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214화
21-검은 머리 짐승
[물질의 물성에 영향을 주는 능력자를 말합니다. 귀국에도 한 명 있지 않습니까? 자화(磁化) 능력자라고.]
“아아.”
[이번에 보고받은 설치형 초능력이 그걸 바탕으로 설계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그런 능력만 있는 건 아니죠. 놈의 역량이 최대한 발현되기 전에 처리한 것은 현명한 결단이었습니다.]
경완은 입맛을 다시며 말을 아꼈다.
놈이 건방지게 정신연결을 해서 심연을 잠깐 맛보여 주었다가 간단히 처리되었다고 말할 순 없었다. 그런 대꾸엔 말할 순 없는, 혹은 꺼내봤자 소용없는 부연설명이 뒤따르기 마련이었으니까. 무한전생이란 사실을 말해줘서 상황이 좋아지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요하네스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튼, 이걸로 러시아 진출의 단초를 마련했습니다. 북동아시아에 저의 위버멘쉬의 영향력은 더욱 증대되겠죠.]
“번창하길 바라요.”
경완은 입에 발린 말을 해주었다. 국회의원 허리에 칼침 박은 인간이라도 딱히 결격사유가 없는 권력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요령쯤은 있었다.
요하네스는 경완의 덕담에 자신도 경완의 일신이 평안하길 바란다는 덕담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때 마침 타이밍 좋게 식사가 차려졌다.
그런데 식사가 끝나고 나서 미연이 경완의 손목을 잡고 침실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왜?”
“알면서~”
미연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경완을 침실로 밀어 넣고는 문을 닫았다.
일주일 동안 많이 외로웠던 모양이었다.
* * *
21-검은 머리 짐승
경완이 절정급 미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남자들이 부러워할 삶을 살고 있을 때 세상의 혼란은 더욱 짙어졌다.
식자들 사이에선 지금의 상황이 뉴노멀이냐 아니면 뉴노멀로 가는 과도기냐로 말이 많았다.
과도기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초능력자와 각성에 대한 제도가 아직 미미하기에 제도적인 정비와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언제든 평온을 되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지금이 뉴노멀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세상은 항상 분쟁 중이었으며, 각성과 초능력은 그 분쟁을 그간 분쟁을 남에게 미루던 이들에게 도로 가져왔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제3세계와 개발도상국들을 착취하던 소위 선진국, 강대국들에게 말이다.
그들의 설명은 이러했다. 과거 식민제국주의 시절의 유산들은 오늘날 분쟁의 상당한 부분을 만들어낸 원흉으로, 대표적으로 열강들이 제멋대로 그어놓은 아프리카의 국경과 깔아놓은 분쟁의 씨앗들은 제노사이드의 시발점이자, 착취의 기반이었다.
그때 선진국들이 뿌려놓은 씨앗은 현재 그대로 착취의 빨대가 되어 제3세계의 부를 빨아들이고 있으며, 선진국들은 이 부(富)로 자신들의 평화를 유지하면서 빈부갈등을 제3세계 떠넘겨왔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분쟁과 혼란을 제3세계로 미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제3세계가 선진국들의 경제적, 이념적, 혹은 도덕적 쓰레기통이 되어 있는 상황이 초능력과 각성이 있는 지금의 새로운 세상에선 유지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왜냐면 불만을 품은 개인들이 스스로 그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니까.
제3세계를 착취해 얻은 성과조차 소수가 독점하는 체제에 불만을 품거나 반감을 가지는 이들이 있을 거라는 건 당연했고, 끝없이 빌런이 탄생할 것이라는 게 그들의 관점이었다.
대중들에게 이 뉴노멀이냐 과도기냐 하는 입씨름은 그저 대가리에 먹물 든 자들의 유희, 혹은 대중들의 지적유희를 만족시켜 줄 매스컴의 자본주의에 불과할 수 있지만, 사실 그 입씨름은 생각보다 더 중요한 싸움이었다.
프레임을 누가 주도하느냐? 프레임에 따라 대중의 행동이 변화하기 때문에, 이 배부른 자들의 지적유희는 단순한 유희로 치부할 순 없었다.
이런 프레임의 싸움은 앞으로의 변화를 예견한 자들의 준비단계이기도 했다.
그리고 변화는 러시아에서 시작되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켰다. 러시아가 금방 우크라이나를 제압할 것이란 예상과 다르게 우크라이나의 분투로 전쟁은 빠르게 끝나지 않았고 지지부진했으며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가 났다.
우크라이나 측의 뜻밖의 선전에 반러시아 정서가 더해졌고, 서방세력이 대대적인 지원을 검토할 때쯤 이변이 일어났다.
[쿠데타 발생! 흐틴 사망!]
러시아의 독재자 흐틴이 죽어버린 것이다.
많은 이들은 쿠데타의 배경에 전쟁을 강행한 흐틴에 맞서 서방의 경제재재로 인해 고통받고 불만을 가지게 된 이들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이들은 다른 견해를 내놨다. 흐틴의 사망에 위버멘쉬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혹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러-우 전쟁이 있었다. 전쟁 초기, 위버멘쉬 소속의 초능력자들이 상당수 의용군으로 우크라이나 측으로 참전했는데, 이에 흐틴 역시 위버멘쉬에 위버멘쉬-러시아에 있는 위버멘쉬 소속의 초능력자를 러시아 측 의용군으로 보내달라고 했다는 소문이 잠시 나돌았던 것이다.
그리고 위버멘쉬는 의용군 참여는 각자의 자유이고 자신들은 그러한 강요를 할 자격이 없다며 그러한 제안을 거절했다는 말도 함께 말이다.
소문의 사실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확실한 건 우크라이나에 초능력 의용병들이 하나둘씩 참전해 러시아의 진격에 적지 않은 애로사항을 주는 반면에, 위버멘쉬 러시아 지부는 중립을 유지한 채 수수방관했다는 사실이었다.
이에 열 받은 흐틴이 위버멘쉬-러시아 법인에 대한 취소를 지시 내렸는데, 그 지시가 흐틴의 사망과 함께 붕 뜬 상황이라는 것.
이러한 정황이라 그런지 흐틴을 죽인 쿠데타 배후에 위버멘쉬가 있다는 음모론이 퍼지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모두에겐 그것이 좋아 보였다. 전쟁은 멈췄고 에너지 및 식량 시장은 불확실성이 제거되어 안정을 되찾았으며 러시아는 민주주의의 싹을 틔울 수 있게 되었으니까.
물론 이는 지나치게 서양측 관점에서 본 낙관론이었다. 러시아 내부에서는 흐틴이라는 강력한 리더쉽의 부재로 인한 혼란을 걱정하고 있었다. 아니 십중팔구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다. 흐틴의 리더쉽을 대체할 인재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는 흐틴이 그동안 그의 정적이 될 만한 이들을 수시로 숙청하고 제거해 왔기 때문이지만 흐틴의 지지자들은 그것을 흐틴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쿠데타 세력에 책임을 물었다.
폭력시위가 연이어 일어나고 소요사태로까지 번질 기미를 보일 때 위버벤쉬가 나섰다.
공식적으로는 위버멘쉬에 소속만 둔 유령회원들이었지만 그들이 과격 폭력 시위를 진압한 성과를 본 이들 중엔 위버멘쉬 대변인의 공식발표를 믿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광역으로 기압을 낮추어 호흡곤란으로 시위대를 기절시킨 초능력자, 약효증폭이란 듣도보도 못 한 능력으로 시위대를 수면에 빠뜨린 초능력자.
이러한 뛰어난 초능력자의 등장에 러-우 전쟁 때 조국을 돕지 않고 왜 수수방관했냐고 분노를 터뜨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시위 제압에 한 손 보탰던 초능력자들 단지 폭동으로부터 자신들의 재산권과 시위대 및 경찰의 안전을 위해 끼어들었다는 명분을 내밀었으며, 러-우 전쟁 운운하며 애국심이 없다는 비난엔 자신들은 반전주의자이기에 독재자의 일방적 의사결정에 따른 전쟁에 동원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반박했다.
그들의 말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졌던 이유는 독재자와 초능력자 사이의 갈등이 새삼 특별한 이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독재 국가가 많은 제3세계에서는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었고, 위버멘쉬 소속의 초능력자들이 그런 독재정권과 자주 충돌을 빚거나 뒤엎는 일도 대중에겐 그리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그저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러시아였기에 새삼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을 뿐.
논리적으로 생각해 봐도 당연한 일이었다. 비단 초능력자만이 아니라, 자본, 지식 등 스스로 자유를 추구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개인에게 독재자란 존재는 자유를 억압하려고 드는 잠재적 위협에 불과했다. 하물며 강력한 초능력자는 어떻겠는가?
비단 위버멘쉬가 아니라도 독재자나 억압적 정부에 반발하는 초능력자의 사례는 얼마든지 널려 있었다. 그저 위버멘쉬의 규모가 커서 그러한 양상이 두드러졌을 뿐.
[그래서 러시아의 본격적인 민주화가 가능해졌습니다. 여전히 남아 있는 장애물들이 있지만 곧 해결될 거라고 봅니다.]
경완은 왜 자신이 요하네스로부터 러시아의 내밀한 비밀들을 들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용건이 어떻게 되시나요?”
[딱히 용건은 없고 그냥 말하고 싶은 상대가 경완 씨밖에 없어서 말이죠.]
“……그, 뭐시냐. 상담사를 고용해 보시죠?”
[제가 상담사를 고용하면 그 상담사는 무슨 위협을 받을지 모릅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전 세계 첩보기관들이 주목하는 사람이기도 해서요.]
협박, 회유, 납치, 신문(訊問).
위버멘쉬 총수의 상담사가 당할 거라 상상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럼 저는요?”
[누가 감히 미스터 리를 겁박할 수 있겠습니까? 자살 희망자가 아니라면요.]
“철없는 애송이가 괜한 욕심에 일을 저지를 수 있잖습니까?”
[음. 제가 알고 있는 미스터 리의 현재 스케줄을 생각하면 그런 애송이들은 무료한 생활을 자극하는 활력소가 충분히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데요.]
“…….”
경완은 할 말을 잃었다. 몇 번을 느꼈지만…… 이 인간, 나를 너무 잘 안다.
경완은 이렇게까지나 자신이 주목받는 현실에 입맛을 다시면서도 한편으론 다른 나라도 그가 어떤 인간인지 요하네스가 말하는 수준으로 프로파일링이 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에 긍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적어도 국가기관 같은 곳에서 대가리 텅텅 빈 티를 낸 수작의 가능성은 줄어들지 않았는가?
“그럼, 이런 전화는 괜찮아요?”
[암호화하고 있어서 괜찮습니다. 저희 쪽에 능력 좋은 사람도 많고요.]
요하네스는 잡담이 다 끝났는지 마지막으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세상이 일이란 상승이 있으면 하강도 있죠. 한국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지금 평온을 누릴 때 최대한 누리시는 게 현명할 겁니다.]
“혹시 뭔가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예감이 그렇다는 겁니다. 슬슬 탐욕에 젖은 기득권자들이 제 몫을 주장할 것 같거든요.]
“그렇군요.”
경완은 그런 거라면 자신과 별로 상관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기득권하고 얽힌 일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생각이 틀렸다는 생각이 든 것은 저녁 뉴스를 보고 나서였다.
[서울 참사의 책임은 구국의 영웅에게 있었다?]
[김마리아 소장의 위선!]
[100만 유족들, 김마리아 소장에게 소송!]
마리아 소장과 서울 참사와의 관련성을 매스컴에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한 번 의혹이 터지자 봇물처럼 뉴스기사가 쏟아졌다. 그중에는 사실도 있었지만 경완이 보기엔 그저 여론을 부풀리기 위한 날조와 허풍이 적잖이 섞여 있었다.
거짓말을 하려면 사실과 허구를 적당히 섞어야 한다는 원칙을 충실히 지켰달까, 과연 기레기답다고 할까?
경완은 웬만하면 손절하고 싶었지만 마리아 소장과 얽힌 일이 하나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걱정되어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 본인에게까지 불똥이 튀면 어떡하나?
하지만 계속 통화 중이라는 음성만 들려올 뿐 연결이 되지 않았다. 전화기에 불이 날 정도로 전화가 계속 들어오는 걸까?
차라리 직접 만나서 얘기를 하는 편이 더 나은 것 같았기에 경완은 야밤에 신을 신고 나섰다.
“오빠, 괜찮겠어?”
경완을 배웅하는 미연의 표정은 복잡했다. 논란이 되는 사람과 얽히러 가는 것 같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안면이 있는 이가 서울 참사, 아니 삼촌 같았던 김길상 대표의 죽음에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일까?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머리가 복잡했다.
하지만 확실히 말해줄 것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