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260화
25-헤게모니
“하, 하하! 재밌는 말씀이시군요.”
“그럼 프랑스의 체면을 구긴 일본의 체면을 구겨보자는 발상인가요?”
경완은 굳이 물고 늘어지지 않고 다른 측면을 이야기했고, 르티오는 그것까지 웃어넘기진 않았다.
“그런 의미도 없잖아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경완 씨에게 피해가 갈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대답에 경완은 겸사겸사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는 걸 파악했다. 바스티앙과의 관계도 회복하고, 일본의 체면에 먹칠도 좀 하고, 또 뭐가 있을까? 이경완 보유국 타이틀?
미국의 반응을 보아서는 딱히 그게 매리트일 것 같진 않았지만, 입장의 차이란 건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물어봤다.
“그런데 보답으로 국적을 주겠다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그게 어떻게 보답이 될 수 있을까? 입장을 달리해서 보면 오히려 손해일 수 있었다.
“프랑스 정부의 케어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바스티앙은요?”
“……그 사람은 너무 나갔죠. 그럼에도 저희는 그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프랑스 정부의 입장도 일 리는 있었다. 일본이 내건 동물이냐 사람이냐는 명분에서 프랑스가 대응할 수 있는 논리는 궁색했으니까.
그리고 다른 관점에서 봐도 바스티앙에게 강화고래를 잘 관리하지 못한 책임이 없다고 할 순 없었다. 포경선을 몸통박치기로 침몰시킬 정도로 고래를 강화했다면 그에 대한 책임도 져야 했다.
경완은 다시 국적 취득 시의 다른 문제를 지적했다.
“프랑스 국적을 얻으면 세금 내야 하지 않나요?”
하지만 그에 대한 답변 역시 준비되어 있었다.
“경완 씨가 프랑스 땅을 밟기 전엔 그 어떤 세금도 부과하지 않을 겁니다.”
“…….”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합리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경완의 마음 한구석이 삐뚤어져서일까? 르티오의 말은 세금 내기 싫으면 프랑스에 오지 말라는 소리로 들렸다.
“그러니까 세금 내기 싫으면 프랑스 국적을 받아도 프랑스엔 오지 말라는 거죠?”
경완이 한 마디 툭 던지자 르티오의 눈동자가 잠깐 떨렸다.
“어…… 그러니까 제 말은, 경완 씨가 프랑스에서 어떤 수익활동을 하면서 프랑스인으로서의 혜택을 누리게 되면 그만한 의무 역시 지게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말은 잘한다.
“그럼 프랑스에 여행 가는 건요?”
“아, 그 정도야 뭐……”
르티오는 무던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찜찜해하는 기색을 완벽히 감출 수는 없었다.
경완이 가지고 있는 웜홀 능력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웜홀을 이용한 핵폭탄 드랍은 전 세계 정치인과 지도자들의 머리에 웜홀 능력이 악용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 수 있는지 결코 잊을 수 없는 각인을 새겨놨으니까.
지금도 각국의 정부와 초능력 연구소에선 웜홀 능력자를 찾기 위해서 전 세계를 뒤지고 있다나?
경완은 르티오와 잠시 이야기를 더 나누고는 르티오의, 프랑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프랑스 국적을 얻어서 생기는 메리트는 그에겐 비자 없이 프랑스에 갈 수 있다는 거 빼고는 딱히 없지만, 얻어놔서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권리는 있고 의무는 없는 상황인데 거부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경완이 수락하자 일은 곧장 바로 진행되었다. 르티오는 그에게 국적 부여를 위한 서류를 사인만 하면 되도록 모두 준비해 왔다.
그러한 준비성이 시큰둥했던 경완을 감탄하게 하고 흡족하게 했다.
“대단하네요. 누가 보면 한국인인 줄 알겠어요.”
“칭찬 감사합니다.”
르티오는 웃었다. 경완은 그 미소가 가식에 불과하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마주 웃어주었다.
이러한 가식과 가식의 만남이야말로 사회생활의 대부분이 아니겠나? 거지 같은 상사의 썰렁한 아재개그에도 하하호호 웃어야 하는 직장인들에 비하면 경완의 사정은 아주 좋은 편이었다.
그가 사인을 한 바로 다음 날, 이관영이 헐레벌떡 경완의 집에 방문했다.
“프랑스 외교관이 다녀갔다고 들었습니다.”
“아유~ 소식도 빠르셔라. 혹시 감청 중이에요?”
“아니요! 그렇게까지 하진 않습니다!”
감청은 안 해도 누가 드나드는지 감시 정도는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뭐, 그 정도야 경완도 마음으로 허락한 짓이니까.
솔직히 대문 앞 길거리는 공공장소라 누가 오고 가는지를 누가 보든 경완이 간섭할 사항은 아니었다.
이관영은 경완이 별로 화내는 기색이 아니자 조금은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바로 용건을 꺼냈다. 그만큼 그의 다급한 심정이 드러났다.
“혹시 프랑스에 귀화하는 건 아니죠?”
“귀화까진 아니고 국적은 제의받았어요.”
“받으실 건가요?”
“네.”
“안 받으면 안 됩니까?”
이관영의 표정은 간절했다.
“미안하지만 이미 서류에 사인까지 해서 돌이킬 수 없어요.”
“아니! 어제 왔지 않습니까?!”
“서류를 싹 다 준비해 왔더라고요. 사인만 하면 될 정도로요.”
경완의 말에 이관영은 허탈해했다. 보아하니 경완이 프랑스 국적을 얻지 않도록 설득하러 왔는데 시도조차 못 할 상황이라니..
경완이 그런 그에게 툭 던지듯 물었다.
“제가 프랑스 국적을 얻는 게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있죠. 아주 큰 문제가…….”
“뭔데요?”
“이건 일본을 향한 프랑스의 도발 아니겠습니까?!”
“그래서요?”
“당연히 경완 씨를 두고 신경전이 벌어지겠죠.”
“글쎄요?”
일본이 여기서 경완에게 더 뭐를 한다? 미국의 경고에 이미 꼬리를 말았는데?
국가 운영의 결정권자에겐 유권자의 민심을 억누르고 꼬리를 마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이미 말아 넣은 꼬리를 다시 펴는 건 더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려면 꼬리는 왜 말았냐며 비난이 한층 더 가중되기 때문이었다.
경완이 보기에 이관영이 저렇게 난리 부르스를 추는 이유는 그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본인에게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걸 예상했기 때문으로 보였다.
일본이 프랑스와 경완을 매개로 신경전을 벌인다고 해도 그에게 직접 손을 쓸 순 없었다. 중국을 상대로 그가 깽판 친 걸 보고도 도발을 한다는 건 대가리 어디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거기에 더해 일본이 심혈을 기울여 육성했다는 초능력자들이 경완으로부터 포경 장비를 단 한 대도 제대로 방어해 내지 못한 걸 목격한 게 얼마전이었다.
경완에게 실력행사를 하겠다는 생각은 그런 생각을 하는 수준 낮은 대가리의 존재 가능성을 희미하게 만들 뿐이었다.
경완이 그렇게 준법시민이 아니라는 사실은 한층 더 부담스러웠다. 그가 그런 걸 조금이라도 신경을 썼다면 한국 정부와 법률을 무시하면서까지 살인고래를 잡겠다는 일본의 행사를 훼방 놓았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경완이 일본이라면,
“제 생각엔 한국 정부에 시비를 걸 것 같은데요?”
경완의 말에 이관영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도 경완과 같은 판단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국정원의 일본통이자 일본에게 자금지원까지 받았던(지금도 받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종의 이중간첩인 이관영.
분명 그는 다시 한 번 사이가 나빠질 한국과 일본의 여론 사이에 껴서 고생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제가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게 깔끔하지 않나요?”
경완이 그래도 안면이 있는 얼굴이라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이관영에겐 별로 마음에 드는 방안은 아니었는지 한숨을 푹 내쉬며 대꾸했다.
“일단 상황을 지켜보죠.”
그 말에는 해탈한 심정이 담겨 있었다.
이관영이 다녀간 다음 날에는 사태 파악이 한발 늦은 외교부에서 다시 공태구 차장을 보내서 볼멘 소리를 했고, 그 다음 날에는 청와대에서 안보실장 정준혁을 보내왔다.
그렇다고 이미 사인한 걸 어떻게 할 순 없었기 때문에 그들 모두 일본이 어떻게 나오는지 유심히 살피고 대응법을 찾는 것이 최선이라는 걸 인정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는 굳이 경완에게 프랑스 국적을 주었다고 광고하진 않았지만 일본은 움직였다. 경완이 아는 얼굴을 그의 집으로 보낸 것이다.
“오랜만이네요, 이 상.”
주한 일본 대사관 연구원 마츠키의 방문에 경완은 그녀에게 차를 대접하고는 툭 던졌다.
“일본 정부가 저에게 많이 섭섭해하죠?”
“네.”
마츠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완이 웃으며 말했다.
“미리 알리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전해주세요.”
“왜 해양국제활용기구의 편을 들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해양국제활용기구의 편을 든 게 아니라 바스티앙 씨의 편을 든 거죠.”
“왜인지 물어봐도 되나요?”
“그냥 그러고 싶더라고요. 바스티앙 씨와의 친분도 있고, 딱히 뚜렷한 이유 없이 고래를 죽여 대는 것도 보기 안 좋고.”
“살인고래를 잡으려고 한 건데도요?”
“어느 고래가 살인고래인지 아닌지 구분이나 할 수 있어요?”
그 말에 마츠키는 입을 다물었다. 궁색한 변명인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냥 놀러 온 것은 아닐 텐데, 용건이 뭔가요?”
“음……. 혹시 일본 국적을 받으실 의향은 있으신가요?”
“오호~”
경완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명백한 화해의 제스쳐.
여기서 일본이 국가의 자존심과 체면 대신 실리를 택할 줄은 몰랐다. 아니, 솔직히 마츠키가 방문했을 때부터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강경책을 선택했다면 그녀를 보냈을 리가 없을 테니까.
경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흔쾌한 수락에 마츠키의 표정엔 안도의 미소가 퍼졌다.
하지만 경완이 아무런 조건도 없이 수락한 건 아니었다. 프랑스 국적을 얻었을 때처럼 세금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 조건을 걸었다. 마츠키는 당연히 그 정도는 어렵지 않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완은 이로써 모든 사건이 일단락되고 평화로운 시절로 돌아갈 줄 알았지만 오산이었다.
일본은 그저 소리소문없는 방법으로 위버멘쉬를 견제하기 시작했을 뿐이었고, 그 무대가 태평양이 아니라 한국으로 축소되었을 뿐이었다.
[한국 히어로즈와 일본 히어로즈 수교!]
[한일 초인 친선 대회 개최!]
언제 한국을 비하하고 언론으로 때렸냐는 듯이 따스한 유화책을 내세우는 일본이었다. 김준이 경완에게 알려주길, 한국 여기저기에 투자도 하고 장학생도 뽑으면서 영향력을 구축하고 있다나?
“마치 무단통치를 포기하고 문화통치를 택했던 시절을 보는 것 같습니다.”
김준의 말에 경완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뭔데요?”
“3.1운동 몰라요?”
“들어는 봤죠.”
그러한 경완의 대답에 김준은 어떻게 한국인이 미국인보다 한국 역사에 대해서 모르냐는, 참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전후사정을 설명해줬다.
한마디로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이 조선인을 개돼지 다루듯 총칼로 다스리다가 3.1운동 같은 큰 반발이 일어나니까 국제적 비난 여론도 좀 무마해 볼 겸 무단통치라는 무식한 방법이 아니라 문화통치라는, 말로 어르고 달래고 독립운동가 사이도 좀 이간질하는 등의 좀 더 똑똑하고 교활한 방식으로 통제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닌가?
경완이 태평양에서 저들 일을 방해한 걸 빌미로 한국 정부를 강하게 압박하던 태도가 미국이 몇 마디 했다고 싹 바뀔 수 있었던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게 김준의 평가였다.
“그래도 일본이 한국을 비난했던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라서 이번 한일 초인 친선전은 매우 치열할 걸로 보입니다.”
“그래요?”
경완의 반문에 김준은 재밌다는 듯이 웃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경완 씨는 어디 팀으로 나가실 건가요?”
“어디 팀으로 나간다니요?”
“히어로 친선전이 아니라 초인 친선전입니다. 초능력자로 등록된 사람이면 누구든 나갈 수 있죠.”
“빌런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