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268화
26-빌런본색
경완의 물음에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경완이 그들의 눈치를 살펴보니, 그냥 판검사를 죽인 범죄를 헌정 질서 운운하면서 과장했을 뿐인데 경완이 갑작스레 쿠데타 같은 큰일을 들먹이니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런 그들의 반응에 경완은 김이 빠진 기분으로 손을 내저었다.
“쿠데타도 아닌데 무슨 헌정질서 파괴예요?”
진짜 쿠데타라면 신나게 대가리 깨러 갈 텐데, 이건 뭐…….
그의 흥미가 급히 식어버리는 게 느껴지자 서울지검장이 급히 나서서 말했다.
“법치를 흔들기 위해 법관과 검사를 공격하는 건 엄연히 헌정질서에 대한 파괴행위요!”
판검사가 국가의 흥망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아~주 대단한 양반들이라는 관점이라면 맞는 소리였지만, 경완에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 소리에 불과했다.
“에이~ 겨우 판검사 서넛 죽은 거 가지고 그래요.”
“판검사에 대한 흉악범죄를 당연시하면 판검사가 어떻게 마음 놓고 법을 집행합니까?!”
“어이가 없네?”
“뭐요?!”
경완이 느닷없이 던진 말에 서울지검장은 잠깐 인지부조화가 와서 반문했다. 자신이 서울지검장이나 되어서 이렇게 열변하는데 ‘어이가 없네?’ 같은 소리를 들으니까 어이가 없어졌다.
경완이 말을 이었다.
“겨우 산재사고 가지고 왜 그리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네요.”
“산재라고요? 산재라고?!”
서울지검장은 어이가 없어서 언성을 높였다.
경완은 멀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럼 법을 다루는 일이 안 위험한 줄 알았어요? 재판받는 사람들이 죄다 순해 빠진 선량한 준법시민인가요? 아니니까 수사받고 재판받는 거 아니에요? 그 예전에 대학교수라는 사람마저도 판결에 원한을 품고 판사를 석궁으로 살해위협했다면서요? 원래 그렇게 판검사 일은 위험한 건데 왜 그리 호들갑을 떠는지를 모르겠네요. 남미 판검사들 보세요. 목숨 걸고 일하잖아요.”
남미의 판검사들을 진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직업이었다. 목숨을 걸고 마약갱단과 싸우거나, 아니면 직업생명과 사회적 생명을 걸고 결탁하거나.
그런 곳에서 일하는 판검사들을 생각하면 한국 판검사들은 꿀 빠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치안도 시민의식에 기대는 부분이 많으니, 판검사들이 그간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 근무할 수 있었던 것도 순한 시민의식 덕분이 아닐까?
너무 국뽕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조선족 밀집 지역에 칼 같은 흉기 들고 다니지 말라는 현수막이 걸린 걸 보고 한국의 일반적인 시민의식을 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리라.
“남미와 우리나라는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까?”
경찰청장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논리는 경완의 논리를 무너뜨리기엔 부족했다.
“우리나라 사정에 감사는 못할망정 오히려 불만만 많으니 하는 소리잖아요.”
“그렇다면 우리나라 판검사들이 살해당한 일이 우리나라가 남미처럼 변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저도 귀가 있거든요. 기소, 판결 지들 꼴리는 대로 하다가 원한 사서 뒈진 걸 마치 거대한 악의 조직에 항거하다가 살해당한 거 하고 동급으로 놓으면 듣는 저도, 저~기 남미 판검사들도 어이없거든요.”
“그건 억측입니다!”
“그럼 죽은 판검사들이 어떤 악의 조직을 상대로 법정의를 실천하다가 죽었는지 말할 수 있어요?”
“…….”
그 물음에 청장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 말할 수 없겠지. 그런 악의 조직이 대한민국에 있을 리가 있나. 정말 있다고 해도 위버멘쉬나 히어로 컴퍼니가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데 활동을 제대로 할 수나 있겠는가?
경완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말했다.
“솔직히 용의자도 특정 안 됐죠?”
경완의 물음에 경찰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지금 저에게 용의자 추적부터 도와달라는 말이 아닙니까? 대한민국 경찰 다 죽었어요? 검찰은 그동안 놀았고요? 정부는 초능력 수사 능력을 확보 안 하고 뭐 하고 있었어요?”
아니, 미국은 이제 경완을 대체할 만한 독심술사도 확보하고, 천리안 장비운용 요원도 확보했다는데 도대체 대한민국 정부와 수사기관은 그동안 뭘 하고 있었던 말인가?
경완의 질타에 서충헌 차장이 애써 변명을 했다.
“서울 참사 이후 최소한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도 버거웠습니다.”
“그래요?”
“그러니까 현재 천리안 장비를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운용하는 이경완 씨의 협조가 필요한 겁니다.”
“싫어요.”
경완의 단답에 서충헌 차장의 표정이 구겨졌지만 얼른 표정을 관리하고 물었다.
“도대체 왜 싫으신 겁니까? 저희는 경완 씨에게 충분한 대가를 지급할 용의가 있습니다.”
이에 경완은 한 사람의 이름을 꺼냈다.
“김오민 검사라고 기억하시려나 모르겠네.”
“그게 누굽니까?”
경찰청장은 고개를 갸웃했고, 서울지검장은 잠시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가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경완은 혀를 찼다.
“쯧쯧쯧. 이제 떠올린 거예요? 하여간 열심히 일하다 죽은 사람은 너무 잘 잊힌단 말이야, 세상인심 하고는, 쯧. 아무튼, 죽은 판검사가 김오민 검사처럼 강직했으면 저도 사람된 도리로 당연히 도와줬겠죠. 하지만 자기 권력을 지꼴리는 대로 휘두르다가 죽은 인간들을 돕고 싶진 않은데요?”
경완의 말에 서충헌과 서울지검장의 시선이 교차했다. 표정에는 난감함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곧 서울지검장이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경완 씨가 사법체계를 불신하는 건 이해합니다. 완벽하지 않은 사법체계가 만족스럽지 않으시겠죠. 하지만 이러한 사법체계라도 완전히 무너지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최악보다 차악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짜 차악이 뭔지 알아요?”
“뭔가요?”
“제가 법원이랑 검찰에 찾아가서요, 독직하는 판검사랑 회장님들하고 너무 친해서 감히 기소도 안 하고, 유죄도 못 때리는 판검사들을 골라서 죄다 아오지 탄광에 집어넣는 거예요.”
“…….”
“최선은 뭔지 알아요? 그런 판검사들이 하루아침에 개과천선을 해서 사명감을 가지고 성실하고 상식적으로 준법정신을 가지고 일을 하는 거죠.”
잠시 침묵이 돌았다. 딴 건 몰라도 차악 차선 운운하면서 설득하는 건 틀려먹었다는 걸 확실히 알겠다.
서충헌 차장이 나섰다.
“이런 말을 하면 실망할지도 모르겠지만, 경완 씨가 아는 김오민 검사는 그렇게 청렴하거나 완벽한 검사는 아니었습니다.”
경완이 저렇게 고집을 피우는 근거를 무너뜨리려는 전략이었지만 경완은 끄떡도 없었다.
“오오~ 양비론. 그놈이 그놈이니까 도와달라는 논리인가요? 그런데 양비론이 정말로 뜻하는 게 뭔지 알아요?”
“…….”
뭔가 또 엇나간 느낌에 서충헌 차장이 말을 아끼자 경완은 자문자답하듯 말을 이었다.
“지능이 처참하다는 뜻이에요. 줄여서 능지처참.”
능지처참(陵遲處斬) 뜻이 그런 게 아닐 텐데?
세 사람이 이상함을 느끼든 말든 경완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냥 어느 놈이 덜 나쁜 놈이고, 어느 놈이 더 나쁜 놈인지 구분할 지능이 없는 것들이 양쪽 다 똑같이 나쁜 놈이라고 치부하면서 마치 자기는 깨끗하고 고고하고 똑똑한 척한다는 게 양비론의 진정한 뜻이에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경완이 여전히 도와줄 마음이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설사 둘이 똑같은 놈이라고 칩시다. 그런데 얼굴 한 번 안 본 나쁜 놈하고, 그래도 같이 일해서 안면이 있는 놈하고 내가 같은 취급을 할 것 같아요?”
불편한 침묵이 흐르자 경완이 물었다.
“차라리 위버멘쉬나 히어로 컴퍼니에 도움을 요청하지 그랬어요?”
여기 와서 나 귀찮게 하지 말고.
“…….”
그럼에도 침묵이 감돌자 경완이 놀라서 눈과 입을 크게 벌렸다.
“설마 까였어요?”
리얼리? 혼또니?
“까인 게 아닙니다.”
서울지검장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누가 감히 한국 사법기관의 요청을 깔 수 있단 말인가? 그저 히어로 컴퍼니는 엔터테이먼트적인 성격 때문에 수사 관련 초능력자가 거의 없었을 뿐이고, 위버멘쉬 코리아는 선진 초능력 수사기법 교육을 위해 해당 인원을 해외에 파견 및 교육을 보냈을 뿐이었다.
“그 말을 믿어요?”
“믿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서충헌 차장이 대꾸했다.
경완은 히어로 컴퍼니는 그렇다고 쳐도 위버멘쉬 코리아는 분명 여력이 있을 텐데 그러한 핑계를 댄 이유가 뭘까?
경완은 세 사람이 끝내 방문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간 후 한 통의 전화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괜히 폐를 끼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정호태 지부장이었다.
“무슨 폐를 끼쳤다고 그러세요? 너무 과장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저희 쪽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미 한국의 초능력 인재 공급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한 위버멘쉬 코리아였다. 경완이 국정원, 서울지검장, 경찰청장에게 쓴소리를 했던 것과는 달리 한국 정부 역시 초능력 수사는 도입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버멘쉬 코리아는 이 부분에서 외주를 주기가 매우 적합한 업체였기에 한국 수사기관들은 보유하고 있던 초능력 수사관들을 위버멘쉬 코리아로 교육을 보냈다.
위버멘쉬 코리아는 이중 꽤 재능있는 이들을 골라 초능력 수사 기법의 최선두를 달리고 있는 미국으로 연수를 보냈는데, 문제는 이때 뛰어난 재능을 가진 수사관들을 죄다 보낸 것이다.
그리고 마침 공교롭게도 판검사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다 보니 국내에 남은 초능력 수사관들은 능력이 모자라 현장에서 증거를 잡아내지 못했다. 초능력이 사용된 범죄 현장이 일반적으로 그렇듯 과학수사나 탐문 수사 역시 난조를 보였다.
미세한 증거마저 잡을 수 있는 재능 있는 에스퍼 등은 이미 미국에 있었고, 미국에서 그들이 돌아온다고 해도 그땐 남은 흔적도 사라져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사정이.”
[적절한 수사 인력은 남겨놨어야 하는데. 저희의 불찰입니다.]
“불찰은 무슨. 누가 이런 큰 범죄가 일어날 줄 알았나요?”
남겨 놓은 초능력 수사관의 능력이 생각만큼 뛰어나지 않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서 이렇게 전화를 건 이유는 도와달라는 건가요?”
[아. 그 수사 말입니까?]
“네.”
경완은 정호태 지부장이 이렇게 연락을 한 이유가 정부의 요청을 받아 경완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서인 걸로 이해했다. 하지만.
[아니요. 그건 경완 씨 마음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럼 전화는……?”
[혹시나 불필요한 오해가 있을까 봐서요.]
“오해라면?”
[저희가 위버멘쉬 코리아가 본부와 분리되었더니 갑자기 무능해졌다는 소리를 들으면 곤란하거든요.]
“제가 설마 그러겠습니까? 그보다는 저보다는 언론이나 대중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 부분도 충분히 대처하고 있습니다만, 저희 위버멘쉬의 기반은 결국 능력 있는 초능력자분들의 신뢰거든요.]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기는 했다. 초능력 인재들의 지지야말로 위버멘쉬의 성장 동력이자 영향력의 근원이었으니까.
“그럼 수사기관의 부탁을 받아서 전화한 게 아니네요?”
[그렇습니다.]
경완은 정호태의 상황 인식이 궁금해졌다.
“그 판검사 살해범은 어떻게 될까요?”
[글쎄요? 그거야 수사기관에서 알아서 할 일이 아닐까요?]
와우~ 냉정하구만. 한국인답지 않은 태도였다. 찐 한국인이라면 여기서 부패한 판검사 잘 죽였다라거나 그래도 살인은 아니라며 성토하거나 했을 텐데 여기서 남일이라고 선을 긋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