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236화
23-팍스 위버멘쉬
“그 부분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종합초능력전술장비는 기본적으로 무기이다, 그러므로 제반 사항은 모두 기밀이다, 이경완은 민간인이지 않은가, 그러니 아무튼 정부의 승인 없이 이러면 곤란하다, 등 정준혁 안보실장이 늘어놓는 말들은 길었지만, 마리아 소장이나 경완에겐 다 변명처럼 들렸으며 그리고 딱히 지금 상황에선 소용이 없는 말들이었다.
“그럼 이미 코어에 각인까지 하고 연구를 시작한 걸 어쩌라고요?”
“각인을 지우고 다시 테스터를 뽑죠.”
이미 쌀이 끓어 죽까지 된 상황이지만 정준혁은 태연했다.
그 태연함이 마리아 소장의 어이를 상실시켰다.
“그게 쉬운 일인 줄 알아요? TSTG에 사용되는 코어는 생산에만 인력을 투입해도 모자랄 지경이에요.”
“각인만 다시 지우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이해가 안 되는 듯 어리둥절해하는 정준혁을 보며 마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부기관 사람들은 제발 공부 좀 하고 그런 말을 했으면 좋겠어요. TSTG에 사용되는 코어가 보통 코어인 줄 아세요?”
과장해서 말하자면 초능력자의 초능력 기관, 즉 뇌를 보조하는 보조뇌라고 할 수 있는 게 바로 TSTG의 코어다. 따라서 수십 가지의 안전장치와 코어에 들어간 각 능력의 밸런스, 슈트와의 호환성까지 세밀하게 조정된다. 각인이란 이 미묘한 밸런스를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으로, 각인을 지운다는 건 처음으로 돌리기 위해 무너진 밸런스를 일일이 다 잡아줘야 한다는 걸 뜻했다. 그리고 이는 사실상 코어를 새로 만드는 것과 다른 없는 일이었다.
그뿐인가? TSTG용 코어를 비롯한 코어는 현재 기계로 만들 수 없어서 일일이 사람이 수작업으로 만들고 있었다. 수요가 공급을 한참 웃돌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녀의 한숨에 한심한 마음이 가득 담기자 정준혁이 입을 다물고 머릿속으로 해야 할 말을 골랐다. 그 사이에 경완이 마치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전임자였던 강태수 씨는 일을 잘하는 것 같던데..”
얼마나 얄미웠는지 순간 울컥할 뻔했던 정준혁은 얼굴이 약간 붉어지는 것으로 간신히 표정을 관리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 부분은 저희의 불찰입니다.”
정준혁은 자신의 귓가에 경완이 ‘저희의 불찰? 저의 불찰?’하고 중얼거리는 말이 들어오는 걸 애써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합의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테스트 진행을 멈추는 것에는 동의하시리라 봅니다.”
“연구 일정이 길어질 때 발생하는 손해는요?”
“얼마만큼의 손해가 발생했는지는 나중에 정확하게 따져서 보상하겠습니다.”
경완이 이번에도 옆에서 ‘나중에라는 말치고 제대로 보상하는 법이 없던데’라고 중얼거렸지만 정준혁은 이번에도 그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정부의 입장은 여기까지이며 일단 저 장비는 당분간 봉인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준혁이 좌우로 눈치를 주자 그와 함께 온 이들이 종합초능력전술장비를 입은 경완에게 다가왔다.
경완은 순순히 그것을 벗고 나왔다. 그리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마리아 소장을 달래서 그녀의 사무실로 향했다.
“이야~ 진짜 싫은가 보네요.”
소파에 앉은 경완이 커피를 홀짝이며 말하자 캡슐커피로 커피를 내리고 있던 마리아 소장이 맞장구를 쳤다.
“아주 노골적이에요.”
“적대감마저 느껴지던데요?”
중국이 지금 어떤 꼴인지 보고도 경완의 심기를 긁는 행동을 하는 이유는 간이 부어서 그러는 걸까, 아니면 그가 한국에 타협적인 모습을 보여줘서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경완은 이해가 안 되기는 했지만 억지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이해가 안 되는 데로 놔두기로 했다.
세상은 상상만큼 그렇게 합리적인 곳이 아니다. 나름 똑똑한 놈을 모아놔도 신통한 결정을 내리는 경우를 경완은 잘 보지 못했다. 세상 모든 조직이 왜 리더십을 강조하겠는가?
“설마 경완 씨를 적대하겠어요?”
마리아 소장이 커피잔을 들고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경완은 결국 한국의 국민이었고, 중국에서 보인 무위에도 국가 시스템 자체를 전복시킬 야망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그를 경계하는 이유가 뭘까?
“그만큼 저 종합초능력전술장비가 간절한 모양이죠.”
현재 초능력 생태계는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국제적으로 봐도, 각 나라를 봐도 그렇다.
현존하는 S급 초능력자와 그 나라의 정부 간에도 미묘한 긴장이 있는데 경완과 대한민국 정부는 오죽하랴? 중국에서 보여준 그의 능력만큼 그와 정부 사이에서 무게추는 경완 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정부 입장에서 TSTG가 이런 상황을 해소해 줄 키아이템이 되어주길 희망하고 있다면 저런 태도도 납득할 수 있었다. 격차를 줄이기 위해 개발하는 장비가 오히려 격차를 벌릴 가능성이 있다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꼴 아니겠는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선물로 받기는 힘들겠는데요?”
“그럴 일은 없어요.”
“전략물자로 지정이라도 되면 무리죠.”
“함부로 지정 못 해요. 위버멘쉬의 조력이 없으면 생산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코어 기술은 위버멘쉬가 꽉 쥐고 있던가?
마리아 소장이 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반드시 경완 씨의 집에 제 작품을 멋들어지게 전시할 수 있도록 할 테니까요.”
경완은 그런 그녀의 각오가 부담스러웠다. 과잉충성 따위가 어디로 튈지 모르듯, 과도한 호의가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제발 적당히 해주세요.”
경완이 할 수 있는 말은 그 정도였다.
* * *
갑자기 테스터로서의 할 일이 없어진 경완은 유유자적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뻔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미연이 갑자기 무인도 하나를 구매한 것이다.
무인도? 한국에서 무슨 무인도인가 싶지만, 한국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영토 내에 있는 무인도는 무려 이천여 곳이 넘었다.
조선시대에는 공도 정책이라고 해서 섬을 일부러 무인도로 만들기까지 했다.
경완은 무인도를 구입한 미연의 내심을 짐작했다. 바스티앙의 슈퍼요트에서 놀았던 추억이 적잖은 동기가 되었으리라.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둘이서 돌아다닐 수 있는 장소에 대한 열망이 남았달까?
경완은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내가 먼저 둘러보고 올게.”
“같이 가.”
“아니, 먼저 가서 웜홀 마커 찍어두려고.”
“아, 그래?”
웜홀의 편리함을 경험한 그녀는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야외 캠핑의 로망을 버리진 않았는지 각종 캠핑 장비를 구입했다. 그것을 설치하는 담당은 경완의 몫이었지만 말이다.
“날짜는 잊지 않았겠지?”
“설마 잊겠니?”
미연의 물음에 경완이 대꾸했다. 밋밋한 일상을 귀찮게 할 자극을 잊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경완은 걱정하진 않았다. 귀찮기는 해도 힘들진 않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방면으로 활용 가능한 초능력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랴? 여차하면 웜홀로 돌아오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캠핑용 장비가 거실 한구석에 잔뜩 쌓였다. 미연이 게임 패드를 잡고 열심히 화면을 주시하는 경완의 등을 덥석 안으면서 주말인 내일에 대한 기대를 잔뜩 드러냈다.
“내일 가면 뭐 하고 놀까?”
“그냥 아무 안 하고 쉬자.”
“오빠는 어차피 평소에도 아무것도 안 하잖아?”
“얌전히 있어주는 게 일이야. 나 같은 사람이 부지런히 움직이면 여러 사람에게 민폐거든.”
“어째서?”
“흐음…….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달까?”
나름 명석한 머리를 가진 미연은 바로 이해했다.
“오빠가 부지런히 사는 게 싫은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네.”
“뭐, 전과가 전과니 만큼 어쩔 수 없겠지.”
경완은 그들의 처지를 이해했다. 본인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마냥 좋게 생각하기엔 인간의 이기심과 변덕은 경완 본인조차 예측할 수 없을 때가 있었으니까.
그때 전화가 왔다. 누구에게 온 전화인지 확인해본 경완은 패드를 놓고 전화기를 들었다. 미연은 알아서 떨어져서는 대신 소파로 와서 그의 다리에 머리를 얹었다.
그녀의 배 위로 치즈가 올라올 때 경완은 수신 버튼을 누르고 인사말을 건넸다.
“네, 총수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안부 인사를 건넬 틈도 주지 않고 용건을 묻는 말에 요하네스도 바로 본론을 꺼냈다.
[요즘 종합초능력전술장비를 두고 정부와 갈등을 맺고 있습니까?]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닥터 킴에게서 도와달라고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 아줌씨가..
경완은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요하네스의 말에 대꾸했다.
“글쎄요. 갈등이라고까지는 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그냥 저쪽에서 그의 수중에 강력한 무기가 들어가는 걸 막으려고 일방적으로 호들갑을 떠는 느낌이었다. 경완의 입장에선 강력한 무기는커녕 거추장스러운 장식에 가까운데 말이다.
[닥터 킴의 말은 다르던데요?]
“뭐, 그분이 저에게 선물을 주고 싶은데 정부의 간섭으로 막힌 상황이잖아요.”
정부가 생각보다 강하게 나오자 경완의 입장은 굳이 노력해서 TSTG를 얻어낼 생각이 줄어들었다.
반드시 필요하거나 그렇게 강하게 가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누군가에겐 슈퍼히어로 코스플레이를 할 수 있는 로망이겠지만 경완에겐 딱히 끌리지 않았다. 영웅도, 영웅 행세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때문에 불똥이 저희에게도 튀었답니다.]
“오, 그래요?”
경완은 굳이 무슨 불똥인지 묻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다는 심경을 우회적으로 드러냈지만 요하네스는 기어코 그 불똥이 뭔지 말해주었다.
[코어기술의 특허등록을 하라더군요.]
“……미쳤네요.”
일단 초능력 공학이 아직 제대로 된 체계도 잡지 못한 상태에서 코어 기술 특허를 심사할 거라는 배짱도 그렇지만, 위버멘쉬에서 정부에서 시킨다고 따를 거라는 발상 자체가 대~단한 근자감의 발로였다.
설사 위버멘쉬가 그러한 요구를 수용한다고 해도 문제였다. 생산은 어떻게 하려고? 위버멘쉬가 보유한 숙련된 초능력 노동자를 어떻게 따라잡겠다는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기술이나 인재 유출 시도라도 있었나요?”
[역시 경완 씨는 대단하군요. 네, 있었고 있을 예정입니다.]
위버멘쉬의 코어기술을 노리는 이가 비단 한국 정부만은 아닐 것이다. 기업도 있을 것이고 국가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만 대단히 도덕적이라 그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미쳤네요.”
경완은 다시 한 번 감상을 내뱉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도덕적이야 하는 이유는 뭘까? 그것이 옳기 때문에?
아니다. 그것이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적을 적게 만들고 동지, 아군을 많이 만들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만큼 단순하고 명쾌한 전략이 없었다.
더구나 언제든지 입을 막고, 이미지 체인지를 할 수 있는 강대국도 아니고 동남아 구석에 박힌 조그만 나라가 세계구급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위버멘쉬에 갑질을 시도한다?
뒤에 뭔가 다른 배경이 있지 않고서는 미쳤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누구죠?”
[일본입니다.]
“네?”
일본이 왜 여기서 나와? 경완은 고개를 갸웃했다. 일본은 그동안 급변하는 국제정세에서 한참이나 조용히 지내고 있지 않았던가?
[한가지 사족을 붙이자면 일본은 중국과 더불어 우리 위버멘쉬가 진출하지 못한 나라 중 하나입니다.]
“그 말은…… 위버멘쉬를 싫어한다는 건가요?”
[아니요. 딱히 싫어하진 않지만, 일본 진출을 반기지는 않는다는 입장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