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255화
25-헤게모니
사실 그와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전임 안보실장은 초능력 자원부 같은 알짜부서로 영전해 들어갔는데 본인은 이번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면 대통령의 신임을 잃게 될 테니까.
아마 대통령은 국회의원을 테러해 죽인 극악무도한 범인을 잡고 지지율을 끌어올릴 단꿈에 빠져 있을 텐데 그 앞에서 실패했습니다, 일이 잘 안 풀립니다, 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안보실장은 정규직이 아니었다.
“그럼 다음 심문 계속할까요?”
경완이 말했다. 솔직히 국정원 등의 수사기관이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는 게 꽤 웃기기도 했고, 신문(訊問)할 때마다 출장비가 쏠쏠하게 나오니 딱히 안 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정준혁 안보실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렇게 대답하는 그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경완은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미소를 지으며 툭 내뱉었다.
“언론에 안 알려서 다행이죠?”
“……그렇습니다. 그러니 부디 경완 씨도,”
“네, 네 입 다물고 있죠.”
다행히 청와대에선 독심술사 이경완이 용의자들을 심문한다, 곧 범인이 밝혀질 거다, 이런 식으로 설레발을 치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 분리주의자들과 테러 사이를 연결하는 증거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테러범이 폭발하기 전에 외친 한 마디 때문에 생긴 의심뿐.
거기다 이경완이 누구인가? 그야말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국회에 난입해 국회의원을 병신으로 만든 테러범 1호이지 않은가?
아무리 그의 신문능력이 좋다고 해도 국회의원 테러범을 국회의원 자살폭탄 테러범을 색출하는 데 쓴다? 이거 여론이 부담되어서 알릴 수가 있나?
그렇게 달달하게 돈을 빨고 돌아온 지 며칠 후 경완의 허벅지에 머리를 얹고 소파에 누워서 쉬고 있던 미연이 이런저런 말을 하다가 경완이 최근에 한 일, 용의자 심문하러 간 것에 대해 물었다.
“그래서 범인은 찾았어?”
“나는 못 찾았어.”
경완이 굳이 ‘나는’이란 단서를 단 건 막 돌린 뉴스 채널에서 테러교사범과 증인을 확인했다는 뉴스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연도 그 화면을 보고는 작게 감탄했다.
“한국 수사기관이 제법 수사를 잘하나 본데?”
“당연하지. 나 한 사람하고 그 많은 사람들하고 어떻게 비교해?”
경완은 뉴스 화면에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뉴스에 나온 범인이라는 사람은 다름 아닌 경완이 혐의없음을 확인한 북한 분리주의 운동가였다.
흐응~ 그렇단 말이지?
“오빠, 표정이 왜 그래?”
“응? 내 표정이 어땠는데?”
“방금 엄청 음흉한 표정을 지었거든.”
“아, 그래?”
경완은 미연의 말에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 것 같았다.
모사꾼들이 꾸민 음모를 알아차리고 그것이 무척이나 가소롭다고 생각할 때의 표정이 나온 모양이었다. 그야 그럴 것이 그런 음모를 맛깔나게 해체해서 음모의 당사자들을 엿 먹이는 즐거움이 얼마나 각별한지 잘 아니까.
마치 후덥지근한 햇살 아래에서 땀을 쫙 흘리고 사이다 한 병을 쭉 들이켜는 시원함이랄까?
이 상황에서 음모자는 아마도 한국 사법기관일 것이고 그 음모의 내용은 딱히 증거도 없으면서 저들을 테러 교사범으로 만든 것이겠지.
군부독재 시절이나 쌍팔년도도 아니고 현대에 어떻게 그런 식으로 범죄자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지만, 한국 법조인들이 법조문을 얼마나 자의적으로 해석하는지 판례를 보면 아마 깜짝 놀라지 않을까?
800원 횡령 버스기사는 해고, 85만 원 향응 검사는 면직 부당.
오늘날에도 여전한 유전무죄 무전유죄만 봐도 권력층이 죄인을 만들고자 하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방증이었다.
다만 쌍팔년도에는 고문 등의 잔악한 방식으로 자백을 받아냈다면, 요즘에는 치졸하고 더러운 방법으로 죄인을 만들어낸다는 게 다를까?
수백 번 기소하고, 친인척들은 물론 몸을 담은 직장도 압수수색하는 등의 악질적인 괴롭힘으로 자백을 강요하면서, 이 모든 것을 합법이라는 미명하에 정당화할 수 있는 게 사법 권력이었다.
그 칼날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하는 서민들에게 향한다면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물론 사건이 사건이다 보니 정부의 입장은 이해가 갔다. 사건을 어떻게든 봉합하지 않으면 정부의 무능이 드러나고 여론이 악화되는 등 문제가 생기겠지.
그렇다면, 어차피 범인을 만들어야 한다면, 감히 북한을 분리하겠다는 괘씸한 놈들을 함께 처리하는 게 어떨까? 나중에 무죄로 밝혀져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때쯤이 되었을 땐 냄비 같은 여론은 가라앉은 상태일 테니까.
어차피 대한민국을 다시 분단시키겠다는 이적단체였다. 옹호하는 사람도 적다.
이게 바로 데미지 컨트롤이 아니겠는가?
경완은 생각을 정리하다가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히야~ 역시 윗대가리들은 이런 쪽으로는 기가 막히게 머리가 잘 돌아간단 말이야.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고, 자기 호신이 잘 되는 사람이 높은 자리까지 미끄러지지 않고 잘 올라가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범인이 지목되고 재판에 들어갔는데, 분위기를 보아서 이번 테러사건은 여기서 마무리될 조짐이 보였다. 재판 과정에 이변이 없는 한 유죄가 선고되지 않을까?
경완의 예상대로 빠르게 재판이 잡혔고 사형 선고까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대중의 반응은 당연한 일이 당연하게 벌어졌다는 식이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대중의 특징 중 하나가 게으름이 아닌가? 그래서 언론이 내뱉는 말이 진짜인지 의심하기보다는 일단 ‘그런가?’라고 받아들이는 게 대중의 현실이고, 그것이 언론권력이 강력한 이유였다.
딱히 대중의 잘못이라기엔 인간 자체가 그렇게 태어났다. 의심하고 진실을 찾는 과정이 얼마나 에너지 소모가 큰가?
뿐만 아니라 감히 분단의 아픔을 가진 민족에게 다시 한 번 분단을 일으키려는 반역자들이었으니 설사 언론과 정부를 의심하고 그들의 발표를 반박하고 싶은 이들이 있어도 혹시나 ‘너도 북한 분리주의자?’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쉽게 나서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오직 경완을 비롯한 소수만이 그들이 무죄라는 사실을 알 뿐.
그리고 그 소수의 사람 중 정의와 진실을 위해 나설 사람은 없었다. 그 소수의 사람이 이 테러범 만들기의 원청인 건 차치하고서라도, 경완조차 그들을 위해서 나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백두혈통이 지배하는 전근대적 독재왕조국가에 대해 체질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그가 다시 북한을 건설하자는 북한 분리주의 운동가들에게 어떻게 공감하랴?
남조선 동무들의 자본 침략을 막고 북조선만의 자본주의 지상락원을 건설하자니?
남조선, 북조선 할 것 없이 천민자본주의의 압제 아래 신음하는 동포들을 보호하자는 식이었다면 혹시 몰라. 지들끼리만 잘 먹고 잘 살아보자는 인물들을 소위 남조선 동무인 이경완이 옹호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가 보기엔 결국엔 저들도 결국 자기 밥그릇을 확보하고자 모인 이익집단에 불과했다.
그보다는 아직 끝나지 않은 한국 헤게모니 전쟁이 경완의 관심을 더 끌었다.
일단 테러 사건은 봉합되었다. 범인도 발표되어 처리했고 여론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진범은 잡히지 않았고, 기득권층은 결코 병신이 아니었다.
[하하하. 이거 쉽지 않네요.]
요하네스가 먼저 연락해 왔다. 평소에 연락하는 건 경완과의 관계나 친분을 목적으로 한 일상적 전화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번에는 하소연이 목적인 듯 최근 생긴 문제에 대해서 토로했다.
[일본이 눈치챘나 봅니다.]
“그렇겠죠.”
경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범인은 없다. 그런데 누군가 그 일로 이득을 봤다. 그렇다면 진짜 범인은?
범죄라는 건 묻지 마 살인, 우발적 범행 같은 것이 아닌 한 반드시 목적이 있고, 목적은 반드시 이득을 수반한다.
인간만사(人間萬事)의 대부분이 결국을 이득을 취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이는 범죄도 마찬가지이니, 범인을 찾지 못하면 이득 본 자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수사하는 건 경험적으로 검증된 수사기술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자선파티 테러로 위버멘쉬 코리아는 이미지에는 타격을 입었을지는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이득을 보았다. 위버멘쉬가 한국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들을 모두 깔끔하게 치워버린 것이다.
문제는 그 걸림돌이라는 게 다른 세력이 박아 넣은 빨대라는 점이었다.
그 세력은 다름 아닌 일본.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위버멘쉬의 자작극이라는 증거가 없다고 해도 사실 권력층에게 증거란 필요치 않았다. 심증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
설사 위버멘쉬가 진짜 범인이 아니고, 진짜 운 좋게 이득을 얻은 것뿐이라고 하더라도, 누가 자기 빨대가 빠진 자리에 남이 얌체같이 빨대를 꽂아넣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까?
권력자에겐 그런 행위 자체가 자신에 대한 모욕이자 도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괘씸해서라도 용서할 수 없었다.
그, 왜 세상에서 가장 좆같은 죄가 바로 괘씸죄 아니겠는가?
[일본이 태평양 사업에 훼방을 놓으려는 정황이 포착되었어요.]
“태평양 사업이라면…….”
[바스티앙 씨가 진행 중인 사업이요.]
“아, 바다 목장인가 하는 거요?”
[네.]
대양국제활용기구(Global Organization for Useable Oceans), 줄여서 GOUO라고 불리는 기구는 공해(公海)의 사유화를 미끼로 회원국을 모집하고 막대한 투자를 받으며 대양 목장 생태계 조성을 위해 차근차근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갑자기 재무회계에 대한 감사를 요구하는 등 딴죽을 걸고 있다나?
더불어 따로 일본 포경업체가 발표한 내용은 분명 대양국제활용기구, 정확히는 위버멘쉬 소속인 비스트 마스터 바스티앙을 찌르고 있었다.
[여기서 포경을 더 확대하겠다는군요.]
“이야~ 그거 제대론데요?”
대양국제활용기구의 원동력은 바스티앙의 초능력을 매개로 길들여진 고래들이었다.
그들과 첨단 초능력 공학을 동원해 해양 생태계를 관리하고 바다 목장을 운영하는 것이 대양국제활용기구의 큰 그림인데, 일본의 포경 확대는 대양국제활용기구의 근본을 흔들겠다는 거나 다름없었다.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인데 대양국제활용기구는 탈퇴 안 한대요?”
[음습한 자들이지 않습니까?]
대놓고 재를 뿌리기엔 미국 등의 국제사회의 눈치가 보이니까 탈퇴하지는 않고 내부에서 총질하겠다는 의도가 뻔히 보인다는 게 요하네스의 판단이었다.
경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역시 이지메의 나라다운 발상이랄까?
“그런데 미국은 가만히 있어요?”
그가 알기로는 미국도 대양국제활용기구에 적잖이 투자한 것으로 아는데 일본이 초치는 걸 그냥 두고 볼 리가 있나?
[미국도 내부적으론 다양한 의견이 있으니까요.]
해양자원에 대한 다양한 이해관계, 일본의 로비, 위버멘쉬에 대한 경계 등 다양한 이유로 미국은 일단 이번 일을 지켜보기로 한 모양이란다.
경완이 물었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글쎄요? 그건 제가 아니라 비스트 마스터가 판단할 일이라서요.]
“그 사람은 자기 고래가 한 마리라도 죽으면 가만히 안 있을 것 같은데요.”
[그건 어쩔 수 없죠.]
초탈한 듯한 대답에 경완은 요하네스가 과연 위버멘쉬의 일본진출 포기도 각오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태평양에서 일본의 포경선이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