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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전생 더 빌런-257화 (257/367)

무한전생-더 빌런 257화

25-헤게모니

스파크처럼 튀었다가 사라지는 상념의 파도 속에서 마음의 움직임을 관조하고 되새김질하는 건 무한한 삶을 반복하면서 어떻게든 버티려는 그의 자기방어 기재였다.

내 마음이 이래서 이렇게 되었구나라며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제정신을 유지하는 데 막대한 도움이 되니까.

그러한 습관이 지금 자신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어떤 상황인지 이해하게 도와주었다.

아마 미연이 없었다면 경완이 이렇게 바스티앙을 도와줄 마음이 생겼을까? 지금보다 더 까칠하게 세상을 대하지 않았을까? 아니, 그 전에 바스티앙과의 인연이 생길 일 자체가 없지 않았을까?

경완은 인연의 실타래에 자신의 감정이 얽히는 것을 느꼈다.

[잠시 고래를 피신시키는 건 안 되나요?]

어떻게든 자신이 나서지 않는 방향을 모색하는 건 그에 대한 작은 저항이었지만 현실이 그리 만만하진 않았다.

[그랬다간 살인고래를 잡겠다는 핑계를 대고 태평양 전역을 돌아다니며 고래들을 죽여댈 겁니다.]

하긴…….

바스티앙의 분석에 경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겼고 전화기 저편에서 바스티앙은 침묵을 지키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결정을 내린 경완이 입을 열었다.

[고래만 죽이지 못하게 하면 되는 거죠?]

때론 피할 수 없는 충돌이 있다.

도와주겠다는 의미를 내포한 말에 바스티앙은 밝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Yes!”

* * *

경완의 평소 패션은 무늬 없는 반바지와 반소매, 그리고 슬리퍼였다.

하지만 짠물이 가득한 곳으로 가는데도 그렇게 갈 수는 없어서 청바지와 헐렁한 긴소매 티셔츠에 큰맘 먹고 운동화까지 신었다.

그는 볼일이 있어서 나가니까 먼저 저녁 챙겨 먹으라고 미연에게 문자를 남긴 후에 태평양으로 날아갔다. 무슨 볼일이냐고 문자가 날아왔지만 읽씹하고 움직였다. 나중에 등짝을 좀 맞겠지만 염동력으로 커버하고 맞으면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물론 아프다고 엄살은 잔뜩 피워야겠지만 말이다.

GPS 위치 장치에 의지해 바스티앙이 알려준 태평양의 한 좌표로 날아가던 경완은 도착할 때쯤 거대한 부유섬이 바다 위에 떠있는 걸 볼 수 있었다.

특수 플라스틱 코팅을 한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을 바다에 띄워 건설한 대양국제활용기구의 태평양 양식 연구단지.

건물의 높이는 기껏해야 2층에서 3층 높이 정도였지만, 면적은 웬만한 축구장 넓이였고, 연구를 위한 가두리 시설이나 해조류 양식장, 물자수송을 위한 접안시설까지 포함하면 면적은 축구장 2개 정도는 충분히 되었다.

항공모함도 아니고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거대한 구조물이 태평양 한가운데 둥둥 떠다니다니…….

[이렇게 빨리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바스티앙이 경완을 반갑게 맞이했다.

경완은 그 혼자뿐이라는 게 이상해서 물었다.

[이 넓은 시설을 바스티앙 씨 혼자 쓰는 건가요?]

[다른 사람은 안전을 위해 모두 대피시켰습니다.]

경완은 그 말에 살짝 의문을 품었다. 일본 사냥팀이 고래를 죽이러 왔지 시설과 사람에 피해를 끼치러 오진 않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바스티앙의 눈빛을 보고는 이해가 되었다. 바스티앙은 시설에 피해가 가더라도 강화 고래를 보호할 생각이었다.

일본의 고래 사냥팀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좀 있기 때문에 그동안 바스티앙은 경완에게 제1 양식 연구단지를 구경시켜 주었다.

연구단지의 모양은 특이했다. 삼각뿔을 뒤집어 놓은 듯한 콘크리트 구조물 여러 개를 바다 위에 띄워놓고, 탄소섬유 폴리머 와이어로 만든 고장력 밧줄로 연결해 기반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기반 위에 컨테이너 건물을 여럿 배치하고 그 위에는 다시 태양광 발전판, 풍력 발전기 등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배치했다.

[저게 풍력발전기라고요?]

경완은 일정 간격으로 연구단지 전체에 세워진 하얀 기둥을 가리키며 물었다. 풍력발전기라고 하는데 회전하는 바람개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두툼한 안테나를 왜 저렇게 쓸데없이 많이 세워놨냐고 의아해할 수밖에 없는 비주얼이었다.

바스티앙이 설명하실, 바람이 불면 기둥에 부딪혀서 볼텍스, 와류가 발생하고 그 와류가 만들어내는 기압차로 인해 기둥이 흔들리게 되는데 그 힘으로 발전하는 원리라나?

[요즘 기술이 참 많이 발전했죠?]

아무튼, 바스티앙의 안내는 계속되었다. 미역 양식장도 보고, 플랑크톤 양식장도 보고, 치어 양식장도 보고.

뭐랄까 최첨단과 구식 기술의 경계선에 있는 느낌이랄까? 모든 게 최첨단은 아니었다.

[어때요?]

하지만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감상을 묻는 바스티앙에게 기대만큼은 아니라고 대답할 정도로 경완은 눈치가 없지 않았다.

[괜찮네요.]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런 분야에 문외한이다, 너무 문외한이라서 뭐라고 평할 능력이 없다며 자기 세뇌를 하면서 말이다.

덕분에 바스티앙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도 모든 이들이 자신이 추진하는 일에 감탄하고 공감하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가 경완에게 거주 구역의 편의시설을 안내하려고 할 때 저 멀리서 고래 분기가 치솟았다. 그리고 바스티앙의 표정이 굳어졌다.

[오고 있답니다.]

일본의 고래 사냥팀이 오고 있다는 말이겠지?

[어딘데요?]

[여기서 동북쪽입니다. 한 시간 후에 도착합니다.]

고래는 아주 먼거리에서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대왕고래 같은 경우는 800km 떨어진 고래와도 의사소통이 가능할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니, 대왕고래가 아니라도 고래로 경계망을 세우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배들이 만들어내는 소음도 멀리서 들을 수 있는 고래였으니 말이다.

목표의 등장에 경완은 선제타격을 제안했고 바스티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이미 적대적이었고, 만일의 상황을 대비한 초능력자들까지 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노파심에 당부했다.

[되도록 사람은 상하지 않게 해주세요.]

[그야 당연하죠.]

일본이 이 짓을 벌일 수 있는 이유가 살인고래를 잡는다라는 명분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사냥팀을 막는다고 사람을 상하게 하면 그걸 또 얼마든지 명분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래서 바스티앙이 다른 사람도 아니라 경완에게 이 일을 부탁한 것이다. 그가 여태 보여준 능력이라면 인명 피해 없이 저들의 의도를 막아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럼 갑시다.]

바스티앙은 혹등고래의 등을 타고 경완을 일본의 고래 사냥팀이 오는 방향으로 안내했다.

경완은 공중을 날아 고래의 등을 타고 가는 바스티앙의 뒤를 쫓다가 저 지평선 너머로 보이는 배를 발견했다. 7척인 게 분명 일본 고래 사냥팀이 맞았다.

경완은 바스티앙의 옆으로 내려가 말했다.

[맞네요. 그럼 시작할게요.]

[몸조심하세요.]

바스티앙은 그대로 자신이 탄 고래를 뒤로 물렸고 경완은 포경선단을 향해 날아갔다.

어느 정도 접근하자 경완은 S입자의 펄스가 몸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S입자를 직접 다룰 수 있는 고위 에스퍼나 쓸 수 있는 S입자 펄스 레이더였다.

바스티앙이 강화한 고래 중엔 음파 탐지기도 회피할 수 있는 개체가 있다는 정보 때문에 섭외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걸리라는 고래는 안 걸리고 공중을 날아오는 인간을 포착했다? 경완의 초감각에 초능력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갑자기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감지되었다.

그들 중에 벽을 넘은 초능력자도 있는지 경완의 뿌리는 초감각용 S입자에 반응해서 급히 뭔가를 챙겨 입었다.

모양을 보아하니 마리아가 개발하고 있던 종합초능력전술장비와 거의 동일해 보이는 물건이었다.

기술이 유출되었나? 에이 설마. 현시대에 나라 팔아먹는 인간이 있을 리가.. 있네. 신친일파라는 존재가 있으니 국가 중요기술을 팔아먹는 놈이 없다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현실은 상상을 초월했으니까.

“Freeze!”

제트팩이 붙어있는 TSTG를 입고 날아오른 일본의 초능력자가 경완을 보며 일본인답지 않은 능숙한 발음으로 경고했지만, 경완의 반응이 한 박자 빨랐다.

경완이 별안간 배를 향해 급강하하자 일본의 초능력자가 아차! 하고 따라왔지만 경완은 이미 작살총에 접근했고, 절단능력으로 작살총을 배에서 깨끗하게 도려냈다.

장착되어 있던 작살의 끄트머리도 잘라서 바다에 던졌다. 요즘 포경용 작살 끝엔 수류탄이 붙어있기 때문에 혹시나 갑판위에 놔두었다가는 터져서 사람이 상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 경완의 배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손을 쓰자마자 일본의 초능력자들이 달려들었고, 경완은 그들을 피해 공중으로 날아올라 회피기동을 취했다.

그를 쫓는 7명의 일본 초능력자들은 제트팩 같은 비행용 모듈 덕분에 속도는 매우 빨랐지만 그만큼 무게가 나가서 그런지 급선회에 약점을 보였다.

하지만 경완은 달랐다. 그에겐 힉스장 제어 능력이 있었으니 급격한 방향 변화에서 오는 관성을 충분히 상쇄할 수 있었다. 아마 경완의 뒤를 쫓는 일본 초능력자들은 지금 강력한 G 때문에 올라오는 이를 악물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저들도 바보가 아니었으니, 이내 자신들의 장점, 숫적인 우월함을 깨닫고 이를 내세워서 대응에 나섰다. 일단 축구의 지역방어처럼 방어망을 구성하고 경완이 쉽게 골대, 아니 포경선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로를 선점한 것이다.

뿐만아니라, 새삼 카미카제 정신이라도 탑재했는지 육탄돌격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경완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귀찮게 시리.

그가 저들의 추격을 뿌리치면서 작살낸 작살총은 총 3대. 이제 4기만 더 없애면 되는데, 강철로 만들어진 포대가 면도칼로 치즈 자르듯이 잘리는 걸 보고도 몸으로 달려드네?

경완은 세상은 넓고 무모할 정도로 미친놈은 많다는 걸 새삼 깨달으며 한 가지 능력을 더 사용했다.

그것은 바로 웜홀 능력.

경완은 이미 작살총이 파괴되어 일본의 초능력자들이 방어하지 않는 포경선에다가 웜홀 마커를 찍어두고 이를 이용하는 전술을 펼쳤다.

일본 초능력자들의 추적을 뿌리치면서 작살총을 파괴했기 때문인지 공교롭게도 웜홀 마커가 설치된 포경선은 포경선단의 좌우 끝과 가운데에 있었고, 이는 경완이 일본 초능력자들을 따돌리는 데 매우 도움이 되었다.

축구로 비유하면, 레프트 윙으로 올라오는 상대 공격수를 압박하기 위해서 그리로 수비수들이 몰려갔는데, 상대 공격수가 갑자기 순간이동을 써서 라이트 윙이 돼서 올라오네? 경기 좆같이 하네?

경완이 그런 식으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두 대의 작살 포대를 더 작살내니 포경선에서 스피커에 대고 뭐라뭐라 영어로 소리를 치는데, 게임 개같이 한다는 극찬일까, 아니면 실력으로 안되니 말로 해결하려는 시도일까?

경완은 귀를 닫고 움직였다. 여기서 말로 어떻게 해결해? 세상 일이 그렇게 편리하게 돌아갈 리 없었고, 경완은 넓은 마음으로 저쪽에 그러한 이치를 가르쳐주기로 했다.

웜홀 능력까지 사용해가며 그가 일본 고래 사냥팀의 포경 능력을 제거해버리기까지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할 일을 끝낸 후엔 망연자실한 일본 초능력자를 놔두고는 왔던 곳으로 재빨리 사라져버렸다. 남아있어 봤자 쓸데없이 빌미만 줄 뿐이었다.

그런데 마침 일본 포경선에 타고 있던 외국 언론사가 이 모든 장면을 찍어 방송했고, 고래 보호 단체들은 단체로 사이다를 들이켰다.

[일본의 고래 학살, 개같이 실패!]

라는 밈과 함께 말이다.

* * *

[정말 감사합니다.]

[뭘요.]

바스티앙의 감사에 경완은 손사래를 쳤다.

바스티앙은 경완에게 고생한 대가로 돈을 주려고 했지만 경완은 질색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걸 도와줬다고 돈으로 받으면 돈으로 그를 어떻게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분명 귀찮게 해줄 거라는 경완의 논리에 바스티앙은 극히 공감하면서 돈 대신 다른 걸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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