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222화
22-뉴 오더
이후 일어난 일은 경완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서울 참사를 이용해 먹으려고 했던 건설업체 사장님들은 제 발이 저려서 어떻게든 발을 빼려고 했고, 그런 사장들을 추스르고 모아서 어떻게든 정치권에 영향력을 가해보려는 회장님도 있었고, 그런 업계를 대변해 보려는 민심 못 읽는 정치인도 있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대체로 마리아 소장 측의 판정승이었다.
그녀를 옹호한다기보다는 청문회의 순수성(?)을 더럽힌 자들에 대한 분노가 컸지만, 일단 그녀에 대한 동정적인 여론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서울 재건과 피해자 구제를 위한 그녀의 헌신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녀를 옹호하는 자들은 그녀의 가장 큰 공헌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제공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절망에 빠졌을 때 그녀가 마치 한 줄기 빛처럼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지 않았다면 그때 당시 사람들이 재건의 의지를 다질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의구심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고, 일단 마치 성녀 잔다르크처럼 그녀를 떠받치던 분위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그녀에겐 오히려 기꺼웠다. 서울 참사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속죄를 위해 서울 재건에 전력을 쏟았던 그녀에게 사람들의 고마움은 오히려 죄책감을 더 무거워지게 만든 짐이었으니까.
[……평생 속죄하며 살겠습니다.]
그 와중에 그녀가 다시 기자회견을 연 건 경완의 추천이었다. 이 좋은 기회에 솔직하게 심경고백을 하고 다 털고 가라고 말이다.
누군가는 이것이 서울 참사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고백한 것이 아니냐며 다시 그녀에게 화살을 돌리려고 했지만, 솔직히 여자 하나, 과학자 한 명 때문에 이웃나라에 핵을 터뜨리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논리에 묻혔다.
경완이 위버멘쉬와 합작한 청문회 물타기 때문에 서울에 핵이 터진 사건의 전모가 잘 알려지지 않은 덕분이었다.
거기에다가 유가족들을 지원하기 위한 무려 1조 원 규모의 재단을 설립한다는데 거기에 초를 치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한 건 해결했네.”
경완은 마리아 소장의 기자회견을 다 보고 난 후에 일단 안심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난 후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책감과 죄의식이란 폭탄을 내려놓았으니 경완도 애꿎은 파편이 자기한테까지 날아올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야옹!”
치즈가 앞발로 경완의 손을 툭툭 쳤다. 그새 쓰다듬던 손이 멈췄으니 얼른 정신 차리고 쓰다듬으라는 뜻이었다.
경완은 어이없어하면서 결국 무릎 위에 엎드려 있던 치즈를 쓰다듬어줬다. 그러자 다시 눈을 감으려 고로롱거리는 치즈. 귀여우면 단가?
그때 전화가 울렸다. 요하네스였다. 이 양반이 왜 또 전화를 걸었지?
경완은 한 손으론 치즈를 쓰다듬으면서 다른 한 손에 전화기를 쥐었다. 이 요망한 고양이는 전화는 한 손으로도 충분히 쥘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네, 총수님.”
요즘 너무 자주 연락하시는 거 아닙니까?
경완은 말을 아꼈다. 요즘 위버멘쉬가 한국에 투자하는 상황이 심상찮게 흘러갔기 때문이다.
청문회 이후 재계 서열 5위권 안에 드는 기업들이 일제히 위버멘쉬와 업무협약을 맺고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초능력 공학에서 선두권에 있는 한국과 위버멘쉬의 초능력 인재풀, 육성 노하우의 결합은 서로가 윈윈할 수 있다면서 말이다.
한 마디로 한국에 대한 영향력이 높아지고 있는 조직의 총수가 경완과 친하게 지내려는지 자주 연락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경완으로서는 적당히 호응해 주는 편이 나았다. 당장 자신을 이용해 먹으려고 드는 것도 아니고 립서비스 몇 마디 해주는 거야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어진 요하네스의 말도 이러한 관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간략한 일상토크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한 다음에 경완을 칭찬했다.
[이번 닥터 김이 기자회견을 하도록 경완 씨가 응원해줬다고 들었습니다. 아주 잘하셨어요.]
“아이, 뭐 제가 잘한 게 있습니까? 그냥 모든 게 순리대로 흘러간 거겠죠.”
순리는 개뿔.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나? 그저 요하네스 듣기 좋으라고 한 말에 불과했다.
요하네스 역시 순리라는 단어를 믿지 않는 듯했다. 아니 싫어하는 듯했다.
[순리나 운명 따위는 인간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항상 운명에 거역하려고 하는 거죠.]
코인이나 주식하는 사람들을 봐라. 비루한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 한 줄기 희망을 걸고 코인과 주식판에 뛰어들었지만 그들 중 소수의 운 좋은 사람만이 기회를 붙잡고, 나머지 대다수는 그저 더한 바닥으로 직행할 뿐이다.
비루한 운명을 거역하지 않고 순응하는 사람들이 차라리 더 현명해 보일 지경.
[세상은 항상 놔두면 일이 터지기 마련이죠. 화재를 잡는 가장 좋은 방법이 예방이듯,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해결하는 편이 언제나 현명합니다. 경완 씨가 닥터 김에게 기자회견을 제안한 건 꺼진 불씨도 다시 보게 하는 거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어요.]
“아유~ 남 일도 아닌데요.”
경완은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해주는 요하네스에게 겸양을 떨었다. 자신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이쪽이 부담스럽다는 걸 좀 알아줬으면 했다.
하지만 요하네스는 그의 입에 발린 말이 썩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남 일도 아니라…… 하하! 좋군요. 매우 좋습니다.]
좋긴 도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경완은 의아해했지만 요하네스는 기분이 업(Up)됐는지 말이 많아졌다.
[덕분에 우리 위버멘쉬가 한층 더 한국 사회에 스며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1조 원 규모의 지원 재단은 위버멘쉬 코리아의 탄탄한 기반이 되어주겠죠.]
“그러니까 그 돈 전부가 소장님 돈이 아니라는 건가요?”
[그녀가 가진 특허, 미래 가치 등을 모두 팔면 그 정도는 충분히 나오겠죠. 하지만 정말 그러는 건 어리석은 짓이죠.]
그녀가 자신의 현재 자산과 미래 자산을 다 팔아서 현금화하지 않도록 한 사람이 요하네스 자신이라고 밝혔다. 귀한 특허가 그녀가 아닌 엉뚱한 놈들 손에 들어가면 위버멘쉬 측이 골치가 아파지니, 차라리 그 부족분을 위버맨쉬, 아니 요하네스가 부담하기로 한 것이다.
경완은 혀를 내둘렀다.
“돈이 정말 많으신가 보네요.”
[운 좋게 투자로 큰돈을 벌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버셨길레..”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충분히 쓸 만큼은 벌었다고 생각합니다.]
경완의 머리에 강우빈 감독이 요하네스를 두고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예지 능력자라고, 그래서 선물 시장을 통해 어마어마하게 벌었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다지 부러운 느낌은 안 들었다. 너무 많은 돈은 항상 문제를 만드니까.
그런 의견에 요하네스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돈이 다가 아닙니다. 재단을 운용하는 것이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죠. 연구만으로 바쁠 닥터 김이 1조 원 규모의 재단을 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누구에게 맡겨야 하는데 과연 누가 믿을만할까요? 그래서 저희가 돕기로 했습니다.]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래서 한국에 스며들 탄탄한 기반이라는 말이 나왔구나 이해되었다. 마리아 소장에게 일어났던 일을 생각하면 한국에서 그녀가 1조 원 규모의 재단을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위버멘쉬에 1조 원 규모의 재단 운영을 맡기는 것이 차라리 합리적으로 보였다.
원래 위버멘쉬가 한창 방황하던 초능력자들을 모아 그들을 지원해 주었던 ‘지원’ 재단의 성격을 띠었기에 누군가를 지원하는 일에 풍부한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서울 참사로 인해 가족을 잃거나 재산을 잃은 이들 중 상당수가 일반인이라 초능력자를 돕고 지원하던 것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초능력이라는 비전을 가진 초능력자와는 달리 일반인은 자립을 위해서 더 큰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만큼 한국에서 위버멘쉬의 탄탄한 기반이 되어줄 건 불 보듯 뻔했다.
그러한 전략은 마치 재벌가에서 법조계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장학생을 키우는 것과 비슷했지만, 요하네스의 전략은 소수의 엘리트를 선정하는 게 아니라 폭넓은 서민층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달랐다.
아마 법조계 장학생을 육성하는 대기업 입장에서는 돈지랄로 보이겠지만, 초능력 인재가 기반이 되는 위버멘쉬의 입장엔 오히려 합리적인 투자였다. 일단 밖에서 굴러 온 돌이 박히려면 그만한 구덩이를 파야하고 거기엔 인심을 모으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누가 어떤 초능력을 각성할지는 어떻게 아는가?
어려울 때 내밀어진 도움의 손길은 비단 일반인이 아니라 미래에 초능력자가 될 사람의 뇌리에 강하게 박힐 것이다.
머리 검은 짐승이니 뭐니 해도, 뭔가 도움이 절박한 사람에 손을 내밀어줬다는 사실만큼은 결코 부정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럼 사업 번창하세요.”
경완은 위버멘쉬의 앞날을 빌어주었다.
미래가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위버멘쉬와 사이가 나쁘지 않으니 위버멘쉬의 세력이 한국에서 커지는 것이 경완 자신에겐 그리 나빠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요하네스의 태도를 봐도 이러한 우호관계가 금방 뒤집어지지도 않을 것 같기도 했고 말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슬슬 이 대화를 끝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느껴지지 않는가? 이제 슬슬 통화를 끝내자는 뉘앙스를 담은 단어와 문장 구성이?
요하네스는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의 용건이 다 끝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아참, 경완 씨 요즘 바쁘신가요?]
“딱히요?”
슬슬 미국에서도 초능력 독심술 수사 기법을 넓게 도입하고 있어서 경완에게 외주(?) 주는 일이 줄어들고 있었다.
진실의 스무고개만큼의 정확성은 아니지만 수사에 도움을 주기엔 충분할 정도라나?
그래도 정확성이 필요한 민감한 사항이나 신속한 수사가 필요하다거나 할 경우엔 경완에게 외주를 주기는 하는데, 그런 민감한 정보를 캐내야 하는 일이 자주 있진 않았다.
황사 방어 스마트 포스필드를 재개하겠다는 말도 아직 없었고, 소정의 사례금 대신 국정원의 외주를 받아 빌런급의 초능력 범죄자나 범죄조직을 소탕하려고 했는데, 그 보야인가 하는 놈을 잡고 난 후, 러시아 조직 사이에 이경완이 러시아 정부의 허락을 받고 국경을 넘어올 수도 있다는 소문이 퍼진 탓에 국경을 함부로 넘어오는 범죄조직이 줄어서 일도 줄어버렸다.
경완은 나중에 중국 단둥시에서 저지른 혈겁이 한몫했다는 소리를 국정원 직원으로부터 들었다. 돈이 좋아도 목숨보다 좋진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아. 이것이 일을 너무 잘해서 일거리가 사라지는 현상인가?
경완이 직장인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직장인이었다면 기껏 열심히 일해서 일거리 줄여놨더니 일을 더 주거나 할 일 없다고 잘렸을 테니까.
하지만 경완 정도의 다재다능한 능력자에게 일거리가 사라질 리 없었다. 댁이 클라이언트나 고용주라고 생각하면, 일 잘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일거리를 맡기고 싶게 마련이었다.
[딱히 할 일이 없으면 한 사람을 한동안 경호해 줬으면 합니다.]
“누군데요?”
[한 번 만나보신 적 있을 겁니다. 비스트 마스터라고. 고양이 한 마리 분양해 준 친구, 기억하시죠?]
“물론이죠.”
그게 언제적이라고 벌써 까먹겠는가? 치즈의 건방지고 요망한 요구사항을 들어줄 때마다 놈이 처음 집에 온 순간을 떠올리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