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225화
22-뉴 오더
[그럼 여기서 지내세요.]
바스티앙은 미연은 경완과 한방을 쓰기로 했기에 나머지 두 사람에게만 방을 따로 내어주었다.
일단 여섯 명은 바다에 놀러 온 사람답게 수영복을 입었다. 하지만 다들 허벅지를 반 이상 가린 레쉬가드였고, 이는 김봉남은 실망시켰다.
그는 그렇게 된 원인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왜요?”
“아니요.”
그의 시선에 경완이 이유를 묻자 김봉남은 얼른 시선을 돌렸다.
경완도 목과 팔목, 발목까지 덮는 레쉬가드를 입고 있었는데, 남들이 봤다면 전신수영복을 입은 수영선수로 보이지 바다에 놀러 온 사람으론 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경완이 그런 수영복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살 타는 게 싫어서.
바다의 태양은 상상 이상으로 뜨거웠다. 사방이 물이지만 물속에 들어간다고 피부가 안 타는 건 아니었다.
태양을 피하려는 경완의 방침에는 세 여자도 동의했다. 그녀들도 살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 휴가 이후엔 스케줄도 있었고.
결국 레쉬가드를 안 입은 이는 김봉남 한 명뿐. 바스티앙도 바다에서 할 일이 있어서 잠수복 혹은 레쉬가드를 입었다.
태양의 열기는 생각보다 훨씬 체력을 많이 소모한다나?
“꺄아아악!”
혹등고래의 등에 올라탄 세 여자는 즐거움의 비명을 질렀다.
거대한 고래 등에 올라타 파도를 가르는 경험은 누구나 쉽게 누릴 수 없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비스트 마스터와 교감하는 고래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정오부터 시작된 놀이는 두어 시간이 지나서 끝났다. 다들 실컷 놀았으니 체력이 떨어졌다. 일반인인 윤혜정과 이영미가 말이다.
“아~ 언니, 이거 엄청난 사치 맞지?”
윤혜정이 광역 회복 능력을 펼쳐주는 미연에게 묻자 미연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녀의 치유 능력은 비록 그리 강력하진 않아도 체력도 회복시켜 준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는 목숨이라도 붙여주는 공능의 부수적인 효과였다.
숨을 연명할 체력도 소진한 환자의 체력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해 주기 때문에 환자의 체력이나 칼로리를 소모하는 방식으로 더 빠른 효과를 가져오는 다른 치유능력과 차별되었고, 그래서 그녀의 능력은 나름 여전히 수요가 있었다.
특히 언제 숨이 끊어질지 모르는 장시간 대수술에서 그녀의 능력은 빛났다. 굳이 연예인을 하지 않아도 그 분야로 나가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였다.
“천국이다, 천국이야~.”
이영미가 그늘에 놓인 비치 의자에 누워 아저씨처럼 늘어지는 소리를 하며 여유로움을 만끽했다. 도도한 모델 같은 외모와는 다르게 털털한 면이 있었다.
그 와중에 김봉남은 예쁜 여인네들의 점수를 따보겠다며 요리에 들어갔고, 경완은 미연 옆에 높인 비치 의자에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그와중에 바스티앙은 새로 나타난 범고래 무리와 어울리고 있었다.
본인은 일한다고 하는데 여인네들은 저게 노는 건지 일하는 건지 아리송했다. 오직 그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대해 미리 들은 경완과 김봉남만이 이해했다.
“진짜 신기해. 비스트 마스터라고는 들었는데 저렇게 친하게 놀 수가 있나?”
이영미가 물 위로 솟구쳐 오르는 범고래와 그 등에 타고 있는 바스티앙을 보며 멍하게 중얼거렸다.
강화가 충분히 되었는지, 더 필요한 건 없는지 확인하는 과정이었지만 내막을 모르는 그녀로선 범고래와 노는 장면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윤혜정도 한마디 했다.
“소개팅이라고 해서 왔는데 이러면 그냥 바캉스잖아?”
“너희 나한테 빚진 거다?”
미연도 한마디 던지자 윤혜정이 받아쳤다.
“언니한테 빚진 게 아니라 형부한테 빚진 거겠지.”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도 모르니?”
경완은 아직 결혼 안 했다고 딴죽 걸 뻔했지만 속으로만 웅얼거렸다. 그들의 동거는 사실혼이나 마찬가지니까.
“잘났어, 정말.”
윤혜정은 입을 삐죽였다. 두 사람은 상당한 친분이 있는지 격의 없이 떠들었고 이영미도 끼어들었다.
“저 사람은 우리보다 고래가 더 좋은가 봐.”
아쉬워하는 한 마디와 함께 그녀의 시선이 고래와 함께 헤엄치며 소년처럼 웃고 있는 바스티앙을 향했다.
윤혜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둘의 목표는 동일했지만 정작 그 목표가 두 사람에게 이성적인 관심을 주는 것 같진 않았다.
“자~ 식사들 하세요!”
김봉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시장기가 있었기 때문에 다들 반색하며 일어났다. 바스티앙도 김봉남이 부르자 배로 돌아왔다.
김봉남이 자신 있게 내어놓은 요리는 가다랑어 뫼니에르였다. 비린내가 완벽히 잡힌 버터향 그윽한 요리에 여자들은 맛있다고 엄지를 쳐들었고, 김봉남은 좋다고 헤벌쭉 웃었다.
너 모태솔로지?
경완의 입안에 질문 하나가 맴돌았지만, 같은 남자라 참아줬다. 남자에게 가오는 중요하니까.
“자 그럼 저녁엔 어떻게 놀까?”
이영미가 지는 석양을 보며 머리를 풀었다가 다시 묶었다. 슬쩍 갸름한 목선을 드러내는 그녀의 시선이 바스티앙을 빠르게 훑었다.
왠지 개방적이 되고 싶어지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바스티앙은 그녀의 시선을 못 느끼고 다소 굳은 표정으로 무표정한 경완과 영어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유쾌한 개그 캐릭터 담당이던 매스 이펙터도 헤벌쭉했던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영미가 귀를 기울이자, 적, 위험 등을 의미하는 영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혹시 뭔가 문제가 생긴 걸까?
“오빠. 무슨 일 있어?”
잘못들은 게 아닌지 미연이 이경완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긴 하지. 뭔지는 확인해 봐야겠지만.”
근처에 있던 고래가 바스티앙에게 근처에 선박이 다가오고 있다고 알려줬다는 이야기는 하진 않았다.
그게 왜 표정까지 굳히며 의논해야 하고, 무슨 일인지 확인까지 해봐야 하는 사항인지 설명하면 그녀를 괜한 일에 끌어들이는 것이 될 테니까.
“그럼 다녀올게.”
“뭔진 모르겠지만, 조심해.”
미연이 경완을 배웅했다.
김봉남이 자신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배웅하는 말에 경완은 손을 흔들어 주고 바다 위로 날아갔다.
방향은 동남향.
이쪽으로 오는 수상한 배를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그들이 무장하고 있다는 것도, 또 안 그런 척하고 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경완의 투과 레이더 같은 초감각을 속일 수 있을 초능력자는 거의 없을 테니까.
어선을 타고 있는 사람의 수는 총 15. 선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초능력자였으며, 생김새와 피부색을 보면 동남아 쪽 사람이 절반, 라틴계 사람이 절반이었다.
딱 봐도 호의로 오는 게 아니었다. 어선에 그물도 아니고 저렇게 중무장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심지어 미사일로 보이는 무기도 있었다.
경완은 어두운 밤하늘 덕분에 눈에 띄지 않게 날아가 곧장 갑판 위에 착지할 수 있었다.
“!$#!%[email protected]#$”
바로 그들이 경완을 향해 총을 겨누며 소리쳤다.
험악한 얼굴이 딱 봐도 위협하거나 협박하려는 것 같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질 못하니 경완은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Can you speak English?”
국제 공용어인 영어로 물어봤는데 대답은 없고 뭐라뭐라 소리치며 권총을 빼드는 라틴계 사내의 모습에 경완은 오호~! 하며 감탄했다. 그러면서 고개를 슬쩍 빼서 자신의 얼굴을 노리는 권총 손잡이를 피했다.
1스택.
경완이 가볍게 손찌검을 피하자 놈은 기분이 무척 나빠졌는지 바로 두 번째 손찌검을 시도했지만 여전히 경완은 슬쩍 피했다.
2스택.
결국 놈은 참지 못하고 경완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날아오는 총알에 덕분에 경완은 왜 놈이 바다 한가운데서 갑자기 나타난 초능력자를 경계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쏘아진 총알이 대(對)초능력 특수탄이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독점 원료를 공급한다는 귀하신 몸이 왜 이런 놈들의 손에?
경완의 몸으로 날아오던 대(對)초능력 특수탄은 1차로 흑연의 염동력에, 2차로 힉스장 배리어에 막혀서 구슬 떨어지듯 갑판 위로 떨어졌고, 경완은 참을 인(忍)자 삼스택이 쌓였기 때문에 주저 없이 손을 썼다.
권총을 쏜 놈의 목이 떨어졌다. 영어도 못하고 남을 죽이는데 망설임도 없고 해서 그냥 죽여 버렸다.
그렇게 교전이 시작되었고, 오래지 않아 경완의 승리로 끝났다.
경완은 이들에게서 제법 사나운 놈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화력은 강했고, 경완의 무위(武威)를 두려워하면서도 광기 어릴 정도로 투지를 불태웠다. 어중이떠중이라기보다는 생사를 오가는 전투를 여러 번 경험한 정예병 같은 느낌이랄까?
초능력도 제법 강력했기에 경완은 중국에서 난리를 피웠던 이후로 제법 전투다운 전투를 치를 수 있었다.
죽은 놈도 있고, 안 죽은 놈도 있었는데, 기준은 영어를 할 줄 아느냐, 그리고 승기가 기울어진 것을 확인하고 바로 항복했느냐였다.
열다섯 명 중에서 살아남은 7명이 총알로 엉망이 된 갑판 위에 나란히 꿇어앉았다. 다급하다고 중기관총까지 난사한 터라 갑판의 상태는 언제라도 무너질 듯 위태해 보였기에 꿇어앉아 있는 놈들은 더욱 불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들의 발밑에 종이쪽처럼 얇게 깔린 검은 안개 덕분에 그럴 일은 없었다.
경완은 그들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고작 어선이 이렇게 중무장한 이유와 그럴 수 있었던 방법.
전자는 그들의 목적이 바스티앙과 관련되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고, 후자는 저들의 윗선, 혹은 일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이를 추적하기 위해서였다.
목적은 바스티앙이라고 해야 하나, 그의 배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가 바다에 다시는 나오지 못하도록 해달라는 게 의뢰의 내용이었다. 미사일도 S급이라는 바스티앙을 처리하기보다는 그가 타고 있는 배를 노리고 준비한 무장이었다.
하지만 의뢰인을 알아낼 순 없었다. 다크넷을 통해 받은 의뢰라는 것이다. 목표의 대략적인 위치도 의뢰인이 알려줬다나?
[댁들 같은 사람들 많아?]
경완의 물음은 또 이런 습격이 또 있지 않겠냐는 의미를 내포했지만 놈들은 알 수 없다고 대답했다.
경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이런 자들은 그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부릴 수 있는 소모품 같은 종자들이니까.
아무리 대(大) 초능력 시대라고 해도 모든 초능력자들이 훌륭한 대우와 사회적 인정을 받는 건 아니었다. 초능력이 다 같은 초능력이 아니듯, 자본주의 사회에서 초능력자의 몸값은 결국 수요와 공급이 결정하기 때문이었다.
갑판 위에 죽어서 널브러져 있거나 경완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자들은 운 나쁜 잉여 초능력자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의 나라에서 그들에 대한 수요는 기껏 이런 범죄 사업 정도에서나 찾을 수 있었다는 말이니까.
하다못해 한국같이 초능력 공학이 발달하여 초능력 확장 장비의 확보가 상대적으로 용이한 나라에선 수요가 없는 초능력을 가진 자라고 해도 기업이나 정부기관의 지원을 받아 수요에 걸맞은 초능력 용역을 제공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래서 인생은 운빨 좆망겜이었다. 기껏 초능력을 각성해 봤자 태어나서 살고 있던 곳이 소말리아나, 남미 마약굴 같은 곳이라면 기껏해야 군벌의 병사나 마약갱단의 갱단원이 되고 말 테니까. 보고 배운 게 그런 것밖에 없지 않은가?
경완은 어선을 고이 돌려보내 줬다. 선장은 보아하니 돈이나 협박 때문에 고용된 현지 협력자에 불과했고, 죄다 좆망한 인생들이니 죽이는 것보다는 살려두는 게 더 괴로울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