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233화
23-팍스 위버멘쉬
김준이 그런 경완의 생각을 듣는다면 무척이나 어이없어하겠지만, 모든 건 상대적인 법이다.
인간 악의의 전면에 서서 의심을 밥 먹듯이 하는 FBI 수사관도 무한전생자에 비하면 꿈 많고 낭만 가득한 로맨티스트라 할 수 있었다.
“경완 씨는 위버멘쉬를 옹호하는 건가요?”
김준의 우려 섞인 질문에 경완은 잠시 고민하며 단어를 정리한 뒤에 신중하게 내뱉었다.
“딱히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놈이 그놈이다?”
“양비론인가요?”
김준이 싫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럴 만도 했다. 양비론이란 무엇인가? 그냥 생각하기도, 세세하게 살펴서 판단하기도 귀찮지만 그런 속내를 솔직히 말하면 판단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놈이라고 손가락질당할까 봐 깨시민인 척 그럴듯하게 자신을 포장하는 기술이 아니던가?
그러자 경완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양시론인데요.”
김준이 황당해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얘도 병신, 쟤도 병신이라고 주장하는 게 양비론이라면, 너도 옳고 쟤도 옳다는 게 양시론이었다.
“그게 양비론과 뭐가 다른데요?”
“양비론은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절망에서 비롯된 거라면, 양시론은 뭐가 되었든 좋아질 거라는 희망에서 비롯된 거거든요.”
인생 망한 인간들이 열등감과 패배의식에 찌들고 남들 잘 되는 게 눈꼴시어서 어떻게든 겨 묻은 개를 똥 묻은 개로 끌고 내려가려고 물고 늘어지는 게 양비론이라면, 어떤 방향이든 긍정적으로 보고 발전상을 기대하는 긍정주의적 마인드이자 희대의 처세술이 바로 양시론이었다.
황희 정승이 괜히 양시론의 예시로 나오겠는가?
서로 다투는 하인들의 입장을 각각 긍정해 주면서 서로의 체면을 세워주고, 시시비비를 가려주지 않는다고 끼어드는 부인도 체면이 상하지 않도록 옹호해 주어 부부간의 불화마저 미연에 방지하지 않았던가?
괜히 세종대왕께서 사직을 허락하지 않으셨으며 오늘날까지 명재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경완의 궤변에 김준은 어이가 없어졌다.
“그러니까 지금 위버멘쉬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물론 김준 씨의 입장은 이해가 돼요. 하지만 그 입장을 제게 강요하진 마세요.”
경완의 부드러운 경고에 김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마 그의 머릿속은 복잡할 것이다. 미국에서 뭘 더 제시해야 경완이 위버멘쉬 측으로 넘어가지 않을까 계산 중이겠지.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상상 이상으로 시궁창이라고, 경완의 내심은 이러했다.
양시론의 애용자 황희 정승. 그에게 하인들의 싸움은 어떻게 보였을까?
경전을 논하는 것도 아니고 유학에 대한 깊은 사유도 아닌 문제를 가지고 그저 제가 옳다 다투는 못 배운 자들 사이에서 시시비비를 가려봤자 누군가는 납득하지 못하고 앙심을 품을 게 뻔하지 않을까?
그나마 황희 정승 정도의 능력자니까(괜히 세종대왕이 말년까지 아꼈을까?) 양시론으로 상황을 부드럽게 만들고 더불어 제 한 몸도 쓸데없는 논쟁에서 깔끔하게 빼낸 것이지, 만일 망나니 재벌2세 같은 무늬만 양반이었다면 쓸데없이 다투는 종놈년들에게 회초리질을 가한 후에 잡초 한 뿌리 더 뽑고, 거름 한 줌 더 주라고 면전에서 쫓아냈을 것이다.
그렇다. 경완의 본심으론 미국이니 위버멘쉬니 하는 문제는 어찌 되었든 본질적으로 남 일인 것이다. 그저 현명하신 황희 정승식 양시론으로 제 한 몸 편하게 처세술을 발휘해보고자 하는 것이 경완의 본심.
“안 그래도 어찌 살아야 할지 골치가 아픈데 괜히 더 골치 아픈 문제 끌고 오지 마시고요.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설마 미국이 위버멘쉬보다 못하겠어요?”
경완의 결론에 김준은 착잡한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경완 씨 말대로 제가 너무 과민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죠. 하지만 위버멘쉬의 행보가 매우 공격적이라는 거에 동의하는 사람이 워싱턴엔 적지 않습니다.”
워싱턴, 미국의 정가(政街)를 우회적으로 언급하는 김준에게 경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뭐, 들어오는 물에 노 젓는 것일 수도 있죠. 사업이라는 게 다 때가 있잖아요.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우를 봐요.”
마이크로소프트가 어떻게 성장했는가?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수많은 개인용 컴퓨터 주변기기 업체들에게 윈도 전용 드라이버를 중심으로 개발하도록 유도를 하였으며, MS-DOS의 경쟁 DOS에 대한 호환성도 일부러 외면하기도 했으며, 인터넷 익스플로러 끼워팔기로 넷스케이프의 네비게이터도 작살냈고, 오피스도 덤으로 줘서 경쟁사와 후발 주자들을 조져버리지 않았던가?
지금은 이미지가 그 정도로 악의 축 같은 느낌은 없지만, 마이크로소프트가 한창 확장하고 시장점유율을 끌어올릴 때 매우 공격적인 행보를 보인 것은 사실이었다.
사실 이러한 행보는 마이크로소프트만이 보인 것은 아니었다. 철강왕 카네기도, 석유왕 록펠러도, 한창 문을 연 블루오션을 장악하고 독점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 공격적으로 사업한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도 OS, 소프트웨어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서 그들처럼 했을 뿐이다.
기업의 본성을 보았을 때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사업을 위해 시장을 예측해야 하는 이들은 본능적으로 경쟁자를 싫어했다. 이는 경쟁자란 예측이 어려운 변수이기 때문이다. 담합이란 범죄가 벌어지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는데, 비단 담합으로 벌어들이는 금전적 이득만이 전부가 아니라 담합을 통해 경쟁자를 ‘예측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것도 매우 큰 동기다.
자본주의 사회 속 이런 기업의 생리를 생각해 보면 위버멘쉬의 공격적인 행보 역시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초능력 산업의 태동기에서 가장 선두에 있는 위버멘쉬가 시장 독점적 지위를 누리기 위해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도 반복된 행보였다.
“하아…… 알겠습니다. 다만 저희 미국도 경완 씨에게 매우 우호적이라는 것은 기억해 주세요.”
“그야 당연하죠.”
배경이 하나인 것보단 둘인 게 좋다는 건 경완도 인정하는 바였다.
김준이 힘없이 돌아간 후 경완은 쓰다듬고 있던 치즈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치즈야. 마이크로소프트와 스탠다드 오일이 그랬듯 위버멘쉬가 언젠가 과연 반독점법의 철퇴를 맞을까?”
“야앙?”
아무리 똑똑해도 고양이는 고양이인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멈춘 경완의 손을 툭툭 치며 다시 쓰다듬기를 재촉했다.
경완은 피식 웃으며 TV를 켰다. 킬링타임할 시간이었다.
* * *
경완이 마르코 구출 의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그는 요하네스로부터 전화로 감사인사를 받았다.
“아유~ 뭘요. 사람인 이상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죠.”
경완은 요하네스의 감사를 공치사로 받았다. 이 정도면 그간의 호의를 꽤나 갚았겠지?라는 계산을 하고서 말이다.
[하하.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다행입니다.]
“아무튼, 이걸로 납치 같은 일이 또 벌어지진 않겠죠?”
[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또 없을 거라고 장담하지 않는 화법이 정치인의 화법과 비슷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또 생길 거라는 암시가 담겨있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그 부분을 지적하기엔 틀린 말도 아니었다. 세상엔 100%는 없었으니까.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도와드릴 겁니다.”
[하하하! 농담도 잘하십니다.]
경완은 ‘농담 아닌데요’라고 말하고 싶은 청개구리 심보를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걸로 일단락된 거겠죠?”
경완이 또 브라질까지 가야 할 일이 없는지를 우회적으로 묻는 말이었지만 요하네스는 표면상의 의미 그대로 알아들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긴 프로젝트에 박혔던 가시 하나가 빠진 것뿐이죠.]
경완의 머리에 김준의 말이 떠올랐다. 위버멘쉬의 공격적인 확장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데 굳이 후세 깔판토와 손을 잡지 않은 이유가 있나요?”
위버멘쉬가 협상을 전혀 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후세 깔판토 같은 유력자와 손을 잡지 않는 게 좀 이상했다.
명확한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지만 요하네스는 사정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간단합니다. 위버멘쉬와 공존할 수 없는 사람이었거든요.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위버멘쉬를 이용하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둘이 아닐 텐데요?”
[그만한 능력과 야심도 있었다는 게 문제였죠. 12년이나 상원의원을 한 유력자입니다. 비선실세급의 영향력을 갖추고 있었죠. 그런 자와 손을 잡으면 오히려 위버멘쉬가 휘둘릴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일인자와 손잡으면 쉽게 자리를 잡을 순 있어도 동등한 입장에서 협상할 수 있는 위치가 되기는 힘든 법.
계속 따까리 취급을 받느니 차라리 이인자와 손을 잡고 일인자를 치는 게 공범이라는 공감대도 형성하고 떨어지는 떡고물도 나눠 먹을 수 있었다. 최고의 사냥감을 사냥하면 전리품도 그만큼 많은 법이다.
경완은 더 질문했다가는 너무 깊이 관련될까 봐 얼른 화제의 맥을 끊고 통화를 마치기로 했다.
“그랬군요. 그럼 하시는 일 잘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속내를 읽기라도 했는지 요하네스가 뜬금없이 이런 말을 했다.
[그래야죠. 다 인류의 존속과 평화를 위해서니까요.]
“네?”
[말 그대롭니다. 위버멘쉬는 단순히 초능력자의 권익을 위해서만 설립한 게 아닙니다.]
경완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서 초능력자의 권익을 위해 세운 단체가 인류의 존속과 평화로 이어지는 걸까?
그리고 그러한 의문보다 앞선 의문이 있었다.
“갑자기 그런 말을 왜 굳이 제게…….”
[요새 미국 정가에서 저희를 견제하는 입들이 늘어나고 있답니다. 그래서 혹여나 경완 씨에게 바람을 넣어서 저희 사이에 오해를 일으킬까 봐 우려되어서요.]
경완은 다시 김준을 떠올렸다. 그리고 혀를 내둘렀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우연이 아니라면 위버멘쉬의 정보력이 대단한 것이고, 우연이라면 요하네스의 직감이 대단한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대단하긴 마찬가지라 경완을 혀를 내두르며 대꾸했다.
“에이. 제가 남들 말에 휘둘릴 사람인가요?”
[그건 그렇죠. 하지만 그곳에 있는 이들은 평생 말로 싸워온 이들입니다. 사람 하나 바보 만드는 건 그들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죠.]
“뭐, 문명인이 때론 야만인보다 더 무례한 법이죠. 이해합니다.”
경완의 말에 요하네스는 낮게 웃었다.
[후후. 저는 문명을 하나의 체계화된 야만이라 보는 입장이라서요.]
야만이란 상대적인 개념이다.
문명을 전파한다는 미명으로 일어난 근대열강들이 세계 곳곳에 가한 야만적인 짓들을 봐도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는 잣대는 고무줄이었다.
예를 들자면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사는 문화를 가진 이들에게, 개발과 이익이라는 미명 아래 자연을 훼손하는 자본주의 기술문명은 요하네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체계화된 야만이었다.
[아무튼 이만 끊겠습니다.]
“네. 그럼 잘 지내세요.”
마르코 구출에 대한 감사를 이유로 걸려온 요하네스의 전화는 경완에게 묘한 암시를 하나 남겼다. 그것은 이제부터 뭔가 갈등과 충돌이 폭발적으로 발생할 거라는 예측이기도 했다.
브라질 12년 경력의 정치인, 후세 깔판토가 구속되었다.
검찰 출신이자 든든한 검찰 측 나팔수 역할을 했던 후세 깔판토를 검찰이 쳤다는 것에 사람들이 의아해했지만 그 이유를 아는 이는 없었다. 그저 검찰 내부의 하극상이라는 말 밖에.
아무튼, 은근히 위버멘쉬의 방해가 되었던 후세 깔판토의 실각은 위버멘쉬에게 분명히 호재였고, 위버멘쉬를 싫어하고 그와 관련된 음모론을 믿는 이들은 위버멘쉬가 브라질의 검찰마저 손에 넣었다며 떠들어댔다.
뭐, 근거 없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이는 많지 않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