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266화
26-빌런본색
일주일에 한 번 경완은 위버멘쉬 한국 연수원의 특별 강사로서 출근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연은 그런 경완의 강사 생활에 관심이 많았다. 경완이 내심 그 이유를 분석해 보니, ‘네? 남편 무슨 일 하느냐고요? 자영업 해요, 자영업’이라며 애써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던 상황이 ‘우리 남편 판검사 해요’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게 된 아내의 상황과 비슷한 것 같았다.
돈 많다고 집에서 뒹굴 거리는 남편보다는 돈도 있고 사회적 지위와 명예도 높은 남편이 남들의 부러움을 사거나 자랑하기에 좋지 않은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도 인정받고 존경받길 원하는 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였다.
“애들은 말 잘 들어?”
“응. 생각보다 훨씬.”
반항기의 재능 있는 청소년 따위의 클리셰는 현실세계엔 존재하지 않았다.
재능이 있는데 반항심이 많다? 과거에는 잠재적 반골이자 역적이고, 요즘 같은 세상에는 내부고발로 회사와 오너 일가에 흠집을 내는 잠재적 위험분자였다.
그런 게 아니더라도, 내가 옳고 남은 틀리다는 오만을 품은 놈이나, 자기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잘못되었다며 남 탓만 하는 녀석 중에 향상심을 품고 자기 역량을 키우려 노력하는 놈은 거의 없었으니, 그런 녀석들이 위버멘쉬의 인재로 인정받으려면 보통 재능으로선 불가능했다.
또한 인재를 들이고 싶은 입장에선 기왕 재능이 있다면 반항 잘하는 놈보다 고분고분 말 잘 듣는 녀석이 훨씬 나은 게 당연하지 않은가? 경완조차 극히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일 논리였다.
“그래서 가르치는 게 적성은 맞고?”
미연의 말에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교육에 대한 열정에 불이 붙어서가 아니었다.
“잘 알아들으니까 재밌더라.”
“그래?”
미연은 이것저것을 물어보았고 경완은 연수생인 청소년들의 프라이버시 침해가 안 되는 선에서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경완의 강사 생활에 대해서 궁금한 건 미연만은 아니었다.
“군자삼락(君子三樂)이라고 알아요? 그중 하나를 알겠더라고요.”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이란, 하나는 부모가 다 살아 있고, 둘은 형제가 아무 탈 없이 편안하게 지내며, 셋은 천재의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다.
경완에게 위버멘쉬 한국 연수원에 대한 정보를 엿들으러 왔던 김준은 경완의 말에 눈알을 굴렸다.
경완이 맡은 애들이 재능있고 똘똘하다는 정보는 반가웠지만, 거기에 굳이 군자삼락이라는 거창한 표현을 붙이니 기분이 좀 거시기했다. 아마 경완과 군자라는 단어를 연결하는 것에서 적지 않은 괴리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내가 군자가 아니라는 건 아니까 표정관리 좀 하시죠.”
소인배인 경완이 굳이 지적하자 김준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무안한 듯 헛기침을 내뱉으며 화제를 돌렸다. 이 정도 실례야 뭐 두 사람 사이에선 별일 아니라는 게 암묵적 합의였다.
“그래서 위버멘쉬의 커리큘럼은 어떻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따로 서류 작성 따윈 안 해도 돼서 좋더라고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커리큘럼도 짰으니 일단 큰 틀은 그걸 따라가면 되고 연수생들의 진도에 따른 불가피한 계획 수정도 전산화된 행정서비스 덕분에 경완이 귀찮은 사무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습니까?”
경완의 대답에 김준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지만 경완은 굳이 한마디를 던져서 그를 뜨끔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첩보 능력이 도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굳이 저를 통해서 내부 정보를 빼내려고 하는 거예요?”
“……오햅니다.”
“알았어요.”
단숨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게 더 굴욕적이었다.
김준은 표정관리에 애를 쓰며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가르치는 게 적성에 맞으신 거죠?”
“적성에 맞다기보다는 배우는 애들이 똘똘해서 편한 거죠.“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면 얼마나 좋은가? 단순히 가르치는 게 편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이렇게 소통 능력이 떨어져도 내 뜻을 이해해 주는 존재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 자체가 인간에겐 큰 기쁨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소통에서 자기 존재 이유를 발견하는 짐승이지 않은가? 수많은 SNS 계정과 그 중독자들이 바로 그 예시였다.
“애들이…… 뛰어난 모양입니다?”
“어디서 이런 애들을 찾아냈는지 신기할 정도던데요?”
떡잎부터 다르다는 말이 있잖은가? 위버멘쉬가 경완에게 맡긴 아이들은 정말 떡잎부터가 달랐다.
김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부터 위버멘쉬의 인재발굴 능력은 유명했죠.”
도대체 무슨 정보가 있기에 어떻게 파란 떡잎을 그렇게 잘 찾아내는지……. 요하네스에게 예지능력이 있다는 소문에 신빙성을 더하는 이유였다.
“그래서 아이들은 무슨 능력이 있나요?”
“프라이버시라서 말하기 좀 그렇네요.”
경완이 말을 아끼자 김준은 입맛만 다시다가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요새 미국에서도 믿을 만한 독심술사를 양성 중이다, 정신계 능력을 막을 수 있는 신소재가 개발되었다는 등 중요한 이슈들이 나왔다.
“세상 참 빠르게 변하는군요.”
“그만큼 사건사고도 많으니까요. 하지만 이게 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려는 진통이겠죠.”
“새로운 시대가 되어도 딱히 인간의 삶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경완의 말에 김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질투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생활의 양태는 변할지언정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더 나아지겠죠. 역사가 그걸 증명하잖아요.”
“그런가요?”
경완은 씨익 웃었다. 그 미소에 김준은 뭔가 불안해졌다.
“왜요?”
“아니, 역사가 증명한다길래 문득 과거에 멸망해서 지금은 흔적만 남은 문명이 생각나서요.”
수메르 문명이라든가, 전설로만 남은 아틀란티스라든가. 그 대단하던 로마도 결국은 망했지 않은가?
경완의 말에 김준은 무슨 소린가 했더니 헛소리였구나라는 표정으로 웃었다.
“경완 씨는 지금 문명도 영원하진 않을 거라고 보는군요.”
“그렇죠.”
“하긴 세계 제3차 대전이 일어나면 문명의 멸망이 아니라 인류의 멸망이라는 소리가 있으니까요.”
경완은 고개를 끄덕여 맞장구쳤지만 사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인류의 멸망은 전쟁 같은 급격한 변화를 통한 멸망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술의 발달과 인류의 진화 방향으로서의 인류종말을 떠올렸다.
특히 AI.
인류가 낳은 이 새로운 지능종과 인류는 경쟁할 수밖에 없었고, 대다수는 이 유능한 종족에 도태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결국 인류는 자연선택의 결과로서 진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는 전통적인 의미의 인류가 소멸한다는 걸 뜻했다.
기계와 융합한 인간만이 살아남는 세상.
누군가는 ‘사이버펑크?’라며 심장이 두근거리겠지만, 경완의 통찰력으로 본 그 세계는 펑키보다는 오히려 소름 끼치도록 합리적이고, 차가워서 금속 맛이 날 것 같은 그런 세계였다.
“그러니까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렇죠.”
김준의 순진한 희망에게 경완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지만 그게 불가능한 소리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모두가 함께 노력해서 이루는 평등하고 아름다운 세상. 빨간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던 세계는 이미 실현 불가능성을 증명하고 몰락했다.
그러한 역사야말로 모두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했다.
이러한 현실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방법은 뭘까?
다른 건 모르겠고, 일단 내가, 각자 개인이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건 상수(常數)여야 했다.
나는 노력도 안 하는데 남들이 더 나은 인간이 되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달라는 ‘해줘’에 공감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정리하자면 모두가 세상을 좋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건 아니었으니, 오히려 싸질러놓는 거 외엔 할 줄 모르는 인간도 존재했다.
위버멘쉬 한국 연수원에서 똘똘한 녀석들을 가르쳐서 저도 모르게 흐뭇해졌던 기분을 중앙지검의 검사가 찾아와 기분을 씹창낸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러니까 초능력 범죄자를 잡는 데 도움을 달라고요?”
“그렇습니다.”
백윤식이라는 이름의, 뿔태안경을 쓴 검사가 사무적인 어조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완은 오랜만에 이런 체포 협조 업무가 들어온 것에 고개를 갸웃했다. 국정원의 요청을 받아서 했던 마약 조직 소탕도 혼란스러운 과도기가 끝난 후엔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점점 레드 오션이 되어가는 히어로 산업 덕분에 마약 조직에 대한 단속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어서 경완이 굳이 어둠 속의 히어로 역할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새삼 이런 의뢰가 들어오니 신기했다.
“제 능력이 아니면 못 잡을 정도인가요?”
“증거를 파기하고 잠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듣자 하니 신체변형능력을 가지고 있단다.
“그 외에 다른 능력은요?”
“파이로키네시스를 확인했습니다.”
복합능력자라…… 아무리 초능력에 사람들이 익숙해진다고 해도 복합능력자의 수가 그리 많진 않았다.
“그런 친구가 왜 범죄를 저지르고 도주를 한대요?”
대기업에 들어가면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남부러움을 사며 잘 먹고 잘살 텐데 말이다
“그건 수사 기밀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뭐 어디 흘리기라도 한데요? 말해보세요.”
“그럴 수 없습니다.”
완고한 백윤식 검사의 태도에 경완의 촉이 꿈틀거렸다. 굉장히 구린 냄새가 난달까?
“그럼 저도 안 해요.”
“상대는 헌정질서를 파괴하려는 범죄자입니다.”
“테러범도 아니고 무슨 헌정질서 파괴예요? 과장하지 말고, 아무튼 전 전후사정도 모르는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으니까 말해주고 싶지 않으면 가세요.”
스파이X맨에서 그랬지.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
그런 의미에서 상대의 말만 믿고 무지성으로 나서는 인간은 아무리 큰 힘이 있어도 이용당하기 딱 좋으니, 본인의 큰 힘에 따른 책임 있는 자세가 전혀 아니었다.
경완의 말에 백윤식 검사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실망입니다, 이경완 씨.”
실망했는데 뭐 어쩌라고?
말하는 뉘앙스가 꼭 내가 실망했으니 지금부터 좀 걱정 좀 하셔야 할 겁니다라는 뉘앙스라 경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백윤식 씨라고 했나요?”
“……그렇습니다.”
경완의 말에 백윤식 검사, 아니 백윤식 씨가 뭐가 그리 불쾌한지 표정이 굳었다. 검사가 아니라 씨라고 불러서 그런가?
근래에 보지 못했던 반응과 태도에 경완은 신선함마저 느꼈다.
“대단하시네요.”
“뭐가 말입니까?”
“다른 사람 앞에서도 그렇게 꼿꼿하시죠?”
“제가 당신 앞에서 굽실거려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백윤식 검사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경완은 능글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제가 언제 그러라고 했어요? 그냥 다른 평범한 시민들 앞에서도 그렇게 꼿꼿한가 싶어서 궁금해서 그러죠.”
“저는 언제나 이렇습니다.”
“재벌 회장 앞에서도요?”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는 개뿔. 그렇게 강직한 새끼면 왜 그 순간에 대답을 망설이는데?
경완은 눈앞에 선 고압적인 구라쟁이를 향해 감탄의 박수를 날려주었다.
“역시 대한민국 검사라면 그래야죠. 존경합니다.”
아니, 존경한다면 자랑스러워하거나 민망하거나 해야지 왜 벌레 씹은 표정이래?
한쪽 입꼬리를 잔뜩 올리고 있던 친절한 경완 씨는 뭔가 문제가 있나 보다 싶어서 그걸 지적해 주었다.
“표정이 왜 그래요? 내가 당신을 존경하면 안 됩니까?”
“……아닙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설사 제가 백윤식 씨를 존경한다고 해도 전후사정 모르는 일에 끼어들진 않아요.”
“……그러시겠죠.”
검사님이라고 안 하고 끝까지 백윤식 씨라고 하는 게 거슬리는 모양인지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그에게 경완이 일어나서 친절히 나가는 방향을 알려주었다.
“저쪽이 현관입니다.”
“…….”
“일어나셨는데 어느 쪽으로 나가야 하는지 모르시는 것 같아서. 아! 똥오줌이 마려우세요? 화장실은 저쪽이에요.”
“화장실은…… 됐습니다.”
짐승도 아니고 똥오줌이 뭐냐, 똥오줌이?
백윤식 씨는 경완의 친절한 축객령에도 똥 씹은 표정으로 돌아갔고, 경완은 손바닥을 비비다가 자신의 기분을 자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