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247화
24-현지화
아니, 이놈이?
이철이 황망해하는 가운데 경완이 뻔뻔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미연이 손이 요즘 거칠더라. 밥해주고 설거지한다고 그런가 봐.”
“넌 하루 온종일 집에 있으면서 설거지라도 하지 그러냐?”
“여자는 설거지하는 남자 별로 안 좋아한대.”
“누가?”
“미연이가.”
“왜?”
“남자로서의 매력이 떨어져 보인다나?”
지랄도 가지가지 한다.
하지만 아무리 어이가 없더라도 여친 없는 이철이 할 말은 없었다. 아니 여친이 있었을 때도, 설거지 좀 해라는 소리를 들었지 하지 말라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다. 저런 말을 하는 여자가 실존하는 것도 오늘 처음 들었다.
저 새끼 저거 전생에 세계라도 구한 거 아냐?
이철이 사실은 정답인 망상을 떠올릴 때 경완이 물었다.
“싫어?”
“한우는 내가…….”
“형이 사왔어? 형 상사가 사준 거지. 판공비라며?”
경완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이렇게 치사하고 더러운 꼴을 보면서까지 이 새끼랑 친해져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여러모로 을인 입장인 이철은 결국 설거지를 하고 갔다. 청장이 필시 기껏 사준 한우를 핑계로 반드시 상황을 물어볼 텐데, 저 녀석이 설거지를 시키려고 해서 손절하고 나왔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자존심이 없는 게 아니었다. 비빌 구석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철에겐 회사 때려치운 후 잠시간이나마 밥과 잠자리를 챙겨줄 부모 같은 존재가 없었다.
그런데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다던가?
자존심을 접고 설거지를 하니 얻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렇게라도 저 녀석을 사회와 연결해서 성숙한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 형이 된 도리 아니겠느냐, 보니까 주변 사람들이 죄다 포기한 것 같은데 자신 말고 누가 이 녀석을 이렇게 챙겨주겠느냐?라는 깨달음이었다.
경완이 들었으면 코웃음을 쳤을 소리였다. 요즘 히어로는 정신승리도 잘하는구나, 여자친구도 없는 게 본인부터 챙기라고 면박을 주지 않았을까?
아무튼, 경완과의 주말 무인도 한우 식사는 일종의 허락이었다. 그의 지인으로 행세해도 된다는 허락.
직접 그런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니지만 이철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주말에도 종종 전화로 통화도 하게 되었고, 경완이 받아주기도 했으니 이철 혼자만의 오해나 뇌피셜은 아니었다.
뭐, 그래도 사적인 주제는 잘 묻지 않았고, 공통으로 말할 내용도 기껏해야 TSTG의 테스트나 운용 요령이었다.
“그런데 초능감각을 못 배웠으니 대련은 어쩌지?”
“못하는 거지. 해봤자 의미 없으니까.”
걱정하는 이철에게 경완이 대꾸했다.
여전히 남아있는 TSTG의 카메라와 안면 디스플레이의 딜레이는 이철에게 경완을 뛰어넘기 힘든 벽으로 만들었다. 차라리 안면부는 벗고 상대하는 게 더 편할 정도였다.
이에 마리아 소장은 이렇게 평했다.
“겨우 프로토타입을 벗어난 장비를 하나 착용했다고 우리 경완 씨에게 맞먹으려 드는 건 욕심이죠.”
경완이 옆에서 얄밉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의 생각에 TSTG의 가장 큰 약점은 솔직히 카메라-디스플레이 간의 딜레이가 아니라 그 기동성에 있었다.
아무리 TSTG가 단단하다지만 전투기 같은 거엔 표적에 불과했으니까.
핵심은 결국 상성이었다.
TSTG가 강력한 초능력자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시스템적 견제’를 목적으로 개발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개발 방향이 전혀 틀리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기동력이 좋은 초능력자를 상대로는…… 글쎄?
하지만 마리아 소장은 아직 프로토타입이니 너무 비관적으로 보지 말라고 했다. TSTG의 의의는 최초로 여러 분야의 초능력 공학이 고도로 적용된 기술의 시연에 있다고 말이다.
“예산 내려주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걸요?”
그 사람들에겐 의의고 뭐고 일단 성과가 있어야 했다.
마리아 소장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런 연구가 결국엔 기술력과 노하우를 쌓는 기반이 된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모르는 게 아닐걸요?. 돈은 프렌차이즈 햄버거 겨우 하나 살까 말까 할 정도로 주는 주제에 한우 한정식 같은 걸 원하는 도둑놈 심보 때문이죠.”
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도둑놈이 많다는 소리는 부패해서 나라 곳간 빼먹는 놈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었다.
특히 사람 갈아 넣어서 고도 경제성장에 성공한 대한민국 같은 나라에선 예산을 줄이는 만큼 사람 갈아 넣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꼰대들이 적지 않았다.
분명 변변찮은 자본이 없었던 경제개발기에는 이것이 효과적인 방법이자 유일한 방법이었을지 모르지만 요즘처럼 첨단 지식 기반 산업이 세상을 주름잡는 지금도 유효할까?
그걸 모르는 꼰대들이 여전히 사회의 결정권을 쥐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투자 안 하고 사람 갈아 넣으면 어떻게든 되는 줄 아는, 세상 바뀐 줄 모르고 라떼는 다 그랬다는 도둑놈 심보의 소유자들.
그 결과는? 인재의 해외유출이었다.
당장 초능력 공학만 봐도 한국에서 마리아 소장 말고 딱히 유명한 사람이 또 있는가?
마리아 소장이 한국에 있는 이유는 그녀의 입장에선 여기나 저기나 마찬가지이기에 기왕이면 돈 있으면 살기 좋은 한국을 선택한 것뿐이다.
외국에서 조건 없이 모든 걸 지원해줄 테니 자신의 나라로 와달라는 제안이 수도 없이 왔지만 그녀는 조건 없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모든 금전적인 지원을 받아도 그 나라에 자리를 잡고 기반을 닦는다는 것 자체가 족쇄였다. 그리고 그 족쇄는 조건 없는 지원을 받을수록 더 강해질 뿐이었다.
자유롭게 연구하고 싶은 걸 연구하고픈 그녀에겐 이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한국은 괜찮냐고? 아직까진 괜찮았다. 한국 정부 관계자와 마리아 소장 사이에 알력은 있어도, 기본적으로 그녀가 갑인 게 현재의 상황이었으니까.
“아무튼, 딜레이 문제는 조만간에 해결될 것 같아요.”
“어떻게요?”
“그건 비밀.”
마리아 소장은 말을 아꼈고, 이철은 새로운 TSTG를 테스트하게 되었다.
“TSTG 버전 1.11이에요.”
“오! 그래요?”
외형은 일견 버전 1.1과 다른 게 없어 보였다.
“착용하고 각인해 보면 깜짝 놀랄걸요?”
“또 그래도 돼요? 이미 하나 각인했는데…….”
이철은 버전 1.11 옆에 놓인 버전 1.1을 보면서 우려를 표했다. 저거 무지 비싼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걱정하지 마세요. 코어 제작 측에서도 딜레이의 문제를 깨닫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 신경을 많이 썼으니까요. 그래서 나온 게 1.11 용의 새로운 코어죠.”
경완은 코어 기술을 독점하고 있다는 위버멘쉬를 떠올렸다. 왜 위버멘쉬가 이 연구에 이렇게 관심을 표하고 있을까?
코어 기술을 자신들이 쥐고 있기 때문에 TSTG가 개발되어도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인가? 아니면 코어 기술의 개발이 초능력의 권익 보호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시대를 선도하여 시장 지배적 영향력을 계속해서 유지하겠다는 전략인 건가?
경완이 잠시 그런 잡념에 빠져 있을 때 이철은 마리아 소장의 지시에 따라 버전 1.11을 입고 각인 절차를 시작했다.
각인 절차를 끝낸 후 마리아 소장은 이철을 천리안 기계가 연상되는 장비에 세워두고 컴퓨터를 만지작거렸다.
“이철 씨? 새로운 감각이 느껴질 테니까 집중해 봐요.”
“넵.”
마리아 소장의 말을 따라 눈을 반개하던 이철이 대답했다.
“뭔가 느껴져요.”
“안면 디스플레이를 꺼볼 테니 눈을 한 번 떠봐요.”
그녀의 지시에 따라 눈을 뜬 이철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림자와 윤곽선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이게 뭐죠?”
“시각 장애인이었다가 투시능력자로 각성한 사람의 초능력을 코어에 집어넣은 거예요. 코어가 원래 어떤 물건인 줄은 알죠?”
코어로 만든 시제품은 초능력 확장장비였다. 초능력자에게 다른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그것. 초능력 공학과 산업의 중심축이자, TSTG의 핵심부품이었다.
“대단하네요.”
이철의 감탄에 마리아 소장은 손뼉을 치며 주의를 환기했다.
“그럼 이제 못 했던 테스트를 진행해볼까요?”
그 말에 이철과 경완의 얼굴이 마주했다.
* * *
“큭!”
바닥에 메쳐진 이철의 입에서 억누른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리 TSTG의 투시능력으로 인해 시각 정보에 딜레이가 없어졌지만 경완을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고무적인 건 이제는 어떻게 당했는지는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차츰 적응하면서 대련에서 견디는 시간이 2초, 4초, 8초 빠르게 늘었다.
‘모르면 맞아야죠’라는 말이 있는 세상의 주민답게 어떻게 맞는지 알게 되니 대련의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그리고 대련 시간이 길어지자 TSTG의 진면목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철이 앞차기를 날리자 경완이 반보 옆으로 움직여 피해내면서 주먹을 날렸다. 경완이 입고 있는 프로토타입은 둔중한 외모만큼이나 중량이 나갔고, 그만큼 주먹이 무거웠기에 이철이 두 팔을 올려 막았음에도 두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야 했다.
“이야, 이거 대단한데?”
총알도 막아내는 물건이라서 그런지 충격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메치기를 쓴 거지.”
“아.”
경완의 대꾸에 이철은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메치는 기술이 상대의 운동-위치 에너지를 그대로 충격으로 바꾸는 기술이 아니던가?
마치 달걀이 든 상자를 바닥에 던지는 것과 같은 방식이라 아무리 단단한 갑옷을 입고 있더라도 충격을 막긴 힘들었다.
그래서 이철은 경완을 속으로 욕했다. 나쁜 시키. 안 아프게 대련을 끝낼 수도 있었으면서 꼭 그렇게 메쳐야만 했냐!
“그럼 계속하자.”
이 억울함을 해소하는 건 어떻게든 이쪽이 만만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것뿐.
각자의 고유능력이 아닌 TSTG의 능력을 활용하는 것이 대련 테스트의 주의사항이었기 때문에 이철은 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과연 TSTG는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갑갑한 갑옷을 입고 있었고, 또 관절의 가동범위도 제한되어 있었지만 익숙해지니 그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크로바틱한 움직임만 아니면 마치 안 입은 것처럼 행동하기에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마리아 소장은 그것이 TSTG용 전용 코어의 지원 덕분이라고 했다. TSTG를 입고도 안 입은 것처럼 염동력으로 출력을 만들어내는 것이 TSTG의 기본 기술이라고 말이다.
약 10분 정도의 대련 테스트가 끝난 이후 그녀는 경완과 이철을 인터뷰해서 운용자 관점에서 본 TSTG의 장단점을 확인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입었던 TSTG는 연구동으로 들어가 겉에 난 흔적을 면밀히 분석하고 데이터를 수집한 후 수리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육중한 TSTG가 몸 가벼운 사람처럼 움직였으니 그 충격량이 어느 정도였겠는가?
이철은 TSTG 겉에 잔뜩 난 상처를 보면서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이거 입고 사람 치면 안 되겠는데?”
“원래 사람을 때리면 안 되지. 격투기 선수들도 사람 치면 가중처벌 받잖아?”
“……그래 그랬지.”
이철은 경완의 입에서 저런 말이 튀어나오니 굉장히 기분이 어색했다. 이유는 모른다. 암튼 모름.
“자, 그럼 다음 일정에 대해서 이야기해 봐요.”
언제나 그렇듯 오늘도 마리아 여사께서는 오늘의 일정을 정산하고 다름 스케줄을 위해서 각자의 일정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