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211화
20-오버맨 엔트리
경완은 배가 그리 고프진 않지만 타냐가 내민 붕어빵을 우걱우걱 씹어 볼에 넣고는 소녀를 향해 어눌한 어조로 말했다.
“레즈거.”
입안에 음식물을 집어넣은 채 말하는 경완의 모습이 퍽 어른스럽지 않은지 소녀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지만 소녀는 본인이 이 먼 이역만리까지 찾아온 이유를 한 번도 잊은 적 없었다.
하지만 첫날은 결국 별 소득이 없었으니, 경완의 입장에선 관광이나 다름없었다.
짙은 선글라스로 얼굴의 반을 가리며 백인소녀와 함께 돌아다니는 그의 모습은 종종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지만 커다란 선글라스로 코 위쪽을 가리고 있어서인지 사람들은 그가 이경완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마치 누구나 마스크를 쓰면 미남미녀 같은 느낌을 풍기는 것처럼 인상이 바뀌기 때문이랄까?
그렇게 며칠 집에 돌아가지 않자 미연과의 통화시간이 길어졌다.
[언제 돌아와?]
“글쎄? 이 미친놈을 잡거나, 이 시간을 내가 의미 없다고 느낄 때?”
[그놈 빨리 잡았으면 좋겠다.]
미연은 경완이 보고 싶기는 했지만 그가 언급한 미친 빌런이 멀쩡히 돌아다니는 것도 싫었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많은 피해자가 나오겠는가?
그녀는 경완에게 몸조심하라는 당부와 함께 통화를 끝맺었다.
[사랑해.]
“응, 나도.”
경완은 그렇게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지만 본인이 정말 그녀를 사랑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미 누군가를 사랑이란 이름으로 품기엔 감성이 너무 마모되었다랄까?
다만 그녀를 위해 뭔가 해주기로 결심했기에 그녀를 위한 대답을 들려주었을 뿐이었다.
설사 부부사이라 할지라도 비밀은 있는 법이고, 그래서 가식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위선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위선자조차 되지 못하는 인간은 즐비했으니, 경완은 자신 정도면 충분히 양심적이 인간이라 생각했다.
“!#$!”
“응?”
그가 폰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자 옆에서 타냐가 뭐라고 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반문하자 소녀는 간단한 영단어로 대답했다.
“Liar.”
흥미로운 대꾸였다.
경완의 머리엔 소녀가 에스퍼라는 사실이 스쳐지나갔는데, 아마 자신이 진심을 담은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걸 느낀 모양이었다.
그런 것도 느끼다니 단순한 에스퍼는 아닌 것 같았다.
혹시 에스퍼가 아니라 타인의 정신을 느끼는 텔레파시스트가 아닐까? 에이, 설마. 그냥 타인의 거짓말에 예민한 거겠지.
타고나길 타인의 거짓말을 잘 파악하는 사람이 있었다. 감각이 뛰어난 에스퍼라 그럴 가능성도 높고.
뭐, 중요한 것도 아니라 경완은 잡념을 털어냈다. 에스퍼든 텔레파시스트건 보야라는 놈만 잘 잡으면 그만.
그리고 거짓말쟁이가 뭐 어때서? 거짓말은 인간의 본질이었기에 경완은 서슴없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다.
“Yes, I am.”
그러한 대답이 기가 찼는지 소녀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경완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앞을 향해 턱짓했다.
“Let’ go.”
직역하자면 ‘가자’는 뜻이었지만 소녀와 경완 사이에선 어느새 보야 사노비치 탐색활동을 하자는 의미가 된 말이었다.
그 말에 타냐는 별말 없이 거리를 걸었고, 그날도 소득은 없었다.
* * *
특이사항이 걸려든 건 경완이 청진시에 들어온 지 일주일쯤 되는 날이었다.
낮에 소득 없이 돌아온 타냐와 경완이 척살대의 다른 이들과 트럼프 카드로 도둑잡기를 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미하일이 굳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경완 씨.”
“드디어 꼬리를 잡았나요?”
“실종자가 급증했습니다.”
여전히 혼란스런 북한이라지만 그래도 주요 인프라가 깔린 도시는 어느 정도 치안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며칠 새 청진시 내에서 실종신고가 급증했다.
“놈이 움직인 겁니까?”
“이건 놈의 방식이 아니지만 확인할 필요는 있습니다.”
놈은 한 번에 대량의 피해자를 내지 않는다.
소수의 희생자를 잡아다가 그들의 고통과 절망을 음미하듯 즐긴다. 이렇게 여럿을 납치하는 건 놈의 방식이 아니었다.
경완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함정일지도 모르죠.”
만약 놈이 연속실종 사건의 배후에 있다면 그런 짓을 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현재로서 가장 유력한 이유는 자신을 쫓는자들을 유인해 함정에 빠뜨리려는 것이 아닐까?
그런 경완의 의견에 미하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만 저희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함정인 것 같아도 미끼를 물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놈을 쫓을 단서를 얻기 위해서라도 그렇고, 피해자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그랬다.
경완도 동의했다.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으니까요.”
미하일은 경완의 말을 들으며 손에 쥔 카드를 유심히 보고 있는 타냐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에 담긴 의미에 경완이 입을 열었다.
“걱정돼요?”
“네, 그렇습니다.”
그의 걱정은 단순히 소녀의 안전에 대한 것만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까지 뻗어 있었다.
복수심으로 여기까지 온 소녀는 그 또래가 누리는 일상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이번 일이 끝나도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경완은 딴에는 위로랍시고 이렇게 조언했다.
“인생은 원래 거지 같은 겁니다. 하지만 쟤 인생이 그렇게 나쁜 것만 같진 않네요. 댁처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죠.”
“……하지만 제가 저 아이의 인생을 책임질 순 없잖습니까?”
“와~ 인생을 책임질 생각이었어요? 생각보다 더 좋은 사람이었네?”
경완은 놀란 표정을 짓다가 순식간에 표정을 지우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오만한 호구던가.”
“그게 무슨…….”
“부모조차 제 자식의 인생을 온전히 책임져 주지 못해요.”
지 욕심과 꿈을 자식에게 투영하는 못난이를 제외하고서라도, 자식 잘되라고 돈과 노력을 처발라도 생각처럼 안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결국 인생은 본인이 책임지는 거고 그건 11살 난 어린애라도 예외는 없어요.”
“…….”
“그냥 피 한 방울 안 섞인 어른으로서 할 수 있는 것만 잘 구분해서 하면 됩니다. 거기서 더 나가는 건 오지랖이고 서로에게 악영향만 끼칠 거예요.”
그렇게 말한 경완은 혀를 찼다. 그렇게 말해놓고 왜 정작 자신이 이렇게 오지랖을 부리는지 말이다.
미연 때문에 얼어붙었던 감성이 말랑말랑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건 별로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씁쓸해하는 표정을 짓는 미하일을 보며 경완이 입맛을 다시고는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서 지금 놈을 잡으러 가나요?”
“네.”
미하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함정이라면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밤에 움직이는 게 나았으니까.
그 말에 경완은 타냐 보며 안타깝다는 듯이 한마디 했다.
“잠을 잘 못 자면 키가 제대로 안 자랄 텐데. 고생해라.”
“…….”
“……?”
그 말에 미하일을 굳이 그런 말을 해야 하나 살짝 어이없어졌고, 타냐는 경완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위해 한국말을 할 줄 아는 동료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 동료는 이걸 통역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 장면에 미하일은 불안해졌다.
이 팀. 문제없을까?
* * *
“!%[email protected]#$”
“그래, 그래. 사람이란 자고로 염치가 있어야 하는 법이지.”
미하일이 운전하는 차에 탄 타냐와 경완은 집단적 독백을 하고 있었다.
타냐는 한국어를, 경완은 러시아어를 못 하니 필연적인 결과일 수도 있지만, 미하일은 애써 두 사람을 외면하며 운전했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의 집단적 독백이 끝난 건 가장 최근에 실종된 실종자의 집에 도착해서였다.
“다 왔습니다.”
미하일의 말에 경완이 타냐와의 집단적 독백을 멈추고 차에서 내렸다.
타냐도 입을 꾹 다물고 차문을 열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미하일은 앞장서서 실종자의 집, 독신자 아파트에 들어섰다.
한 공장의 여공으로 일하고 있던 실종자는 어느 날 출근하지 않았고, 무단결근에 상사가 전화를 걸었지만, 이틀 동안 전화가 계속 꺼져 있는 것에 이상함을 느끼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리고 경찰은 실종자의 좁은 아파트에서 침입과 몸싸움의 흔적을 발견했다.
주민들의 불안 때문에 연속실종사건이라는 점을 밝히진 못했지만 러시아 측과 이야기된 국정원이라 미하일은 관련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타냐.”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간 미하일이 타냐를 불렀다.
소녀는 조용히 현관으로 들어가 눈을 반개하고 정신을 집중했다. 등까지 내려오는 소녀의 금발이 둥실둥실 살짝 떠오르다 가라앉았다.
“타냐?”
끄덕.
미하일의 부름에 타냐는 그와 시선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로 돌아 현관을 나왔다.
긴장하고 가라앉은 둘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보야가 실종사건의 범인이었던 모양이었다.
경완은 초감각을 돌리며 타냐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면서 미하일에게 물었다.
“문득 궁금한 게 있는데, 쟤는 어떻게 놈의 흔적을 추적하는 거죠?”
경완은 추적할 상대의 체취가 있으면 그것을 쫓을 수 있었다. 다만 천리안 장비의 지원을 통해서 말이다.
저 타냐라는 소녀도 비슷한 방식일까?
하지만 미하일이 설명하는 바는 조금 달랐다.
“타냐의 말로는 공간의 자취를 따라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는군요.”
“그게 가능한 건가요?”
“놈의 더러운 광기? 욕망의 냄새? 그런 게 남아있다고 합니다.”
비유적인 의미인지, 진짜 그런 것이 공간에 남는 건지 알 수 없었기에 경완은 더는 묻지 않고 얌전히 소녀의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10분쯤 이리저리 움직이자 경완은 답답해졌다. 벌써 청진시에 온 지 일주일째.
그동안은 단서가 없었기에 킬링타임과 휴양을 즐기는 심정으로 참아왔지만, 이렇게 놈의 흔적을 발견하고 나서도 추적하는 속도가 느리니 답답했다.
다른 의견도 있겠지만 다른 의견은 다른 의견일 뿐 그의 의견은 아니었다.
그는 소녀를 목덜미를 잡고 들어 올렸다. 소녀의 발바닥을 초능력으로 받혔기 때문에 괴롭지는 않았지만 그를 돌아보는 소녀의 눈매는 사나웠다. 새끼고양이 취급을 해서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경완이 입을 열었다.
“너무 느려. 방향만 가리켜.”
미하일이 서둘러 경완의 말을 통역해주자 소녀는 찌푸린 표정 그대로 손가락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그러자 경완은 날듯이 움직였고, 덕분에 소녀는 빠르게 흔적을 쫓느라, 미하일은 또 그런 두 사람을 쫓느라, 따라오는 팀원들은 또 그런 그들을 쫓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청진시 외각의 한 폐가. 뒤로는 황폐한 숲과 산이 있었다.
미하일은 척살대에 대기를 지시한 후 경완에게 고개를 돌렸다.
“놈이 저기에 있을까요?”
“음. 없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그걸 아십니까?”
“저기에 딱 한 명 있는데, 여자예요.”
“그렇군요.”
보야 사노비치는 남자다.
미하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폐가를 향해 한 걸음 뗐을 때 경완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미하일이 경완을 향해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보야 그 새끼는 없지만 납치된 실종자를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저기 근처에 함정이 깔려있어요.”
“예상한 일 아닙니까?”
연속실종에 놈이 연관되어 있다면 목적은 유인. 그렇다면 함정이 깔려있다는 건 충분히 예상범위 안이었다.
하지만 경완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놈이 없잖아요. 그런데 함정으로 들어가 봤자 놈의 경각심만 자극할 거예요.”
그 말에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무전으로 폐가를 포위한 동료들에게 더 접근하지 말고 물러나라고 전달했다.
하지만 그러한 지시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었으니.
“타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