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230화
23-팍스 위버멘쉬
그런데 그렇게 생긴 과다한 의욕이 문제가 되었다. 다소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현지 민병대의 한 파벌을 이끄는 키끌로마라는 자를 회유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 키끌로마가 그를 억류하고 있어요. 저희 정보원이 보내준 정보에 의하면 고문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해요.]
“서둘러야겠네요.”
경완이 왜 그가 자신에게 이런 부탁을 했는지 바로 이해했다.
죽지는 않는다고 해도 고문이 만들어낸 상처와 후유증, 트라우마는 평생을 간다.
빠르게 구할수록 후유증과 트라우마도 작을 것이고, 그런 일에 경완은 검증된 인재였다. 중국에 납치된 마리아 여사를 누구보다 빠르게 구해낸 것이 누구였던가? 바로 그가 아니었던가?
[고마워요.]
“아직 구해낸 것도 아닌데 너무 일러요.”
경완은 손사래를 쳤다. 감사의 말은 그 마르코인가 하는 이를 구하고 나서 받아도 늦지 않았다.
[출국 준비는 이쪽에서 준비해 놓겠습니다.]
“저도 준비해 놓을게요.”
경완은 바로 여행가방을 꺼내 속옷 등과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 그 외에는 딱히 챙기지 않았다. 왜냐면 웜홀 능력이 있었기에 뭔가 모자란다 싶으면 왔다갔다 하면 되니까.
출입국법 위반이라고? 안 걸리면 장땡이다.
요하네스가 오후에 다시 전화를 주었다. 다음날 한국에서 브라질로 가는 전세기를 준비해 놨으니 시간에 맞춰서 오면 된다고 말이다.
“위험하지 않을까?”
미연이 브라질 파벨라를 검색해 보고 걱정했다.
하지만 경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설마 중국보다 위험할까?”
아무리 마약 카르텔, 마피아가 잔인하다고 해도, 수백 수천만 명을 죽인 국가권력보다 잔인할 리도, 강할 리도 없었다.
“그래도 조심해.”
“응. 잘 다녀올게.”
경완은 미연의 걱정을 뒤로하고 집을 나서서는 인천공항으로 날아갔다. 괜한 소란이 일까 봐 마스크와 짙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그런데 약속된 전세기로 향하는 게이트의 입구에서 익숙한 얼굴을 만났다.
“김준 씨? 여긴 어쩐 일이세요?”
“브라질로 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윽시 미국. 소식도 빠르네. 경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같이 가시게요?”
경완의 물음에 김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근거가 좀 빈약하지 않은가?
“왜요?”
“경완 씨를 위해섭니다.”
헛소리로 들렸지만 더는 말할 수 없다는 표정에 경완도 굳이 캐묻진 않았다.
“위버멘쉬 측의 허락은 받았고요?”
“경완 씨가 결정을 내리면 됩니다.”
경완은 그 말에 반대편에 있는 인물을 보았다. 갈색머리의 늘씬한 라틴계 미녀가 경완의 시선에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니코라고 해요.]
경완이 손을 마주잡자 그녀는 이번 브라질 일정과 체류에 관해 일체의 편의를 자신이 담당한다고 설명했다. 뭔가 요구사항이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지체없이 자신에게 말하라는 것이다.
경완이 김준을 가리키며 물었다.
[같이 갈 수 있나요?]
[뭐…… 필요하시다면요?]
경완의 질문에 니코는 김준을 보며 소리 없이 코웃음을 쳤고, 둘의 시선이 충돌했다.
분위기를 보니까 경완이 오기 전에 두 사람 사이에 충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보나마나 경완 자신 때문이겠지. 원래 그는 미국과 친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요새 들어 위버멘쉬 소속의 초능력자를 경호하려고 한 달이나 바다에 나가 있고, 이번에도 파벨라라는 무법지대로 위버멘쉬의 인물을 구하러 가는 등 위버멘쉬 측과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였다.
아마 미국의 입장에선 달갑지 않을 것이다. 썸타고 있던 여자가 갑자기 다른 남자랑 썸타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그렇다면 경완의 선택은 어느 쪽일까? 미국? 아니면 새로 사귄(?) 위버멘쉬?
그의 선택은 당연히 양다리였다. 수요가 공급을 뛰어넘으면 당연히 공급자가 갑 아니겠는가?
[별일도 아닌데 같이 가죠.]
[그러죠.]
니코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한 태도를 보니 아마 지금 같은 상황도 예상한 모양이었다.
경완은 우 김준, 좌 니코로 전세기를 향해 가는 통로를 걸으면서 물었다.
“그런데 김준 씨. 제가 무슨 일로 가는지 알고는 계시죠?”
“어느 정도 알고는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위험한 곳까지 따라오지는 마세요.”
챙겨주기 귀찮으니까.
“아셨죠?”
“네.”
김준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서 브라질로 가는 전세기 안에서 경완은 니코와 구출 계획에 대해서 의논했다. 하지만 결론은 경완이 직접 파라이조폴리스에 침투해서 마르코의 행적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파라이조폴리스가 군사시설도 아니고 침투라는 표현을 써야 할 정도로 거창한 곳인가 싶겠지만, 외부인에게는 충분히 그런 말을 해도 될 정도로 살벌한 동네였다.
관광객이 멋도 모르고 들어가면 최소 소매치기, 최대 납치 후 실종이 될 수도 있었다. 중간에는 강도, 살해 등 다양한 범죄의 바리에이션을 즐길 수(?)도 있었다.
그런 정도니 마르코를 찾기 위해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광범위 탐색을 해야 하는데 소수 인원으로 그게 가능한 초능력자는 몇 없었다.
요하네스가 괜히 경완에게 부탁했겠는가? 그는 그러한 요건을 충족하는 동시에 발견 즉시 혼자서 인질을 구출해올 수도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뭐, 위버멘쉬도 딱히 대단하진 않네요.]
김준이 옆에서 비아냥거렸다. 니코도 지지 않았다.
[블랙옵스가 들킬 것 같으면 냉정하게 잘라버리는 미국이 아니니까요.]
국익이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미국의 행태를 지적하는 말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충돌했다.
경완이 김준을 향해 미간을 좁혔다.
“김준 씨, 안 도와줄 거면 방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까요?”
“네.”
김준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경완은 한다면 하는 인물이었다. 웜홀 능력도 있으니 김준이 방해한다 싶으면 즉각 한국으로 보내버릴 수 있었고, 김준은 그에 저항할 수 없었다.
김준을 조용하게 만든 경완은 브라질로 향하는 일정의 절반은 구출계획과 이를 위한 정보 숙지로, 나머지 절반은 휴식으로 보냈다.
[그런데 브라질 정부가 귀찮게 하지 않을까요?]
경완의 우려는 자신의 유명세였다. 설마 그 정관계 인사 중에서 그를 만나보고자 하는 이가 한 명도 없을까? 유능한 이와 친분을 좀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어떻게든 도움이 된다는 걸 모를 리 없는 사람들이었다.
니코는 그런 우려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서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해결사 한 명만 급히 부른다고 했죠. 입국심사도 없을 겁니다.]
경완은 할 말을 잃었다.
[……그거 굉장하네요.]
[정말 브라질이란 나라는 굉장하죠.]
니코는 동의한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말 그녀의 말대로 입국심사는 없었다. 아니 있기는 했는데 그냥 위조여권을 슥 훑어보고는 넘어갔다. 있었는데 없었습니다라는 말도 안 되는 표현이 성립하는 순간이었다.
경완은 니코를 따라 공항을 나와 리무진에 몸을 실으면서 물었다.
[뇌물 안 줘도 돼요?]
[면전에서 주는 건 세련되지도 않고 불안감을 남기죠.]
입국심사원도 나름 공무원이라 뇌물을 받고 이런 식으로 업무를 졸속으로 처리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걸 안다.
인간은 불안에 빠지면 자제력이 약해지고, 자제력이 약해지면 돌발행동을 하기 마련. 그렇다면 차라리 저 입국심사원이 뇌물을 받지 않았다고 발뺌할 수 있도록 안전한 방법으로 꽃아주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는 게 니코의 설명이었다.
[이미 줬다는 말이네요.]
[네. 그 방법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고 싶지만 옆에 듣는 귀가 있어서…….]
니코가 김준을 곁눈질했다. 경완도 김준에게 시선을 주었다.
김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왜 FBI수사관인 자신이 여기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걸까? 갑자기 전출을 신청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물론 상부에선 개무시하겠지만…….
김준의 한숨을 뒤로하고 일행은 상파울루의 고급 호텔에 투숙했다. 당연하게도 고급일수록 치안이 좋았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지리를 익히는 것.
하지만 관광지가 아닌 곳에서 관광객이 돌아다니면 절도, 강도, 납치 등을 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경완은 변장부터 했다. 아무래도 아시아인이라 눈에 띄기 때문이었다.
[당신까지 변장해 줄 생각은 없으니까 얌전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니코는 경완을 변장시키면서 김준에게 말했다.
김준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비싼 호탈에 방을 구해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했고, 괜히 따라다닌다고 경완의 일을 방해하거나 귀찮게 하면 여태 쌓아온 우호와 신뢰에 금이 갈 수도 있었다.
일단 억지를 부려 브라질까지 따라는 왔지만 선을 넘어선 안 된다. 따라온 것만 해도 그가 할 일은 충분히 했다.
경완도 한마디했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푹 쉰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귀국도 못 하고 다른 나라에서 고생했잖아요?”
미국인이 한국에서 지내느라 얼마나 고생하겠는가?
어이가 없는 소리에 김준이 반박했다.
“저도 나름 한국인입니다만?”
“한국 국적도 없잖아요.”
“그럼 한민족이라고 하죠.”
더 하면 삐칠 것 같아서 경완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아꼈다. 그러다가 분장이 끝나자 김준을 향해 얼굴을 돌리며 물었다.
“어때요? 좀 남미 사람 같아요?”
갈색의 곱슬머리 가발을 씌우고 구릿빛 피부로 분장한 후 크고 짙은 선글라스를 낀 경완은 얼핏 보면 동양인이라고 인식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근묵자흑이라고 김준은 경완 옆에서 지내면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는 습관, 다른 말로는 딴죽 거는 습관이 생겼다.
“그렇게 보이진 않네요.”
[아니라는데요?]
경완이 김준의 평가를 니코에게 전달하자 그녀는 싸늘한 표정으로 김준을 보고는 다시 경완의 옆에 붙어 팔을 끌어안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제가 옆에 붙는 거죠. 저 같은 라틴계 미녀가 동양계 남자랑 같이 다닐 일은 거의 없거든요.]
좀 어설퍼도 선입견 덕분에 동양인으로 보이기 힘들다는 논리가 제법 합리적이라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준이 옆에서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절대로 오해였다. 팔을 포근히 감싸는 흉부 때문에 억지로 납득한 것이 아니었다. 무한전생자의 가오가 있지.
[그럼 출발하죠. 시간 없어요.]
니코의 말에 경완은 김준을 남겨두고 이동했다.
현지 운전자를 고용해 차를 타고 파라이조폴리스 인근으로 도착한 경완은 초감각 레이더를 펼쳐서 지역을 탐색했다. 역시 이렇게 직접 감각으로 느껴보니 위성사진으로 숙지한 지형이 이해가 되고 머리에 그려졌다.
[어때요?]
니코가 옆에서 물었다.
[주요 골목마다 무장한 놈들이 있네요.]
중무장은 아니고 고작해야 권총 정도였지만 그 정도만 해도 놈들이 조직을 이루고 지역을 장악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파라이조폴리스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어느 정도 지리를 숙지한 경완이 니코를 향해 말했다.
[밤에 와야겠어요.]
잠시 호텔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한 경완은 상파울로의 어두운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구출대상인 마르코를 찾기 위해선 우선 키끌로마가 인질을 잡아 가두는 곳을 찾아야 했는데, 다행히 위버멘쉬에서 사전조사로 키끌로마의 근거지 열 군데 정도를 추려놨다. 주 근거지는 물론이고 자잘한 근거지도 모두 말이다.
경완은 밤하늘을 눈에 띄지 않게 날아다니며 그 열 군데 모두 확인했지만 이상하게도 마르코가 없었다.
키끌로마의 근거지가 다른 곳에 더 있든지, 아니면 이미 죽여 없앤 후 시체조차 치워버렸다든지.
경완은 일단 돌아가서 니코와 상의를 해보려고 하다가 알고 있는 얼굴을 발견했다. 키끌로마였다.
그를 본 경완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