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240화
24-현지화
당시 국회방송의 시청률 40%는 아직까지 언론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전설이었다.
그 밖에 이경완과 같이 막나갈 것 같은 초능력자가 딱히 기자들에게 폭력을 쓰는 것도 아니라는 점도 고려하면 언론에게 있어 이경완이란 인물은 악의적으로 자극하지만 않으면 훌륭한 기삿거리를 제공해 주는 원천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경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대부분 빌런 수준이었고, 최대한 긍정적으로 봐도 자경단이었다.
그가 저지른 짓에 대해 이해는 해도 공감은 하기 힘들달까? 설사 공감해도 남들 시선이 신경 쓰여서 감히 옹호하기는 힘들달까?
중공 참수 사건은 그러한 여론을 상징하는 극단적인 예였다. 모두 복수를 해줘서 속 시원하다고 했지만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그러한 말을 하진 않았다.
인터넷의 익명을 통해서 경완을 지지하는 이는 즐비했지만, 공식적으로는 그에 대한 그 어떤 논평이나 입장도 없었다. 마치 그를 모르는 것처럼, 중국에서 일어난 일에 한국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예컨대 지금까지 경완이 쌓은 건 명성이 아니라 악명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랬던 경완이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비록 이웃 나라지만) 일을 하다니? 드디어 정신을 차린 것인가?라는 기대감이 이번 현상의 원인이었다.
세계 최강의 초인. 그런데 성질머리가 지랄 맞고 심지어 반사회적인 부분까지 있어서 감히 다루려고 나서고 싶지 않은 인물.
그런데 그런 인물이 갑자기 좋은 일을 했다? 그것도 한국과 국민감정이 있는 일본을?
그래서 그에게 혹시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는 것이었다.
경완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내가 대화가 통하는 인물이기는 하잖아?”
그는 언제나 자신이 타협적이고 대화가 통하는 인물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러한 시각에 변화는 없었고, 예전과 지금의 태도가 그렇게 변했다고는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다.
미연은 경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대화만 통하지 고집을 꺾은 적이 있어?”
“얼마나 많은데?”
“그야 사소한 일에선 그랬지, 중요한 일이다 싶으면 오빠 스타일대로 해버렸잖아. 누구 조언을 귀담아들은 적은 있어?”
경완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결국 미연의 말이 옳다는 걸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큰일로 분류할 수 있는 건 결국 자신의 기분 내키는 대로, 혹은 본인이 생각하기에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해버렸다.
처음 이 세상에서 깨어났을 때 일진놈 복부에 칼침을 박은 것도, 국회의원에게 테러를 가한 것도, 교도소에서 언터처블이 된 것도, 마리아 소장을 돕기로 한 것도, 서울 참사에 대한 보복으로 학살을 저지른 것도 모두 본인의 기분과 생각에 따라 한 짓 아닌가?
중요한 일일수록 본인의 결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사실 이 세상 인간 대부분은 본인이 원하는 대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정말 대학에 가고 싶지만 돈이 없거나, 가난에서 탈출하고 싶지만 갱단에게 착취당하거나, 당장 사표를 내고 싶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참거나 등등.
인간의 결정은 결국 환경에 제한받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하고 싶은 걸 하기엔 현실과 후일을 감당할 여력과 의지가 모자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뭐, 세상 살다보면 악에 받쳐서 미친 짓을 하는 인간들을 종종 보게 되지만, 그게 정말 그들이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나? 일을 저지른 후 그 뒷일들을 정말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감수할 수 있을까?
그런 부분이 경완이 궁지에 몰리고 악에 받혀서 미친 짓을 하는 이들과 다른 점이었다.
그는 어떤 일이 발생할지 전생의 경험으로 대충 유추할 수 있었으며 그럼에도 그러한 짓들을 하기로 한 거니까.
아무튼, 경완은 미연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인과의 대화는 즐거움이자 의무였다.
“혹시 위버멘쉬가 뭔가 한 거 아닐까?”
그 와중에 나온 미연의 의문이 그럴싸했다.
“오빤 어떻게 생각해?”
“생각하긴 무슨 생각을 해? 물어보면 되지.”
경완은 미연이 미처 말리기도 전에 요하네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기가 밤이든 새벽이든 상관없었다. 자신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평판 작업을 했다면 경완 역시 요하네스가 자고 있든,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든, 연인과 만리장성을 쌓는 중이든 고려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네, 경완 씨.]
자는 중이었을까? 전화를 받는 요하네스의 목소리가 피곤에 젖어 있었다.
“주무시고 계셨어요?”
[아, 네.]
“아유, 죄송.”
하나도 죄송하지 않았지만 입에 발린 말이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돈 한 푼 안 드는 일이니까.
“급하게 물어볼 게 있어서요.”
[무엇인가요?]
“최근 한국 언론에 뭔가 하신 거 있어요?”
[……왜 그런 의문이 생기신 겁니까?]
“그야 새삼스러우니까요.”
이경완의 이름이 다시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것도 예전과 다르게 상당히 긍정적인 이미지로 말이다.
이 나라의 기득권이 그를 좋게 볼 리 없을 테니 다른 이의 입김이 들어갔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요하네스는 금방 자신이 그러했다고 자백했다.
[네, 제가 했습니다.]
“왜요?”
[왜긴요? 일본에서 지핀 불씨를 한국까지 옮겨야 우리의 계획이 의도대로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요하네스는 일본의 언론이 경완에 대한 언급을 그렇게나 안 할 줄은 몰랐다고 고백했다. 자연히 한국 언론에 불씨가 옮겨붙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보이지 않아서 본의 아니게 언론에 손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고…….
“이제 한국 언론과 좀 친해지신 건가요?”
[친해질 수가 없죠. 이 견고한 언론 기득권들은 결코 길들여지지 않아요.]
그저 때에 따라 이해관계를 일치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럼 이 언론 기득권들이 누구와 친해질 수 있을까? 바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해 줄 수 있을 만한 유력자였다.
“친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언론을 움직이신 거죠?”
[한국의 언론이 메이저만 있는 건 아니거든요. 마이너한 언론도 있고 인터넷 여론을 다루는 업체도 있죠.]
이어서 요하네스가 간략하게 설명하길, 우선 인터넷 여론을 조장하는 업체를 통해 분위기를 만들고, 마이너한 언론을 통해 이슈를 부각했다고 했다.
문제는 메이저 언론인데, 위버멘쉬가 그동안 제법 광고비를 먹인 탓인지 관계가 나쁘지 않았고, 이슈가 제법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괜찮았으며, 무엇보다도 위버멘쉬 코리아가 슬슬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점이 컸다.
“그게 이유가 되나요?”
경완은 마지막 이유가 좀 납득이 안 됐다. 별것도 없었는데 텃세가 벌써 끝났다고?
[일제시대 땐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고, 김일성이 서울 점령했을 땐 장군님 만세를 외쳤던 한국언론이죠. 새롭게 등장한 유력자에게 일단 우호적인 손을 내밀면서 간을 보는 건 그들에겐 당연한 행동원리입니다.]
아, 그렇구나. 다른 건 몰라도 경완은 위버멘쉬 코리아가 잘 나가고 있다는 거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언론이 간을 봐야 할 정도로 말이다.
어디 만만한 정치인이거나 힘없는 단체라면 사회적으로 매장하려고 지랄발광을 했을 텐데 말이다.
[역시 대기업과 손을 잡은 게 주효했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이렇게 사람 민망하게 하는 여론이 늘어난 건가요?”
[그렇죠. 그 부분에선 죄송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본인 얼굴에 금칠할 테니 긴장하고 있으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전 관심종자가 아니라 이런 식의 관심이 좀 그런데요.”
경완의 말에 요하네스는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농담도 잘하십니다.]
경완은 잠시 수화기를 막고 미연에게 물었다.
“혹시 나 관종끼 있어?”
“살짝?”
미연의 말에 경완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요하네스와 통화를 계속했다.
이어진 대화의 내용은 아무튼 당분간 이경완 이름 석 자가 언론에 오르내릴 테니 적절하게 대응하면 된다는 식의 내용이었다. 더 유명해지든지, 아니면 여태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지내고 싶은지 마음대로 하면 된다면서 말이다.
요하네스와 통화를 끝낸 이후 경완은 자신의 관종끼에 대해서 미연과 가볍게 투닥거렸지만 그녀가 국회의원 테러 사건을 언급하자 도저히 반박할 말이 없어서 조용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자신은 좀 하이~했던 것 같았다.
* * *
24-현지화
경완은 조용히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건 기득권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했고, 또한 미연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이 계속 대중에 회자되면 결국 미연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은 필연적이었으니까.
사실 지금도 그녀의 이름이 경완과 함께 사람들의 입에 오르지 않는 것도 굉장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고 이는 미연도 인정했다.
“우리 사장도 이상하다고 하던데?”
“요하네스 씨가 배려해 주고 있는 게 아닐까?”
“물어봐.”
미연의 재촉에 경완은 다시 요하네스와 통화했고 답을 얻었다.
“그렇대.”
요하네스가 말하길 경완의 친구로서 그의 여자에게까지 여파가 가지 않도록 할 책무가 있다나?
경완은 일단은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는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슬슬 이슈가 일본에서 개발했다는 스마트 포스필터로 넘어갈 때쯤 마리아 소장으로부터 소포 하나가 왔다.
마네킹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소포 크기에 경완은 그것이 뭔지 바로 알아차렸다. 아이X맨 슈트였다.
그리고 그건 정부와 마리아 소장의 신경전에서 마리아 소장이 승리했다는 것을 뜻했다. 또는 요하네스의 계책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거나.
경완은 배달부가 내민 단말기에 서명하고 소포를 거실로 가져와 포장을 풀었다. 반쯤 포장을 푸는데 전화가 왔다. 마리아 여사였다.
“네, 소장님.”
[선물 잘 받았어요?]
“네. 지금 박스 벗기는 중이에요.”
경완은 뜯은 박스 안으로 보이는 종합초능력전술장치를 보며 대답했다. 아무리 봐도 마크 원을 닮았다.
“결국 허락받았나 보네요?”
[이래저래 말하기 복잡한 사정이 있었어요.]
정부의 압박이 갑작스럽게 줄어들고, 마리아 소장이 정부에서 선정한 테스터가 과연 그녀의 기준에 부합하는지 검증하는 과정 끝에 결국 경완이 TSTG를 테스트하는 걸 승인받았다.
[대신 다른 테스터도 동원해서 함께 연구를 진행하는 조건을 받았어요.]
“이게 프로토타입인 거 아닌가요? 다른 프로토타입도 있어요?”
[위버멘쉬에서 코어 하나를 더 보내줬더라고요. 버전1.1을 만들어서 동시에 진행하기로 했죠.]
“좀 낭비 같은데요.”
[전혀요. 버전 1.1이라지만 경완 씨가 가지고 있는 것과 설계 개념이 좀 많이 다르거든요.]
“어떻게요?”
[경완 씨가 받은 프로토타입은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테스트하기 위한 거고, 버전1.1은 가성비를 고려해서 설계한 거예요. 그래서 코어부터 좀 차이가 나죠.]
“그렇군요.”
경완이 수긍하자 마리아 소장은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이틀 뒤에 테스트가 있을 예정이니 방금 받은 그거 입고 와요.]
그리고 이틀 뒤, 경완은 TSTG를 입고 하늘을 날아서 세립 초능력 연구소로 향했다.
그가 날아가는 걸 목격한 아이들이 밑에서 뭐라고 소리치자 경완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이들에게 그 정도 서비스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어서 와요.”
연구소에 도착하자 마리아 소장이 경완을 반겼다.
“집에서 입어보니까 어때요?”
“시야가 너무 불편해요.”
“경완 씨에게 별다른 문제는 안 되잖아요?”
마리아 소장이 경완의 초감각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경완이 대답했다.
“테스터 입장에서 그렇다는 얘기죠. 저만 입을 거 아니잖아요.”
그 말에 마리아 소장이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그런 협조적인 자세. 아주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