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263화
26-빌런본색
미리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뉘앙스가 이상했다. 앞으로 위버멘쉬 코리아와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고 받아들이는 게 이상한 걸까?
그런 생각 때문인지 경완은 이게 보통일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여태까지 요하네스가 은근히, 아니 대놓고 뒤를 봐준 덕분에 자신이 그건 안전과 평온이란 꿀을 달게 빨아왔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어……. 혹시 저와 한국 지부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일단 그러지 말라고 조언은 하겠지만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독립시킨 이상 인사권도 분리되니까요.]
인사권은 조직의 장이 조직을 장악하는 중요한 지렛대다. 대통령부터 작은 좆소기업의 사장까지, 리더나 보스에게 인사권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인사권마저 분리한다니. 진짜로 독립시켜 버리는구나.
그래도 최악은 아니었다. 아무리 독립이 된다고 해도 태생이 위버멘쉬인만큼 창립자인 요하네스의 무형적 권위는 쉽게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가 경완의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은 훌륭한 지원이 될 수 있었다.
요하네스의 말은 경고지, 호의를 거두겠다는 통보는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본인이 저렇게 선을 그으니 조금은 불안해졌다.
적어도 더 이상 한국이 요하네스의 나와바리(?)가 아니라는 선언을 들은 거나 마찬가지였고, 그의 이유 없는 호의를 편리하게 누리던 경완은 심리적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거 그 지부장 양반하고도 친하게 지내야 하는 건가?’
냉정하게 따져봐도 그러는 게 평온한 인생과 직결되기는 했다. 하지만 권력자나 유력자에게 딸랑거리는 건 그에겐 도저히 취향에 안 맞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과거 막나가던 시절의 경완이 아니었다. 그때 그는 막나가도 무방할 정도로 가진 게 없었다면 지금은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만족스러운 그의 일상이라든가 그를 기꺼이 사랑해주는 연인이라든가.
그녀의 마음에 완벽하게 보답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책임지려고 노력을 해보는 게 사람 된 도리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는 스스로에게 자문자답을 해보았다. 과연 그가 먼저 나서서 높으신 분들과 인연을 맺어야 할 만큼 아쉬운 상황인가?
답은 ‘전혀 아니오’였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경완은 갑의 위치에 있으면 있었지 을의 위치에 있진 않았다. 다만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들 정도로 요하네스의 이름값과 영향력을 높게 평가했을 뿐.
정리를 하자면 무척 아쉽기는 하지만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마냥 급하게 여기저기 인사하고 다녀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친하게 지내면 되겠죠.”
[잘하실 겁니다.]
경완은 요하네스의 덕담을 무심하게 넘기며 일상을 보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한일 친선전의 참패로 일본은 위버멘쉬의 본격적인 진출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초능력 자원, 혹은 초능력 전력이 일본을 추월해 저 멀리 앞으로 가는 걸 두고 볼 순 없었으니까.
그리고 본격적으로 뿌리를 뻗기 시작한 위버멘쉬 재팬은 일본의 기업집단 게이레쓰와 손잡고 빠르게 일본 내에 그 영역을 확장했다. 게이레쓰는 내심 환영했다.
일본의 기업집단인 게이레쓰는 한국의 재벌격에 해당하는 경제 기득권 집단인데, 재벌과 다른 점은 혈족 경영을 하지 않고 은행을 중심으로 한 집단체제라는 점이었다.
이런 게이레쓰는 일본 버블붕괴 이후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일본 경제로 인해 점차 쇠퇴하고 있었지만, 정관계 및 언론과 연결된 그들만의 리그는 여전히 건재했고, 초능력 산업의 패러다임이 떠오르자 위버멘쉬와 손을 잡고서라도 새로운 도약을 시도했다.
우익세력이 뭐라고 해도 일단 돈의 힘이 더 중요한 인사는 있게 마련이었으니까.
한편 위버멘쉬 코리아 역시 재벌과 손을 잡고 한국에 영향력을 확대했으니, 그 결과 중 하나가 초능력자 훈련 및 교육에 대한 특혜였다.
명분은 좋았다. 한국 초능력자 육성 과정을 민영화하여 경쟁을 붙이면 교육의 질을 높일 수 있다나?
하지만 작금의 상황에서 누가 그 분야에서 위버멘쉬를 능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가격을 보다 싸게 할 순 있었다. 하지만 무슨 건설 공사도 아니고 무조건 값싼 교육이 과연 초능력 인재의 육성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유능한 초능력 사원의 확보를 간절히 바라는 재벌들도 검증된, 확실한 육성 전문가에게 사업을 맡기고 싶었다. 앞으로 초능력 산업이 지배할 세계 시장에서 도태되고 싶지 않으면 그러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들이 재벌이 위버멘쉬 코리아가 내민 손을 잡은 주된 이유였다. 재계 순위가 낮은 어설픈 재벌(?)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먼저 위버멘쉬 코리아에 찾아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 교육사업에서 위버멘쉬 코리아는 독점이나 다름없는 지위를 거머쥐게 된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경완도 완전히 제외될 수는 없었다. 마리아 소장 때문이었다.
“일본의 TSTG에 설치되었던 비행모듈을 붙여봤어요.”
TSTG, 종합 초능력 전술 장비는 정부기관에서 일하며 초능력으로 공권력을 행사할 초능력자들에게 지급될 기본 장비가 되고 이미 국회에서 입법처리 되었다.
그러다 보니 TSTG의 운용에 대한 교육도 필요하게 되었는데, 자연히 종합 초능력 전술 장비의 테스터였던 경완과 이철이 그 교관으로서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외국에 뭔가를 주고 초빙하는 것보다는 그게 싸게 먹힐 테니까.
경완이 비행모듈이 붙은 TSTG를 보며 마리아 소장에게 물었다.
“이것도 해야 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건 이철 씨만 입을 거니까. 경완 씨에겐 딱히 필요가 없어요.”
입으라고 하면 불만을 터뜨릴 기색인 경완을 마리아 소장이 안심시켰다.
어차피 테스터로서의 경완과의 약속은 그 끝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모듈에 대한 시험을 부탁해 봤자 들어줄 리 없었고, 설사 들어준다고 해도 중간에 멈출 것이 뻔했으니 마리아 소장은 그녀의 히스테리 지수를 높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안 되는 건 빨리 포기하는 현명함을 발휘했다.
대신 경완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위버멘쉬 한국 지부장의 부탁은 어떻게 할 거예요?”
위버멘쉬 한국 지부장 정호태는 얼마 전 연구소에 방문해 TSTG 테스터로서 협조하고 있던 경완을 찾아와 한 가지를 부탁했다. 그것은 바로 곧 설립될 위버멘쉬 한국 훈련소의 특별 강사로 초청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때 경완은 즉답하지 않고 생각해 보겠다고만 대답했었다. 그런데 마리아 소장이 그의 수락 여부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물론 경완이 할 대답은 예쓰였다. 정호태 지부장이 앞으로 한국 사회 전반에 적잖은 영향을 끼칠 사람이라는 건 둘째치고, 직접 찾아와 부탁할 정도의 정성을 보이는데 거기에 면박을 주는 건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아니지 않은가?
딱히 거절해야만 할 필연적 이유도 없고 말이다.
“일단 생각 중이에요.”
그럼에도 경완은 결정을 보류중이라고 대답했다.
왜? 너무 쉽게 수락하면 사람이 가벼워 보이니까.
사람이 가벼워 보이면 부탁을 들어줘도 그리 어렵지 않은 부탁이라고 오해받을 수 있었다…… 라는 건 너무 좋게 표한 거고,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몸값을 올리려는 시도였다.
돈으로 환산 가능한 몸값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의 무게감을 의미했다. 그리 쉽게 부탁할 수 있는,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이미지 메이킹이 목적이랄까?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로 받아들인다지 않는가.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라도 적절한 밀당이 필요한 법이었다.
마리아 소장에게도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고 생각 중이라고 말하는 건 그 이유 때문이었다. 말이란 어디서 새어나가는지 알 수 없는 법이니까.
마리아 소장의 입이 가볍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저 비밀을 지키고 싶으면 본인부터 노력을 해야지, 지가 먼저 남에게 떠벌여 놓고는 그 사람의 입이 가볍다고 원망하는 병신짓은 사양이었다.
마리아 소장이 경완의 진심을 파악하기 위해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필 때 공중에서 땅으로 착지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철이었다.
“이거 물건인데요!”
이철은 비행모듈이 부착된 TSTG로 하늘을 나는 재미에 푹 빠져버렸다.
마리아 소장을 상대로 비행모듈의 대단함을 증언하던 그는 중간에 던져진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무엇을 하느냐? 바로 곧 지어질 위버멘쉬 한국 훈련소의 교관 자리였다. 정호태 지부장이 저번에 경완에게 강사 자리를 제안하러 찾아왔을 때 그는 경완만이 아니라 이철에게도 강사 또는 교관 자리를 제안했다. 이철이 허락한다면 상부는 자신이 설득하겠다면서 말이다.
이철은 그러한 제안을 정호태 지부장의 배려로 받아들이고 감동했다. 사실 공무원 신분인 그는 상부에서 지시를 내리면 그것이 부당한 명령이 아닌 이상 따라야 하는 의무가 있었고, 정호태 지부장 정도라면 그의 의견을 묻지 않고 상부와 딜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철의 의견을 존중해서 먼저 의사부터 타진해 왔으니, 이철은 그러한 배려를 고려해서라도 정호태 지부장의 부탁 같은 제안에 긍정적이었다.
이철은 질문의 화살을 경완에게 돌렸다.
“너는?”
“생각 중이야.”
경완은 마리아 소장에게 했던 대답을 이철에게도 했다.
그렇게 뜸을 들이다가 이틀 뒤 정호태 지부장에게 연락해 제안을 수락했다.
[정말 탁월한 선택입니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아유, 저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경완이 전화를 끊자 미연이 신기한 생물을 발견한 눈초리로 그를 보았다.
“왜?”
“아니, 오빠가 그런 말투를 쓰는 게 신기해서.”
“아무리 나라고 하지만 똥오줌 못 가리고 막나가는 사람은 아니야.”
“내가 그렇게까지 말한 건 아니잖아.”
“아니었어?”
“날 평소에 어떤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그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티격태격 말싸움을 시작했다.
경완은 피곤했지만, 이것도 연인 사이에선 없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열심히 입을 놀렸다(……). 살아온 세월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사는데 전혀 갈등이 안 생기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말다툼을 하다가 정말 삐지면 어떡하냐고? 대화란 꼭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침대 위에서 육체의 대화를 나누고 나면 무슨 이유로 싸웠는지 기억도 나지 않거나, 정말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다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게 연인관계 아니겠는가?
“오빠, 일어나.”
“5분만…….”
“출근할 거라며?”
“아…… 귀찮아.”
경완은 흐느적거리며 일어났다. 잠에서 막 깼을 때의 그 노곤한 잠기운에 다시 빠져드는 쾌감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으리라.
아침 식사 후 미연은 촬영이 있다며 마중 나온 매니저 차를 타고 나갔고, 경완은 하품을 찍찍 내뿜다가 대충 씻고는 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는 10시까지 패드를 잡고 있다가 맞춰둔 알람 소리에 부랴부랴 준비해서 집을 나섰다.
마당에서 하늘로 솟구쳐 오른 그의 목적지는 위버멘쉬 한국 연수원.
수도권을 벗어난 곳에 자리한 위버멘쉬 한국 연수원은 연수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훈련소에 가까운 모양새였다.
마치 군 훈련소를 연상시키는 널찍한 연병장과 한쪽에 자리한 딱딱해 보이는 기숙사는 군필 남성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광경은 경완에게 약간 충격을 줄 정도였다. 위버멘쉬의 시설이 이렇게 허름하다고? 이상하다? 위버멘쉬를 인재 육성에 플랙스하는 집단이 아니었던가?
경완의 시선이 기숙사 반대편으로 향했다. 그나마 최근에 신축한 듯 보이는 건물만이 현대적인 양식으로, 돈 좀 부은 모양새를 보여서 안심이 되었다.
그 건물이 바로 정호태 지부장이 말했던 교육관 건물이었다.
교육관에 경완이 방문하자 데스크에 있던 직원이 미소로 그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경완의 초감각엔 그녀의 긴장이 느껴졌지만, 태연하게 미소로 맞이하는 프로 근성이 대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