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228화
22-뉴 오더
한 달간의 경호 업무는 모든 직장인이 꿈꾸는 휴양과도 같았다. 한 달이나 해상에 있으면 좀 뭔가 지겹고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경완의 웜홀 능력 덕분에 뭔가 부족한 것이 있으면 금방 보충할 수 있었다.
물론 대부분이 식재료이기는 했지만 김봉남의 요리 실력 덕분에 하루에 100마리씩 강화 작업을 하는 바스티앙이 식사 시간을 은근히 기대하게 될 정도였다.
과연 위버멘쉬의 총수. 김봉남이 가고 싶다고 해서 괜히 보내준 게 아니었다. 친목 도모라는 또 하나의 목적을 훌륭히 수행해 내고 있었다.
경완은 이렇게 별일 없이 쭈~욱 경호 임무가 끝날 거라 생각했다.
저번에 수상한 놈들이 어선 타고 다가오기는 했지만, 지금 위치는 그냥 어선 가지고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태평양 깊숙한 곳이었으니 말이다. 과연 바스티앙이 슈퍼 요트를 괜히 준비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영원히 평온할 순 없었고, 특히 경완처럼 능력 좋은 프리랜서(?)에겐 백수 생활은 한 달도 길었다.
삑! 삑! 삑! 삑!
“이게 뭔 소리야?”
“전화 소리네요.”
경완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김봉남이 대답했다.
다시 말하지만 바스티앙의 슈퍼 요트는 태평양 한가운데서도 인터넷, 통신이 되는 비싼 요금제를 쓰는 배였다.
경완은 김봉남을 말없이 보았다. 전화가 오는 걸 알면 받아야지 뭐 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김봉남은 자기가 전화를 받는 대신 바스티앙을 불렀다.
경완은 그러려니 했다. 나한테 온 전화가 아닌데 내가 받는 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먼 옛날처럼 메시지 기능도 없고, 전화 왔었다고 기록을 남기는 기능도 없을 때라면 몰라도 요즘같이 기술이 발달해서 못 받은 전화가 언제 누구에게 왔는지도 알 수 있는 시대에 함부로 전화를 받는 건 프라이버시 침해 아닐까?
막 고래 한 마리를 강화해서 돌려보내고 다음 고래를 기다리고 있던 바스티앙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배에 올라왔다.
[이상하네요. 전화 올 곳이 없는데…….]
가족은요?
경완은 의문을 그냥 마음에만 담았다. 자칫 생각 없이 막 던졌다간 탈룰라각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바스티앙이 전화를 받더니 뜻밖의 일에도 경완에게 수화기를 내미는 것이 아닌가?
[당신한테 온 전환데요?]
[네?]
경완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미연인가?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지금도 종종 식재료 가지러 간다고 한국에 들락거리고 있는데 굳이 위성 전화를 할 필요가 없었다.
[누구예요?]
[FBI라고 하더군요.]
아…….
경완은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서 전화를 받았다. 과연 생각했던 그 사람이었다.
[경완 씨, 접니다.]
“아, 네. 김준 씨. 오랜만이네요.”
[네, 오랜만입니다. 하아~]
인사를 받은 김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경완은 바로 용건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혹시 바쁘십니까?]
“네.”
비치 의자에 드러누운 시간이 잠자는 시간만큼 많지만 결코 거짓말이 아니다.
그의 능력은 누워서도 사방을 경계할 수 있지 않은가? 여유롭게 보이지만 일단 바스티앙을 경호해야 하기 때문에 ‘동시에’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다’고 할 수 있었다.
[혹시 어떻게 바쁘신지 알 수 있습니까? 잠시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만…….]
“무슨 일인데요?”
매정하게 거절하기엔 그간 쌓은 신뢰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경완은 무슨 일인지 한번 들어보자는 생각으로 물어보자 김준이 이렇게 말했다.
[범죄자를 추적하는 일입니다. 아무래도 경완 씨와 천리안 장비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때 경완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사건이 있었다. 요새 미국에서 한창 이슈가 되는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NRA 회장 저격 사건이었다.
“혹시 NRA 회장 저격범하고 의원 협박범 말하는 건가요?”
[아! 아시는군요.]
설명할 수고를 덜었다는 듯이 반색하는 목소리에 경완은 찬물을 끼얹었다.
“저 그거 안 해요.”
[네? 왜요?!]
놀라서 언성이 높아지는 김준에게 경완은 간단히 대답했다.
“그거 너~무 정치적인 사건이잖아요.”
총기 규제 논란이 미국에서 하루 이틀 있었던 논란이던가? 솔직히 미국도 미국인도 답답할 것이다. 현재 미국의 현실은 총기 규제를 해도 문제, 안 해도 문제인 총체적 난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완의 생각을 김준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범죄자를 잡는 일인데?
경완은 좀 더 풀어서 설명했다.
“그놈 잡으면 총기 규제 옹호론자들에게 욕먹을 것 같아서요.”
[테러범, 살인자를 잡는 일에 불과합니다.]
“그 말 총기 난사 사건의 피해자와 유가족들 앞에서 쉽게 할 수 있어요?”
[으음…….]
그 사람들 입장에선 총기를 더 뿌려야 한다고 일인(人)일건(Gun)을 주장하는 자들이 총기 난사 사건의 공범으로 보이지 않을까?
누군가는 칼이나 총도 결국엔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문제라고 하겠지만,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칼하고 동일하게 취급할 순 없었다.
무엇이든 임계점을 넘으면 성질이 변한다. 살상 무기의 범주에선 총이 바로 그러했으니, 총이 없었다면 시민혁명도, 민주주의도 없었을 것이다.
김준이 답답해하면서 설득을 시도했다.
[하지만 테러는 테러입니다. 용납할 수 없어요.]
“에~이. 그렇게 따지면 제가 국회의사당에 쳐들어가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미국 헌법에서는 미국인이 정부에 저항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지 않던가요?”
그게 바로 미국의 수정 헌법 제2조 무기 휴대의 권리 아닌가?
솔직히 정부에 대한 저항으로 보기는 힘들지만, 그런 걸 구별할 수 있을 정도의 머리가 있다면 저격으로 총기 규제를 이뤄보겠다는 망상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김준은 침음성을 흘리며 어떻게든 경완을 설득해보려 말을 꺼냈다.
[하원의원과 상원의원에서 한 명씩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조속히 범인을 잡아야 합니다. 도와주신다면 미국에서 크게 사례할 겁니다.]
아, 그래서 급한 거구나. 맥락으로 봐선 둘 다 총기자유옹호론자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경완은 아쉬울 것도 없고, 욕심도 크지 않았다. 저쪽의 다급함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그가 진흙탕에 몸을 던져야 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그냥 안 끼어들고 싶은데요.”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어떻게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리고 괜찮을 겁니다. 저는 미국을 믿어요.”
[믿는다니요?]
“비 온 뒤 땅이 굳는다고, 미국은 지금의 위기와 혼란을 분명히 극복해내고 더 강한 나라가 될 겁니다.”
진심? 아니 그냥 입에 발린 말이었다.
솔직히 정말 그렇게 되든 말든 관심 없었고, 혹시나 김준의 윗선에서 ‘네가 감히 날 안 도와줘?’라는 식으로 말도 안 되는 역정을 내지 않을까, 미리 기름칠을 해두는 것이다.
나중에 상황이 해결되고 나서 그를 보며 인상 찌푸리지 않도록 말이다.
[하지만,]
“거참. 댁은 댁의 조국을 못 믿습니까? 언제까지 타국 사람에게 의존할 거예요?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이 아닙니까? 믿어요. 미국은 할 수 있습니다.”
[…….]
수화기 너머의 김준은 말이 없었다.
그래. 어이가 없겠지. 미국인도 아닌 사람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으니 말이다. 아! 그런데 자신에게 미국 시민권이 있지 않았던가?
[하아……. 상부에 뭐라고 보고해야 할지…….]
하지만 김준은 경완은 미국인이기도 하다며 딴죽을 걸지 않았다. 경완에 대해서도 알 만큼 알고 있기 때문에 괜히 꼬투리 잡고 물고 늘어져도 소용없다는 것 또한 깨닫고 있었다.
경완이 조언했다.
“솔직히 말하면 되죠. 미국의 정치에 간섭하기 싫어한다고요.”
[그런 명분은 상부에서 동의하기 힘들 겁니다.]
하긴 테러를 범죄로 규정하고 싶은 사람들에겐 그렇게 보이겠지.
하지만 테러도 테러 나름이 아닐까? 총기 자유를 옹호하던 자가 총기로 하늘나라에 가버리는 아이러니함이 경완에겐 스탠딩 코미디처럼 다가왔다.
마치 총기 자유를 옹호하는 대선 후보가 본인 선거 유세장에선 총기반입을 철저하게 단속하는 것만큼이나 말이다.
김준의 걱정에 경완은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럼 이렇게 말하면 되죠. 나는 총기 자유 반대론자라고요.”
[진짭니까?]
“내 손에 들린 총기는 좋지만 다른 사람 손에 들리는 총기는 반대합니다.”
[…….]
“진짜예요. 왜요? 다 그런 거 아니에요? 좋은 건 나만 가져야죠.”
경완의 내로남불에 김준은 할 말을 잃었지만, 경완은 솔직한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솔직히 총기는 멋지지 않은가? 살상을 목적으로 최적화한 기술적 집약체는 절제된 기능미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그 기능미의 목적이 살인에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어차피 총이 아니라도 사람은 사람을 죽였다.
칼, 창, 활.
굳이 총이 아니라도 살상을 위한 도구, 무기는 먼 옛날부터 만들어졌고, 수컷들은 이러한 무기에 환장했다. 남자를 의미하는 ♂기호도 원래는 창을 든 남자, 전쟁의 신인 마르스를 상징하는 기호였다.
경완이 내놓은 이유에 김준은 한숨을 내쉬며 더는 설득을 포기했고, 경완이 수화기를 내려놓자 김봉남이 슬쩍 다가와 한마디 던졌다.
“미국 안 가세요?”
“안 가요.”
“왜요?”
“귀찮아서.”
경완은 귀찮아서 짧게 대답했다. 그저 아무 걱정 근심 없이 태평양의 비릿한 바닷바람을 흡입하는 이 상황이 더 좋았다.
게임도 안 하고 그저 심심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게 미국에서 총기 옹호론자와 총기 반대론자 사이에 부대낄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백배 천배는 더 나았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바스티앙이 김봉남이 해준 저녁을 먹으면서 다시 미국의 저격 테러 사건을 언급했던 것이다.
정치나 경제 영역에선 여자 못지않게 수다스러워질 수 있는 것이 남자였다.
[총기라……. 쉽지 않은 문제군요…….]
[그렇죠. 미국은 총기로 세워진 나라니까요.]
바스티앙이 중얼거리듯 한 말에 김봉남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총기를 들고 무장봉기하여 식민지에서 자주 국가가 되었으며, 그 총기를 들고 원주민들을 그들의 땅에서 쫓아내면서 세워진 나라가 바로 아메리카 아닌가?
미국(美國). 아름다울 미(美)를 쓰기엔 역사가 좀 거시기했다.
하지만 바스티앙의 생각은 김봉남과 조금 결이 달랐다.
[총기를 규제하면 그다음은 초능력을 규제하려고 하겠죠.]
총기 규제는 필연적으로 개인의 무력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이냐는 논의와 이어졌다. 초능력자를 두려워하거나 제어하고 싶은 이들에겐 다시 한번 논의를 이어나갈 좋은 빌미였다.
지금도 오버맨 엔트리, 초인등록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사실 반(反)초능력 여론을 달래주느라 던져준 뼈다귀에 불과했고, 뚜껑을 열어보니 초능력자를 제어하고 엄정하게 관리하고 싶어했던 이들의 욕구를 전혀 충족해주지 못했다.
사실 반초능력 진영에선 적어도 초능력자들에게 의무적으로 전자발찌 따위를 채워야 한다는 주장까지 있었다.
경완이 한마디 했다.
[흐음……. 결과적으로는 여전히 전 세계가 난리네요.]
패권국인 미국까지 난리라…….
경완이 곰곰이 생각해 보니 패권을 노리는 나라 중에 난리가 안 난 나라를 찾기 힘들다는 걸 깨달았다.
일단 중국은 경완 때문에 오호십육국 시대를 맞이할 판이고, 러시아는 오랜 세월 러시아를 지배하는 독재자가 암살당하고 리더십의 실종으로 내홍(內訌)을 겪고 있었다.
미국?
아마 근래에 벌어진 반(反)총기 자유 테러를 시작으로 그동안 쌓여있던 미국의 내부 모순이 폭발하지 않을까? 미국의 빈부 격차는 심각했고, 이는 인종, 문화, 이념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킬 테니까.
그리고 그러한 예측은 경완이 슈퍼 요트에서 경호 겸 휴양을 즐기는 한 달간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각지에서 자칭 자경단, 중앙정부에선 빌런으로 규정한 이들이 정부와 혹은 서로 간에 충돌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완은 그 꼴을 뉴스로 보며 혀를 찼다.
“쯧쯧쯧. 세상이 참 어찌 되려고.”
저 홍진세계와 멀리 떨어진 대양 한가운데만 누릴 수 있는 여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