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246화
24-현지화
“시간과 예산이 더 있다면 실험, 아니 훈련 설계를 더 정밀하게 짤 수 있어요. 다만 그래도 인위적인 환경이라 다른 방향으로 능력이 발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있어요.”
“그럼 안 되겠네요.”
이철은 결정을 내렸다.
물고문도 견디고 눈을 가리고 일방적으로 맞는 것도 견뎠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능력을 위해 일상을 포기한다는 건 원한을 갚기 위해 수련하는 무협지의 주인공에게나 해당하는 일이었다.
경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결정을 존중해주었다. 그의 입장에선 어차피 매몰비용이 크지 않았고, 또한 사회인인 이철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초능감각 수련이랍시고 눈을 가린 채 생활하는데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되겠는가?
단지 아쉬운 건 마리아 소장뿐이었다. 이철이 포기를 선언함으로써 실험을 더 진행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흥미로운 실험을 몇 가지 더 준비했는데 말이다.
그녀는 아쉬움을 달래보고자 경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경완 씨. 제가 제안 하나 할 게 있는데…….”
“……일단 들어보고요.”
“제가 아는 코어 제작자가 시험용 코어를…….”
“안 해요.”
“왜요? 제가 좋은 조건을,”
“딱 봐도 갈려고 하는 게 보여서 싫어요.”
안 그래도 교도소에 있을 때부터 경완을 초능력 연구자로 만들고 싶었던 낌새를 풍기던 마리아 소장이었다.
하긴 다른 초능력을 보고 카피할 수 있는 경완의 S입자 감응력을 생각하면 매일같이 패드나 잡고 시간이나 죽이고 있는 그의 생활은 인류의 커다란 손실이었다.
경완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바였다. 자신이 다른 세상에서 쌓아온 지식으로 문명에 영향을 끼친 적은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인류의 발전과 번영에 대의와 환상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라면 달랐겠지만, 지금의 그에게 그런 건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이 세상의 인류가 발전에 실패하고 절멸한다고 해도 다른 세상, 더 발달한 문명과 문화를 가진 인류는 얼마든지 더 있다는 걸, 그만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인류에게 이 세상은 유일한 세상이겠지만, 경완에게는 아니었다.
“아쉽네요.”
마리아 소장은 더는 설득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말 몇 마디로 그를 설득할 수 있었다면 예전에 그를 자신의 조수로 채용했을 것이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경완은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웜홀로 집에 돌아가 버렸다. 정말이지 웜홀 스킬을 쓸 때마다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 차례 각성 소동(?)이 끝나고 경완은 이제 이철을 시험장에서나 볼 줄 알았다. 주말에 그가 한우 투쁠 등급을 사오기 전에는 말이다.
“응? 무슨 일이야?”
“그간 신세 진 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하러?”
왜 왔는지는 알겠는데 왜 의문형일까? 표정도 좀 어딘가 찔려 하는 모양새였다.
경완이 문득 든 생각에 찔러봤다.
“형 상사가 그러라고 시켰어?”
“어. 음…… 응.”
그 통찰력에 이철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솔직하게 말했다.
그가 다시 주말에 경완을 방문하게 된 경위는 이러했다.
이철이 경완과 마리아 소장과 있었던 일을 보고하자 다시 청장이 불렀다.
“그러니까 더는 이경완과 주말에 만나지 않는다고?”
“그렇습니다.”
“거참. 젊은 사람이 왜 그렇게 재미가 없나. 오랜만에 동향 친구를 만나면 같이 술도 마시고 노래방도 가고 응당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
“히어로도 좋고,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도 좋지만 자기 삶도 살아야지. 일과 일상 사이에 균형을 잡는 게 인생의…….”
아. 이것이 바로 꼰대라는 것인가?
청장의 잔소리는 길었지만 핵심은 결국 이경완과 친분을 잘 다져보라는 권고였다. 선물 들고 방문하는 것도 청장의 조언이었다. 한우 싫어하는 한국 사람은 없다나?
그런데 그 말대로 하면 일과 일상의 균형이 안 맞는 거 아닌가? 지시사항은 어디까지고 사생활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대충 설명을 들은 경완은 혀를 찼다.
“쯧쯧. 제사보다 제삿밥에 관심이 있었으니까 초능감각 말고 엉뚱한 능력이 발달하지.”
그의 면박에 이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솔직하게 경완의 판단만 기다렸다. 혀를 놀려 상황을 풀기에는 양심이 찔렸다.
경완은 아무 말 못 하고 묵묵히 자신의 축객령을 기다리고 있는 이철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냥 꺼지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그건 옛날 옛적 자신의 잃어버린 순수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 마치 닳고 닳은 어른들이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보며 향수에 젖고, 그때만큼은 조금 너그러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잠깐 기다려 봐.”
경완은 다용도실에서 그릴과 숯을 꺼내왔다. 냉장고도 열어서 쌈야채와 양념 같은 것도 꺼냈다.
“가자.”
경완이 챙긴 것만 봐도, 고기를 구워먹자는 의미인 건 알 수 있었다.
이철이 침중한 기분으로 물었다.
“널 속인 날 용서해 주는 거야?”
“속이긴 뭘 속여? 형 성격에 아무리 위에서 시켰다고 해도 친해지기 싫은 사람하고 친해질 수 있겠어?”
경완이 가볍게 말했다.
시설에서 잠깐 지냈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이철은 그리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게다가 거짓말도 잘 못 한다.
경완은 민망해서 대답하지 못하는 그를 데리고 무인도로 왔다. 그리고 그릴에 숯을 넣고 불을 지폈다.
“형, 고기 구울 줄 알아?”
“응.”
이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나름 신입이었던 시절이 있었기에 회식 때에는 으레 고기 굽는 담당을 맡았다. 어디에선 신입에게 귀한 고기를 맡길 수 없어서 자신이 굽는 선배, 상사가 있다지만, 이철에게 그런 사람은 마치 유니콘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오랜만에 방문한 무인도에서 이철은 못 보던 걸 보았다. 커다란 바위로 만든 것 같은 테이블과 원목을 잘라 만든 것 같은 간이 의자였다.
경완은 가져온 짐을 한쪽에 잘 두고 자체 무게가 모래를 눌러 살짝 기울어진 바위 테이블을 초능력을 들어서 수평을 맞추고는 상차림을 시작했다. 이철도 경완을 도와 테이블을 세팅했다.
원뿔대를 거꾸로 놓은 것 같은 모양의 테이블 가운데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경완은 거기에 벌겋게 달궈진 숯이 든 화로를 넣었다.
“이 테이블 네가 만든 거야?”
“응.”
재료인 바위는 섬 안쪽에서 찾아낸 물건이었다.
경완의 대답에 이철은 경완이 가지고 있다는 절단 능력을 떠올렸다. 뭐든지 자를 수 있는 능력이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직접 그 결과물을 만져보니 심상치 않았다. 표면이 마치 연마라도 한 것 마냥 맨들맨들 미끄러웠다.
“대단하네.”
“당연한 소릴 하네. 얼른 고기 굽자. 배고파.”
그러고 보니 벌써 점심때가 되었다.
이철이 그릴에 한우를 올렸다. 뜨거워진 그릴에 올라간 얇은 한우가 순식간에 바르게 갈색으로 구워졌고, 경완이 얼른 젓가락으로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역시 한우 첫 입은 아무것도 안 찍고 순수한 맛을 즐겨야겠지?
말없이 한 사람은 구워주고, 한 사람은 먹는 시간이 길어졌다. 어색함도 점점 깊어지는 와중에 경완이 입을 열었다.
“왜 안 먹어?”
“…….”
참 빨리도 말한다.
경완의 말에 이철은 그릴 위에 한 점 남아있는 고기를 집게로 집어 앞접시에 옮겨다 놓고 그릴에 한우를 잔뜩 올렸다.
“많이도 사왔네?”
“내 돈 아니라서.”
선물로 한우라도 사가라는 청장의 잔소리를 잔뜩 들은 후에 돈이 없다고 하니 판공비를 받았다. 청장이 한웃값을 주면서도 젊은 사람이 돈도 안 모으고 뭐 했냐고 또 잔뜩 잔소리하기에 자신이 나온 시설에 기부하고 있다고 하니까 입을 다물더라.
“그래도 양심은 있는 사람이네. 다른 꼰대 같았으면 자기 앞가림부터 하라고 2절을 시작했을 텐데.”
이철의 이야기를 들은 경완이 대꾸하자 이철도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런 식으로 청장을 두둔한다고? 여기서 청장보다 더한 인간상을 거론할 수 있는 저 녀석의 머릿속엔 도대체 뭐가 들어있을까?
아마 경완에게 묻는다면 바닥에 닿았다 생각했을 때 그보다 더 깊은 바닥이 있다는 삶의 진실을 얘기해 주리라.
아무튼, 역시 상사 뒷담화가 말문 트기 딱 좋은 소재였는지 두 사람은 시설에 있을 적부터의 일을 하나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물론 불쾌했던 일들은 꺼내지 않았다. 미연이 이정고에게 강간당할 뻔했던 일이라던가, 선미라는 요리사를 꿈꾸던 통통하던 소녀가 납치당해 경완이 불려갔던 일이라든가.
그래서 그런지 경완이 할 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철과 다르게 시설에서 인연을 맺었다고 생각되는 아이들이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그래서 이철이 떠드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래서 그 녀석들 올해에 결혼한다더라.”
그 녀석들이란 경완도 알고 있는 선미와 효군 두 사람이었다. 경완은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선미 납치 사건 때 효군이라는 소년이 헐레벌떡 뛰어와 자신에게 납치 사실을 말했던 걸 떠올릴 수 있었다.
“요즘 세상에 결혼을 하니 다행히 잘 자리를 잡은 모양이네?”
“다행이지, 다행이야.”
성인이 되자마자 시설에서 쫓겨나서 밥도 제대로 못 먹는 아이들이 즐비한 세상에서 이렇게나마 자리를 잡아서 삶을 꾸릴 수 있게 되다니.
아이들도 장하지만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도 자리 잡을 수 있는 준비를 하도록 한 원장님도 대단했다. 이철이 괜히 꾸준히 자신이 나온 시설에 기부하는 것이 아니었다.
추억과 회한에 젖어서일까? 이철은 평소보다 말이 많아졌지만 그걸 자각하진 못했다.
“혹시 결혼식에 올 생각은 있어?”
“아니. 전혀.”
경완은 고개를 저었다. 당연하지만 이철은 더는 권하지 않았다. 그것이 경완 나름대로의 배려라는 건 이철도 이해했기 때문이다.
경완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그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많았고 약점이라도 보인다면 그것을 쥐려고 기회 살피는 이들도 많았다.
미연도 이름 높은 여배우가 아니었다면 여기저기서 찔러보는 행동에 여러모로 힘들고 피곤했을 것이다.
한우로 배를 채운 식사가 끝난 후 경완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철이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잘 먹었다.”
“그래.”
“……내가 사온 건데?”
“판공비로 사온 거잖아?”
어차피 경완과 친하게 지내라는 청장의 요구가 없었다면 이철의 입에도 한우가 들어갈 일이 없었을 거라는 게 사실이기는 했다.
“이럴 때는 그냥 잘 먹었습니다라고 하면 되는 거야.”
“내가 그래서 사회생활을 안 하잖아?”
경완이 대꾸했다.
솔직히 입에 발린 말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는 있다. 필요하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철의 경우에는 이렇게 확실히 선을 그어 놓아야 혹시라도 오해하지 않을 것 같았다. 혹여나 잘 먹었다고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면 마치 그가 이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오해하지 않겠는가?
“너 미연이에게도 그런 식으로 말하니?”
“아니? 내가 왜?”
경완은 고개를 저었다.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뒤에 어떤 꿍꿍이를 두고 접근해 오는 사람과 그저 순수하게 좋아해 주는 사람하고 같은 취급을 할 순 없잖은가?
경완의 말에 이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연이 고생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심정일까? 확실한 건 경완이 이철 자신을 대하는 것처럼 미연을 대하고 있다면 뭔가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점이었고, 그런 경우 이철이 잠자코 넘어가기는 힘들다는 사실이었다.
“그럼 이만 간다.”
“어딜 가?
잘 가라는 말을 기대했던 이철은 그 말에 어리둥절하며 대답했다.
“집에.”
“설거지하고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