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250화
24-현지화
미연과 인사를 나눈 윤혜정이 경완에게 붙임성있게 말을 걸어왔다.
“형부. 요트 위에서 뵙고는 이렇게 안부 묻는 건 처음이죠?”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윤혜정은 그렇게 말문을 틔운 다음 그녀의 주변에 있던 이들을 경완에게 소개해 주었다.
한 사람은 어디 광고 회사의 팀장이고, 또 한 사람은 히어로 매니지먼트 인재교육팀장이라는 이들이었다. 다들 연예계와 관련이 있다면 있다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윤혜정으로부터 경완을 소개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들의 표정을 보며 경완 역시 미소를 지어주었다.
표정 관리 잘하는 친구들이군.
윤혜정은 미연 그리고 경완과 예전에 비스트 마스터 바스티앙의 슈퍼요트를 탔던 경험을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프랑스의 S급 초능력자의 생활상에 대해 흥미가 있었는지 근처에 있던 이들도 귀를 기울이며 무리에 끼어들었다. 감탄사와 추임새를 넣으며 질문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의 질문이 갑자기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그럼 그 비스트 마스터와 경완 씨가 싸우면 누가 이기나요?”
그 말에 미연과 윤혜정의 인상이 아주 잠깐 굳어지며 서로의 시선이 교차했다.
저 새끼 누구야? 몰라 아무튼 눈치 없는 놈이야, 라며 재빠르게 눈빛 대화가 이루어졌다.
미연은 대화하면서 민감한 주제가 나오지 않도록, 정확히는 경완이 화제의 초점이 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S급 초능력자인 비스트 마스터는 화제의 중심이 경완을 비껴가도록 하기에 충분한 재료였다.
원래는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겠지만 들어오면서 들은 누군가의 외침 때문에 본의 아니게 방어적이 된 심리 때문이랄까?
그리고 윤혜정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 그녀의 노력을 알아차리고 지원사격을 해주었으며 주변의 다른 손님들도 눈치를 채고 굳이 경완에 대한 이야기를 안 꺼내려고 했는데 이 눈치 없는 남자가 그러한 노력을 무색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경완은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눈치 없는 인간처럼 태연하게 대답했다.
“정면으로 붙으면 제가 이겨요.”
“오~ 역시.”
중국을 아작낸 사람다운 당당한 태도에 눈치 없는 남자가 감탄사를 흘렸다.
그때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대화에 끼어든 건 아니지만 언급된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기엔 충분했다.
“내가 말했잖아요. 위버멘쉬는 절대 정의로운 곳이 아니라고요. 저런 인간도 초대한 곳이 정말 세계평화를 추구하는 곳일까요?”
한 3미터 정도 떨어진 무리였다. 3명의 젊은이와 중년의 남녀 한 쌍의 시선이 경완과 마주했다.
그중 넷은 얼른 고개를 돌렸지만, 한 명만은 경완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적대감 어린 눈빛으로 경완의 무심한 시선을 맞받아쳤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경완이 그 청년을 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나 들으라고 한 얘기예요?”
“무슨 얘기요?”
청년이 대꾸했다. 겉으로는 시치미를 떼는 말이었지만 어조를 들어보면 ‘들렸냐? 그래서?’ 같은 느낌이었다.
옆에 있던 젊은 여성이 그만하라고 청년의 팔뚝을 잡았지만 청년이 경완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것도 그러한 행간을 읽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저런 인간 어쩌고저쩌고 한 거요.”
경완은 평이하게 물었지만 듣는 쪽에서는 평이한 목소리로 들리지 않은 모양인지 더욱 표정을 굳혔다.
청년도 경완을 노려보며 볼 뿐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경완은 더는 상대하기 귀찮아서 고개를 도로 돌렸다. 그리고는 방금 전까지 했던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다시 이어나갔다.
“하지만 비스트 마스터는 동물을 부리는 능력이 핵심이죠. 그러니까 정면으로 붙는다는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그렇다고 비스트 마스터가 만만한 사람이라는 건 전혀 아니에요. 프랑스 정부가 아무에게나 S등급을 매길 리 없잖아요.”
경완의 말에 이 주제를 먼저 꺼냈던 사내는 애써 어색해진 분위기를 무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다시 청년이 비아냥거리듯 자기 일행에게 말했다.
“들었죠. 온통 머릿속에 싸우고 사람 죽이는 것밖에 없는…….”
“좀 그만해!”
일행인 젊은 여성이 목소리를 죽이며 말렸지만 이미 경완의 귀에 다 들어온 상황이었다.
경완은 이번에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처음은 말실수로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쯤 되면 일부러 시비를 거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누가 시비를 건다?
일단 이유부터 파악하고 조질지 훈계할지 놔둘지를 결정하는 것이 합리적 인간의 행태가 아니겠는가?
경완은 스스로를 합리적 인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비 거는 청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미연이 그의 팔을 붙잡았기에 그러지 못했을 뿐.
경완은 미연의 말없이 부탁하는 표정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래서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다. 홀몸이었으면 그냥 독고다이하는 건데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참을 수밖에.
경완이 미연의 귀에 속삭였다.
“딴 데 갈까?”
여기 있어봤자 열불만 나고 언제 인내력 게이지가 다 소모될지 알 수 없었다.
미연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에도 안심이 서렸다.
경완은 입맛을 다시며 입을 다물었다. 저 새끼 얼굴 기억해 놨으니 나중에 개인적으로 몰래 아무도 모르게 만날 거란 말을 하기엔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그럼 언제 말할까? 아무래도 저 새끼랑 면담한 뒤에 얘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왜 그런 말도 있잖은가? 허락받기보다는 용서받는 게 더 쉽다고.
저 새끼도 초대받아서 온 놈일 테니 위버멘쉬 관계자에게 물어보면 금방 누군지 알 수 있을 거다. 아니면 미국이나 국정원에 물어봐야지. 설마 이런 파티에 누가 초대받았는지 파악하지 못할 곳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때 폭음이 일어났다.
쿠워어엉!
꺄아아악!
폭음과 곧장 이어진 비명소리, 그리고 미약하게나마 전달되는 충격파에 경완은 바로 초감각을 돌렸다. 동시에 미연과 윤혜정, 그리고 같이 이야기하던 이들을 검은 연기의 염동력으로 감싸고 창문을 깨부수고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그 모습이 마치 쏜살같았다.
근처 건물 옥상에 도착한 경완은 미연과 사람들에게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고 본인은 다시 호텔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솔직히 가고 싶진 않았지만 혹시나 미연의 지인이 호텔에 더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테러를 막거나 아니면 그 지인을 구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테러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한 번의 폭발이 끝인 모양이었다.
경완은 혹시나 몰라서 초감각을 돌리며 주변을 확인하다가 화가 나서 펄펄 뛰는 정호태를 발견하고는 그리로 향했다.
“도대체 보안을 어떻게 했기에 이 지랄이 난 거야!”
그는 씩씩거리면서도 얼른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경비를 재배치하고 귀빈들의 피난을 지시했다. 경찰과 구급차도 불렀다.
“정호태 지부장님.”
경완의 부름에 정호태를 이 급한 상황에 또 누가 무슨 일로 자신을 부르는지 짜증이 나서 돌아봤지만 경완의 얼굴을 보고서도 얼굴에 짜증을 두를 수는 없었다.
“아, 경완 씨.”
“어떻게 된 일인가요?”
“테러입니다. 자살폭탄테러요.”
“범인은요?”
“글쎄요.”
정호태는 쓰게 웃으며 상황을 설명했다.
자살폭탄테러가 일어난 곳은 정재계 인사들만 추려서 초대한 VIP전용 파티장이었다.
종업원으로 위장했던 범인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소리치며 폭발했고, 그 폭발에 여야 국회의원 30명과 재계 인사 4명, 그리고 3급 이상의 고위 공무원 10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백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렇다면 범인은 북한의 재건과 독립을 바라는 분리주의 테러파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자살폭탄테러치고는 폭발이 지나치게 강했다.
그래서 정호태가 글쎄요라고 말한 것이다. 붕괴한 북한의 재건과 독립을 꿈꾸는 분리주의자들에게 과연 이러한 큰 사건을 일으킬 역량이 있는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는 애써 웃으며 경완에게 말했다.
“경완 씨가 이리 있으니 안심이 됩니다.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다른 폭발물이 있는지 이미 확인했습니다. 폭발물은 더 없는 것 같아요.”
“그렇군요.”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이릅니다.”
경완의 말에 한숨을 내쉬려고 하던 정호태가 긴장하며 귀를 기울였다.
“폭탄이 아니라 폭발 능력일 수도 있잖아요?”
정호태의 논리가 맞다면 범인은 단순한 폭발물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초능력이 가미된 폭발을 일으킨 것이 된다.
그렇다면 경완의 초감각에 폭발물로 보이는 것이 걸리지 않는다고 해도 안심하기엔 이르다.
“그렇군요. 얼른 귀빈들을 피난시켜야겠습니다.”
정호태의 말에 경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움을 주기로 했다.
다행히 피난이 완료될 때까지 사건은 더 일어나지 않았다.
* * *
대한민국에 다시 한 번 난리가 났다. 그도 그럴 것이 국회의원이 30명이나 죽어버린, 대한민국 역사상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서울 참사 때도 이렇게 많이 죽진 않았다.
한국의 고위층만을 노린 테러. 당연히 한국 고위층은 격분했다.
어떻게 감히 자신들에게 이런 테러를 저지를 수가 있나?! 테러범이면 테러범답게 광장이나 쇼핑몰 같은 곳에서 무작위로 무고한 시민들 사이에서 터져야지 감히 VIP파티장에서 터져?!
한국 검경은 이를 악물고 인권침해 논란까지 빚어내면서까지 조선족, 북한 출신 관련자들을 이 잡듯이 뒤졌다.
조선족, 북한 출신의 한국에 대한 증오심은 위험 수준이었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라는 자살폭탄테러범의 한마디는 충분히 그들을 배후세력으로 지목할 의심을 품게 하였다.
조선족은 조국인 중국을 망하게 한 이경완, 그리고 그를 통제하지 못한 한국을 증오했다.
특히 세뇌에 가깝게 애국교육을 받은 젊은 조선족 청년들이 그러했고, 중국의 붕괴로 인한 경제난의 고통은 그러한 증오를 촉진하는 훌륭한 촉매였다.
그렇다면 북한 출신은 어떤가? 그들은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한 차별로 심각한 박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청에 재하청, 갈취나 다름없는 인력파견업체, 불법파견 등 사람 갈아 경제개발의 금자탑을 쌓아올린 대한민국의 전통(?)은 그대로 붕괴한 북한땅에 이식되었고, 이러한 노동조건을 극복하기엔 북한에 축적된 자본은 남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경쟁이 안 되니 결국 북한 주민들은 죄다 노동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고, 남들처럼, 특히 남조선 동무들처럼 사람답게(?) 살려면 빙두(마약)라도 팔아서 돈을 벌어야 했다.
먼저 돈을 쌓은 누군가가 사다리를 걷어찼으니 마약이라도 팔아서 자본주의의 계단을 기어 올라가겠다는 것이다.
국정원이 경완의 손을 빌면서까지 마약조직을 조져도 북한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오는 마약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오히려 커다란 마약조직이 사라진 공백지에 작은 마약조직이 점조직처럼 자리 잡아 마약 수요를 충족시켰다.
수요와 공급을 한 번에 조져도 잡을까 말까 하는 게 마약인데 수십 번 마약을 투약하고 판매한 마약쟁이를 초범이랍시고 판사가 집행유예 때리는 한국의 법체계를 보면 애당초 한국 정부에는 북한에 마약이 퍼지는 걸 막을 역량이 없었다.
당연히 마약과 관련된 살인, 강도, 절도 등의 강력 범죄가 잇달았다.
치안이 개판 났다는 소리다. 남한처럼 전적으로 높은 시민의식에 기댄 치안을 체제가 붕괴한 북한에서 기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들은 무법천지나 마찬가지였던 가혹한 독재 정권 치하에서 살아남은 맹수들인 것이다.
이렇다 보니 북한 주민들 사이에선 ‘차라리 백두혈통 치하에 있을 때가 나았다’는 말까지 돌았다. 북한 분리주의자들의 탄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