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253화
25-헤게모니
침묵하는 소속 히어로를 보고 우진 히어로즈의 사장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그래. 히어로가 그런 일까지 해야 하는지 의문스럽기는 하겠지. 하지만 히어로도 사람이야. 먹고 살아야 히어로 활동도 할 수 있다고!”
“…….”
“너 범죄로 연명하는 다크 히어로 따위라도 되고 싶은 거니? 혹시 공권력과 히어로에게 쫓기면서도 범죄자를 잡을 여유가 있을 거라는 나이브한 생각을 한다면 버리길 바란다.”
우진 히어로즈의 중년 사장은 자신의 말을 듣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천기호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말을 하는 내 입이 아프다라는 표정처럼 보이는 게 이런 훈계가 한두 번이 아닌 모양이었다.
사장이 먼저 떠나고 남은 공터에서 천기호는 한숨을 내쉬며 내뱉었다.
“하~아. 씨발.”
많은 의미가 담긴 씨발이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불만인가, 아니면 그런 현실을 이겨내지 못하는 본인의 한계에 대한 불안인가? 어쩌면 그 둘 다일 수도 있었다.
경완은 초감각으로 주변에 인적이 없는 걸 확인하고 천기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어~”
“당신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경완의 모습에 천기호는 깜짝 놀라며 긴장했다.
“당신이 여기엔 왜 있죠?”
“댁 보러 왔죠.”
“……왜요?”
“왤까~요. 알아맞혀 봐요.”
경완의 말에 천기호는 황당하다 못해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고, 경완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해맑게 웃으며 주먹을 들고 말했다.
“정답은…… 패주려고요.”
딱한 건 잘 모르겠고, 아무튼 때리러 왔으니 일단 때리고 보자.
그런 경완의 말에 천기호는 더욱 황당하고 어이없어하면서 반문했다.
“내가 뭘 했다고요?!”
그 물음에 경완은 잠시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한 후 대답해 주었다.
“이 말 알죠? 누군가 너를 이유 없이 싫어하면 확실히 싫어할 이유를 만들어주라는 말이요.”
“아니! 내가 뭐했다고!”
천기호가 억울해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안대에 눈구멍만 뚫은 것 같은 마스크는 그가 흥분으로 얼굴을 붉히는 걸 전혀 가려주지 못했다.
이제는 경완이 어이가 없었다.
“뇌가 붕어예요? 파티장 때 내 여자친구가 있는 곳에서 시비 걸었잖아요?”
천기호와 둘만 있는 상황이었다면 그 정도 시비 정도야 허허 웃고 넘어…… 갈 리는 없었나?
그래도 미연이 있는 곳에서 그런 시비를 당한 게 더 불쾌하다는 건 사실이었다. 본인은 아무렇지 않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기스라도 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드니 더 패주고 싶었다. 경완 혼자서만 시비를 당했으면 훈계의 의미로만 패줬겠지만, 아무래도 지금 때리는 건 분풀이의 의미가 더 강하지 않을까?
그 말에 천기호는 변명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 모습에 경완은 좀 살살 때려주기로 했다. 적어도 안면몰수하고 내가 뭘 어쨌느냐며 뻔뻔하게 고개 치켜드는 인간들보다는 나아 보였으니까.
그런데 눈알을 굴리는 게 딴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보아하니 상황이 불리하니 튀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아쉽지만 경완이 그에 대해 대비도 하지도 않고 모습을 드러냈을까?
“악!”
가속능력으로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천기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돌연 푹신한 저항감이 느껴지더니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검은 연기에 휘감기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밤이라서 검은 연기의 염동력이 이미 주변을 감싼 것을 알지 못했다.
어디 그뿐이랴? 검은 안개의 벽은 마치 그물처럼 그 몸에 얽히고 달라붙어서 움직임을 제약했다. 힘을 써보지만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끊어내고 떼어내도 검은 연기는 마치 아메바처럼 그의 몸에 들러붙었다.
“아이고, 우리 천기호 어린이, 도망가려고 했어요?”
뚝뚝 손가락 관절을 풀면서 다가오는 경완의 모습에 천기호는 악을 질렀다.
“역시 악당! 할 줄 아는 건 그저 폭력뿐이지!”
경완은 그의 악바리 근성에 혀를 찼다. 젊긴 젊구나. 저런 근성이 지금 상황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걸 모르나?
진짜 근성은 저렇게 상대를 욕하고 도발하면서 악을 쓰는 게 아니라 자신과 현재 상황을 냉정히 파악하고 어떻게든 돌파구를 만들려고 집중하는 것이었다. 도발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포석이라면 몰라도 전혀 그렇게 보이질 않았다.
퍽!
“쿠엑!”
경완의 깔끔한 리버블로우에 천기호의 허리가 숙여졌다. 검은 연기가 그의 머리를 잡고 끌어올렸다.
“만화의 근원은 입이란다, 애송아.”
퍽!
“켁!”
경완은 복부의 충격에 다시 허리를 숙이는 천기호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말을 이었다.
“나니까 이렇게 주먹으로 끝낼 생각을 하는 거지, 높으신 분들은 주먹으로 안 해요. 더 치사하게 굴지. 그분들은 밥줄을 끊거든요.”
“조, 조까.”
신음을 억누르며 대꾸하는 천기호의 모습에 경완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히어로라면 이 정도 깡은 있어야지.
경완은 앞날이 창창한 청년을 위해 가혹한 현실을 일깨워주기로 했다.
“설마 내가 그런 치사한 방법을 쓸 능력이 안돼서 이러는 것 같아? 내가 지금 청와대나 경찰청장한테 달려가서 멱살 붙잡고 우진 히어로즈와 그 소속 히어로인 더 플래쉬에게 불이익을 주라고 하면 그 사람들이 과연 투철한 정의감을 품고 거부할까? 솔직히 멱살을 붙잡을 필요도 없어. 내가 그 사람들한테 너랑 나 둘 중 하나만 택하라고 꼬장 피우면 그 사람들이 누굴 택할 것 같냐?”
“……세상이 그렇게 네 생각처럼 다 썩은 건 아니야!”
“흐흐. 젊구만. 젊어. 너 국익이라는 단어가 뭔지는 아니?”
제국주의 시절, 열강들이 국익이란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비인간적인 짓을 자행했는지를 보면 국익은 전혀 정의로운 개념이 아니었다. 그때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 놓은 온갖 혐성질이 수많은 나라에 여태 흉터와 아픔을 남기지 않았던가?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국익이라는 개념은 국가의 이름으로 악행을 정당화하는 마법의 단어였다.
제국주의 시절이 종료되고 요즘에는 좀 나아졌나 싶지만 솔직히 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저 그 시절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짓들이 별로 효율적이지 못하거나 심지어 오히려 손해가 된다는 걸 깨달았을 뿐.
그때의 열강이 지금에 와선 좀 더 교묘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국익을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핵심은 이거다. 국제 사회는 결국 약육강식이라는 것.
어떤 정의와 대의도 이런 현실을 부정하고 나아갈 순 없었다.
“조까!”
천기호의 외침에 경완은 왠지 모르게 순간 감상에 젖었다.
그도 한때 저렇게 살았던 때가 있었다. 젊은 혈기가 치솟던 시절의 낭만이라고 하면 낭만이고, 미숙했던 시절의 부끄러움이라 생각하면 나름 흑역사였다.
“맞으면 알게 되겠지. 세상이 생각만큼 그리 정의롭지 않다는 걸. 저항할 수 있으면 저항해 봐. 그것도 나름 단련이 될 테니까.”
그렇게 경완의 주먹질이 시작되었다.
히어로 고스튬은 방탄 기능이 있지만 경완의 주먹질은 성질이 달랐다. 주먹에 둘러진 염동력이 단단한 방탄, 방검 플레이트를 침투해 그 너머에 있는 육체에 타격을 전달했다.
퍽! 퍽!
“큭! 윽!”
“배에 힘줘. 내장 다친다.”
퍽! 퍽!
“윽! 악!”
“몸을 비틀어서 타격점을 비껴내는 요령 정도는 배워놨어야지.”
퍽! 퍽!
“이야아악!”
“소리가 나가지 못하게 주변을 감싸놨습니다, 천기호 어린이.”
주먹질은 맞는 사람도 힘들지만 때리는 사람도 힘든 짓이다.
경완은 속에서 열기가 올라오고 땀으로 이마가 번들거리자 주먹질을 멈췄다. 이 정도면 충분히 분이 풀린 것 같았다.
천기호는 맞느라 지쳐서 경완이 놓아주자마자 바닥에 쓰러졌다.
“이제 앞으로는 때와 장소를 가려가면서 입을 여는 현명한 인간이 되길 바란다.”
“씨발…… 지랄.”
“아직 정신 덜 차린 것 같은데, 내가 너 정신 차리라고 온 건 아니라서 여기까지 할게.”
경완은 뒤끝을 풀러 왔지 교육하러 온 게 아니었다. 앞날이 창창한 청년을 위한 립서비스는 때리기 전에 충분히 해줬다.
“자 그럼 안녕~ 혹시 다음에 또 만날 일이 있으면 그때는 입조심하기 바라. 아참! 가기 전에 혹시나 하고 물어보자. 너 혹시 위버멘쉬 파티장의 자살폭탄테러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있냐?”
경완의 말에 천기호는 ‘이게 뭔 개소리야?’라는 표정을 지었다.
음,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관련이 없구만.
볼일 다 마친 경완은 그대로 웜홀을 열고 집으로 돌아왔다.
화장실에서 간단히 세수하고 손발을 씻고 나오니 미연이 물었다.
“그래, 볼일이라는 게 뭐였어?”
“음. 앞날이 창창한 인재를 위한 맞춤형 교육?”
당사자의 입장에선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런 말도 있잖은가? 시련은 인간을 강하게 만든다고.
“그게 정호태 지부장이 부탁한 일이었어?”
“어……. 따지고 보면 그렇지?”
교육을 부탁한 것은 아니고 용의자인지 확인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긴 했으니까.
하지만 미연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그래? 어떻게?”
뭐가 그리 궁금한지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그녀에게 경완은 말을 지어내느라 진땀을 뺐다. 그러나 나중에 그녀는 그와 대화하는 걸 원했을 뿐 정말 궁금해하진 않았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허탈감과 안도감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 * *
25-헤게모니
[그렇군요. 관련이 없었군요.]
정호태의 목소리엔 아쉬움이 담겼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천기호는 테러범과 관련이 없었다. 설사 그가 위버멘쉬에 호의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그 친구는 왜 위버멘쉬를 안 좋아합니까?”
[글쎄요. 아무래도 개인적인 문제 아니겠습니까?]
경완의 질문에 정호태는 그렇게 일축했다. 솔직히 위버멘쉬의 정보력을 생각하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일이겠지만, 정호태는 루키의 뒷조사에 그런 은밀한 자원을 투입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경완에겐 이상하게 느껴졌다. 딱히 대단할 것도 없는 새파란 청년 히어로에게 온갖 VIP를 초대하는 자선파티의 초대장을 보냈다. 그런데 왜 관심이 없어 보이지?
경완이 이를 지적하자 정호태는 작게 탄식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들에게 보낸 초대장은 총수님의 지시사항이었습니다.]
“총수님이요? 왜요?”
[어……. 젊은 인재들에게 다른 세상을 경험케 해주고 싶다고 하셨죠.]
확실히 사회 초년생들에겐 위버멘쉬의 연말 자선파티는 새로운 세상, 한 단계 위에 있는 세상을 보여주기엔 적절한 곳이기는 했다. 생존경쟁에서 이기고 사회에 일정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들이 즐비한 공간은 그 자체로 식견을 키울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그래서 경완은 또 한가지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생겼다. 왜 굳이 그런 경험을 시켜주지? 어차피 험한 세상에 내던져지면 부딪히고 깨지면서 알아서 자연히 깨닫게 될 텐데 그 중요한 행사에 남에게 시비를 거는 젊은이나 초대한단 말인가?
물론 젊은이들이 시행착오 없이 세상의 이치를 깨닫길 바라는 어른의 마음일 수도 있지만, 젊음의 특징은 패기 아닌가?
그리고 패기는 때때로 오만과 구분이 힘들었다.
예를 들자면, 저건 된장이 아니고 똥이니 먹지 말라고 해도 정말 똥이 맞나 싶어서 찍어 먹어봤다가 아! 내가 찍어 먹은 게 진짜 똥이구나! 하면서 후회를 통해 배우고, 똥이 아니면 ‘똥 아닌데 왜 그랬대? 꼰대가 제대로 아는 게 있기나 한가?’라는 반응을 하는 게 대다수 젊은이의 특징인 것이다.
“왜요?”
[그거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묻지도 않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