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239화
23-팍스 위버멘쉬
[굳이 제가 필요한가요?]
경완의 질문에 히야모토는 곤란한 듯 웃으며 설명을 이었다.
[스마트 포스필터의 화학적 결합을 끊어내는 작용은 그 결합을 끊어내기 위한 임계점에 도달해야 합니다. 강력한 출력을 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죠.]
[그게 나다?]
[네.]
[그럼 이번에 기술이 실증되어도 소용없잖아요?]
결국 경완 말고는 쓸 수 없다는 소리니까.
그러한 지적에 히야모토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초능력자를 모아 출력을 증대시키는 연구가 진행 중입니다. 물론 초능력 강화 훈련도 계속 연구 중이구요.]
딱 들어도 기밀인 정보였지만 경완은 그게 뭐? 이런 태도였다. 그런 연구 안 하는 나라가 지금 이 지구상에 있긴 할까?
경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고, 물러난 히야모토에 의해 가동된 스마트 포스필터가 가하는 감각에 집중했다.
뇌파 간섭기에 의해 감각이 교란되기 시작하자 경완은 왜 히야모토가 미리 말해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마치 눈이 하나인 사람에게 눈이 하나 더 달린 느낌이었다.
그냥 옆에 달린 것도 아니고 저기 공간 너머 반대쪽에 달려서 서로의 눈알을 마주 보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각각 한쪽은 흑백, 다른 한쪽은 컬러로 보는 느낌에 비유할 수 있었으니, 머리가 상당히 어지럽고 본인의 위치에 대한 기준을 잡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마트 포스필터라고 했던가? 확실히 난이도가 있는 기술이었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생소한 감각에 적응한 후에야 경완은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리창 너머에 쌓여 있는 방사성 폐기물들에 어떤 현상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흙이었는데, 마치 바닥이 기울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한쪽으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소량의 흙, 혹은 가루는 그 반대편으로 움직여 구석에 작게 쌓였다.
약 두 시간이 흐른 후 경완은 장치에서 내려왔다. 이마가 땀에 젖어 번들거렸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히야모토와 마츠키가 다가와 말했다. 하지만 히야모토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경완에게 사용 시의 감각, 혹은 불편한 점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봤다.
경완은 속으로는 귀찮아하면서도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히야모토가 위버멘쉬의 회원이라는 점을 고려해서였다.
경완이 위버멘쉬의 회원이라고 특별 취급할 이유는 없지만, 잘 생각해 보면 히야모토는 보통 회원이 아니었다.
위버멘쉬에 배타적인 일본에서 굳이 위버멘쉬의 회원이 되었으며, 그냥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교토대학 초능력학부의 젊은 교수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었다.
좀 과장해서 설명하자면 이번 방사능 폐기물 완전 처리와 스마트 포스필터 기술 시연의 성공은 비단 일본의 성공만이 아니라 위버멘쉬의 성공이 아닐까?
경완의 생각에 요하네스가 그 성공에 대한 지분을 두고 일본 정부와 다투려고 들진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그 명성과 명예를 일본에 넘겨주고 뒤로는 협상을 통해 일본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려고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닿으니 히야모토가 더욱 중요한 인물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조직이든, 어느 사회든 결국 사람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 항상 사람이 모든 것의 문제고, 사람만이 해답이었다.
배타적인 일본에 위버멘쉬가 진출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람부터 공략해야 한다. 이것이 요하네스가 찾은 답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히야모토는 앞으로 생길지 모르는 위버멘쉬 재팬에 필시 중요한 인물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요하네스와의 친분을 생각해서라도 경완은 귀찮아도 최대한 성의껏 히야모토를 상대했다.
미래는 알 수 없는 일이라 히야모토가 위버멘쉬를 배신할 가능성도 없진 않겠지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두고 행동할 순 없는 노릇이었고, 또한 히야모토가 위버멘쉬를 쉽게 떠나는 상황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김봉남의 말에 의하면 스마트 포스필터 기술의 개발에 위버멘쉬가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해 보였는데, 비단 스마트 포스필터뿐일까? 초능력 공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위버멘쉬의 지원은 간절할 정도로 매력적일 터였다.
이는 히야모토도 다르지 않을 터였다.
경완이 히야모토의 질문에 착실하게 대답하는 와중에 연구원들은 가우스 계수기를 가지고 들어와 쌓인 무더기를 조사했다.
한쪽에선 가우스 계수기가 자연 방사선 수치를 나타냈지만, 작게 쌓인 무더기에서는 미친 듯이 소리를 내며 숫자가 치솟았다.
그러한 사실이 알려주는 건 명확했다. 실험이 성공한 것이다.
[축하해요, 박사님.]
마츠키가 이 기쁜 소식을 히야모토에게 말했지만 그는 웃으면서도 마냥 기뻐하진 않았다.
[이제 남은 건 이걸 상용화하는 거겠죠.]
어찌 보면 해결하기가 더 어려운 문제이기도 했다. 이 기술을 운용할 수 있는 이들을 육성할 방법이 나오거나, 아니면 부족한 출력을 어떻게든 보충할 방법을 찾거나.
하지만 일단 일본 윗분들의 눈에는 충분한 성과였다. 수십만 톤에 달하던 방사성 폐기물들을 고작 수백 킬로그램으로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으니까.
* * *
이 작업은 경완이 일본에 머무는 한 달여 동안 진행되었다. 수십만 톤의 흙은 깨끗한 토양으로 돌아갔고, 폐기물들은 재활용 공장에라도 들어간 듯 깔끔하게 분류되었다.
그 와중에 중성자를 흡수해 방사성 동위원소가 된 물질들을 포함, 독성을 띤 방사성 핵종들은 스마트 포스필터에 의해 분리되어 적당한 전기화학적 처리만 거치면 재활용이 가능한 수준으로 응축되었다.
일본의 언론들은 이 동안 일본 국민들이 까먹지 않도록 이 방사능 폐기물 처리 작업을 반복해서 홍보하듯 방송했다. 유권자들에게 일본이라는 국가가 이렇게 잘되고 있다, 지도자들이 잘 이끌고 있다고 홍보하기 위한 밑밥이었다.
물론 경완의 이름도 간간이 나왔지만, 그가 일본을 돕는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런 인물을 초빙할 수 있었던 일본 정부의 외교적 성과(?)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렇다고 경완이 완전히 무시받은 건 아니었고, 귀한 몸인 만큼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주말에는 근처 온천을 비롯한 관광지를 돌아다녔고, 식사마다 비싼 초고급 음식점으로 모셔졌다.
이 모든 것이 공짜! 일본 국민의 혈세로 이루어졌지만, 임시 방사성 폐기물 보관소를 운영하면서 매년 빠져나갈 예산을 생각하면 티끌에 불과했다.
거기에서 그쳤으면 경완도 120%만족했겠겠지만 안타깝게도 폐기물 처리가 완료된 마지막 날에 업무에 가까운 파티가 열렸다.
“왜 이런 걸 입어야 하는 거죠?”
김봉남은 ‘방사성 폐기물 완전 처리 기념 파티’라는 네이밍 센스가 의심되는 행사에 드레스 코드가 있는 게 이상했다.
그것도 여자는 드레스에 남자는 턱시도라니? 무슨 부유층 오페라 관람 가는 것도 아니고.
경완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들만의 감성이겠죠. 굳이 이해하려고 하지 마요.”
그들 옆에서 김준은 말없이 주최 측에서 준비한 턱시도를 입었다. 일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에 안 들어도 입을 수 있었다.
아무튼, 파티는 즐기는 곳이 아니라 일종의 쇼하러 가는 곳이었다. 이때의 ‘쇼’가 의미하는 바는 ‘쌩쇼’할 때의 쇼가 아니라 업무적인 의미의 쇼였다. 일본의 높은 분들의 체면을 살려주고, 그들의 사회적 명성을 빛내주기 위한 장소인 것이다.
경완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런 장소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지만, 그도 얻을 것이 있으니 가는 거 아니겠는가?
경완이 파티에 참가하자 여러 노인네가 악수를 청해왔다. 마츠키가 그의 옆에 붙어서 일일이 그들을 소개해 주었다.
누구는 자민당 간사고, 누구는 후쿠시마 부흥회 협회장이고, 누구는 일본 초능력학회 부회장이고. 아무튼, 경완은 정신없는 소개의 파도를 하나하나 웃음과 미소로 넘겼다. 그리고 사진도 한 방씩 찍어주고 말이다.
파티장에서의 이경완은 나이 지긋한 일본인들에게 제법 인기인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그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나 일본의 높은 분들과 안면을 다졌는데 일본 극우가 과연 경완을 막 대할 순 없지 않을까? 그리고 그만큼 그들의 돈을 먹는 신친일파들도 그를 어찌 대해야 할지 애매해질 수밖에 없으리라.
파티가 끝난 후 경완은 마츠키에게 물었다.
“이제 일정 다 끝난 거죠? 집에 가도 되죠?”
“네.”
마츠키가 친절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경완은 김봉남을 보며 같은 질문을 던졌다.
“정말 딴 일 없이 집에 가면 되는 거죠?”
일본에 온 건 결국 요하네스의 계획 때문이니까 용건이 더 없는지 물어봐야 했다.
김봉남은 무던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경완은 딱히 더 뭔가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걸 확신했다.
그리고 빠르게 행동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
“?”
간다니 어딜?
마츠키와 김봉남이 고개를 갸웃하는 와중에 경완은 웜홀을 열고 사라져 버렸다. 한국으로 돌아간 것이다.
황당하고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와중에 ‘잠깐!’이라는 한 마디를 내뱉으려다 멈춘 김준의 한숨 소리만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혼자서 한국에 가야 하는구나…….
* * *
경완이 일본에 갔다 온 일은 한국에도 알려졌다. 당연하게도 일본 언론에서 하도 홍보를 하니 모를 리가 없었다.
물론 일본 언론의 보도에서 경완의 비중은 매우 작았지만, 한국이 어떤 나라인가? 국뽕의 나라 아닌가? 사람들의 관심에 목마른 한국 언론에게 ‘한국인이 일본에 은혜를 입히고 한국인의 위상을 드높였다’라는 서사는 도저히 참고 넘어갈 수 있는 요소가 아니었다.
“이야~. 요즘 오빠 유명인 다 됐는데?”
“새삼 무슨…….”
경완은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지었다.
이미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인 아닌가? 중공 참수 몰살, 중공 붕괴의 장본인으로서 말이다.
그가 어이없어하는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미연은 TV에 나오는 전문가의 말을 들었다. 그러고는 피식 웃으며 경완의 옆구리를 찔렀다.
“오빠. 저 말 맞아? 안정적인 가정생활로 분노가 가라앉아서 얌전해지고 사회화가 되고 있다?”
“허. 허. 허.”
경완은 리모컨을 눌러 TV 프로그램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언터처블이라 불리는 그의 변화에 관한 토론’이라는 프로그램 설명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그를 귀찮게 하는 이들이 자중하길 바라서 일본에 다녀왔을 뿐인데 이렇게 토론 프로그램의 주제가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자신을 두고 ‘드디어 사회화가 되었다’, ‘분노 조절이 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곳간에서 인심 난다의 전형이다’라며 입을 터는 패널들을 보며 어이가 없어졌다.
도대체 자기에게 물어는 보고 말하는 건가? 인터뷰도 안 했으면서.
차라리 반대쪽 패널들의 말이 덜 쪽팔렸다. ‘한국 정부를 압박하기 위한 전략적 행동’, ‘일본이 그에게 뭔가를 제공할 동안 한국 정부는 뭐 하고 있었나?’같이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일단 초점에 경완이 아니라 정부를 향한다는 점에서 경완에게 수치감을 덜 주었다.
그게 뭐가 좋은지 미연은 결국 토론 프로그램을 끝까지 보았다.
“재밌었다. 그치?”
경완은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와. 게임 할 거야.”
“오빠. 모르겠어? 세상 모든 사람이 오빠에게 관심이 생겼다니까.”
“언제는 안 그랬겠어?”
경완은 기자들이 생각보다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기자들에게 딱히 친화적인 인물이라서가 아니라 기삿거리가 되어주기 때문이었다.
그의 등장부터 기자들에겐 센세이셔널하지 않았던가?
그가 국회의원을 인질로 잡았을 당시, 그는 그 자리에 있던 국회방송 카메라맨을 이용해 그 장면을 전국에 방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