 돈에 초연한 줄 알았는데요?]
[돈이야 벌면 되지만, 제 돈이 탐욕만 그득한 놈들 목구멍으로 들어가면 기분 더럽잖아요.]
[그렇군요.]
[그나저나 국가기관에도 비밀로 했는데 어디서 정보가 샜다고 생각하신다면 한 번쯤 내부를 챙겨보는 게 어떨까요?]
대놓고 연막을 치는 말에 요하네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걸 염려했기 때문에 제가 직접 챙긴 일입니다.]
[에이~ 사람이 어떻게 100% 장담할 수 있겠어요.]
사정을 아는 사람이 봤다면 경완을 두고 악마 같은 놈이라고 했을 것이다. 의심암귀라고 현란한 혓바닥으로 사람의 마음에 의혹을 심으려고 하다니 말이다.
하지만 이는 불씨재단으로부터 요하네스의 의혹과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경완 나름의 필사적인 똥꼬쇼라 할 수 있었다.
[흐음.]
요하네스가 고민에 잠길 때 마리아가 나왔다.
“준비 다 됐어요.”
“넵.”
텔레파시 연결을 할 준비가 끝났다. 경완은 생각에 잠긴 요하네스 앞을 도망치듯 벗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방바닥 가운데 사만다가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마치 명상을 하듯 앉아있었다.
경완이 초감각을 발동하자 그녀의 주변에 S입자가 마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아지랑이 중 몇 줄기는 패스처럼 길쭉하게 늘어져 사만다의 팔뚝을 구렁이처럼 감고 있었다.
경완이 마리아에게 물었다.
“준비가 좀 거창해 보이는데요. 좀 더 가볍게 할 수 없을까요?”
그녀가 대답했다.
“안전을 위해서예요. 복잡하면서도 명확한 이미지, 정보를 전달하려면 텔레파시 심도가 깊어지고, 필연적으로 정신오염의 가능성이 높아져요. 사만다가 이렇게 시간을 걸려 준비를 한 건 그이 정신오염을 필터링하기 위해서였어요.”
단순 언어와 그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왜냐면 언어라는 것은 극히 추상화된 정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텔레파시를 통해 보내는 정보가 구체화되면 구체화될수록 그것을 전달하려는 패스 역시 굵어져야 했다.
이는 필연적으로 정신의 직접적인 연결을 가져오는데, 인간이란 존재가 항상 맑고 깨끗한 존재가 아니다 보니 정신오염이라고 불리는 증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타인의 기억이 마치 자신의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이러한 정신오염의 대표적인 증상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기억 중에 트라우마나 우울증 같은 정신적 문제의 원인이 되는 것이 있다는 점이었다.
기억과 그것으로 인해 발현된 심상, 감정은 거의 한 덩어리나 마찬가지고, 정신오염은 이것이 전염병처럼 상대에게 전염되는 현상이었다. 경완이 남미의 정글에서 컬트 마피아들을 소탕할 때 경험했던 밴시의 비명도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한, 일종의 정신오염형 기술이라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제 손을 잡으세요.]
사만다가 입을 열자 경완은 그녀의 오른편, 마리아는 그녀의 왼편에 앉아 손을 잡았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세요. 박사님은 마음을 비우고, 미스터 리는 전달하고자 하던 기억을 최대한 명확하게 떠올리세요.]
경완은 충실히 그 지시를 따랐다.
사만다의 팔을 휘감고 있던 패스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던 경완의 팔을 마치 뱀처럼 휘감고 올라와 머리까지 닿았다.
그리고 경완은 기묘한 연결을 느꼈다. 오감도 아니고, 그렇다고 S입자로 느끼는 초감각도 아니면서, 타인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감각.
그것이 깊은 심도의 텔레파시, 정신연결이었다.
그 상태에서 경완은 자신이 떠올린 코어 구조의 기억을 누군가 핥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억을 핥다니 좀 표현이 이상하지만 그 기묘한 감각을 표현하기엔 이보다 더 적당한 단어는 없었다.
불쾌하면서도 묘하게 자극적인 그 감각은 그가 떠올린 코어 관찰의 경험을 모두 핥은 후에야 멈췄다.
사만다가 두 사람을 손을 놓은 것도 그때였다.
[후우~ 끝났어요.]
지친 듯 한숨을 내쉬는 그녀를 마리아가 칭찬했다.
[수고했어요. 이렇게 편리한 줄 알았다면 진즉에 하는 건데 제가 너무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나 봐요.]
그러자 사만다는 고개를 저었다.
[원래 이렇게 편리하지 않아요. 거의 대부분 쓸데없는 잡념도 같이 딸려오거든요.]
그러면서 그녀는 경완을 묘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중에는 성욕에 관련된 것도 있죠. 남성분이 이렇게 집중을 잘하는 것도 신기하네요.]
[경완 씨가 학습능력이 좋은 이유가 있네요. 집중력이 그렇게나 좋으니,]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양복 정장과 바지를 입어도 감추어지지 않는 사만다의 훌륭한 미드와 다이너마이트 바디 앞에서 속으로 야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 끝났죠? 이제부터 저 쉴 거예요.]
경완은 마리아가 쓸데없는 말을 더 하기 전에 얼른 쫓아내기로 했다. 물론 쫓아내고 싶은 건 그녀 혼자만은 아니었다.
[자자. 모두들 수고하셨고, 코어 연구에 많은 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번이 끝이 아닐 수도 있어요.]
[네?]
경완이 반문하자 사만다가 말을 이었다.
[기억이라는 건 왜곡되게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최소 세 번은 더 이미지를 전달해야 정확하게 전달이 가능할 거예요.]
[그럼 오늘 이러는 것보다는 연구소로 가서 하는 게 낫지 않았나요?]
[물론 그편이 좋기는 하겠지만, 박사님이 정보를 소화하는 시간도 필요하거든요.]
그녀는 이런 일을 몇 번 해본 적이 있다며 인간 기억의 불완전성에 대해서 몇 마디 말을 꺼냈다.
경완이 으~하고 인상을 찌푸리자 마리아가 서둘러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최대한 열심히 기억을 소화해 볼 테니까. 기억이 흐릿하거나 확실하지 않을 때 부를 테니 그리 고생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전혀 위로가 안 되는 말에 경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럼 그때 봐요.]
얼른 나가.
* * *
마리아와 위버멘쉬 사람들을 내보낸 경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위버멘쉬의 창립자 요하네스. 생각보다 직감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거기에서 자신을 의심하다니. 하마터면 식겁할 뻔했다.
과연 세계구급 조직을 창립한 사람다운 역량이랄까?
하지만 상황을 보니 골치 아픈 일은 일단락된 것 같았다.
무한전생-더 빌런 18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