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269화
26-빌런본색
확실한 건 정호태가 정의감에 불타는 그런 스타일은 절대로 아니라는 거다. 오히려 손해와 이익을 냉정하게 계산하는 금융자본가 스타일이랄까?
하지만 그런 태도가 오히려 경완에겐 어느 정도 공감이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결국 지들이 싸질러 놓은 똥인데 대신 치워주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
[저도 듣는 귀가 있습니다. 범인의 성향을 생각하면 피해자가 될 부류는 정해져 있죠.]
“혹여나 무고한 사람이 죽으면요?”
[그때는 경완 씨가 나서지 않을까요? 아니면 저희 선에서 처리되겠죠.]
윗분들 괘씸죄가 무섭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만큼 위버멘쉬의 위상이 높은 건가?
경완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굳이 묻진 않았다. 더는 이 일과 관련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호태도 굳이 더 말을 꺼내진 않았고, 그렇게 경완은 이번 사건이 더 이상 그와 연관이 없을 줄 알았다.
* * *
[들리시나요?]
뇌리에 직접적으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경완은 하던 게임을 잠시 정지하고 패드를 놓았다.
[오랜만이네요.]
경완은 자신의 머리에 붙은 채널을 통해 의사를 전달했다. 상대는 활동을 중지한 줄 알았던 비질란스의 ‘목소리’였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시간이 없으니 본론만 말할게요. 위버멘쉬의 총수를, 요하네스 벨푸기스를 믿지 마세요.]
[그게 무슨 말이죠?]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판검사 살인 사건의 뒤에는 위버멘쉬가 있습니다.]
[…….]
경완은 놀랐다. 이런 뜻밖의 정보를 듣다니?
하지만 목소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었다. 오랜 세월 잠적해 있다가 갑자기 연락해서 하는 소리가 남을 의심하라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근거는요?]
[근거는 없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위험하기에 말할 수가 없어요.]
[누가 위험하다는 말이죠?]
[우리 모두요.]
[저도 위험하다는 말인가요?]
누가 감히 현재 이경완을 위협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비질란스의 목소리는 생각이 달랐다.
[잠적한 이래로 위버멘쉬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지만, 그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감히 판단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요?]
[평양 대폭발이 정말 북한 체제에 불만을 품은 초능력자가 각성해서 벌인 일이라고 생각해요?]
[……위버멘쉬가 했다는 소린가요?]
[증거는 없지만 저는 그렇게 믿어요.]
경완은 목소리의 주장에 대한 의심이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 근거가 없는 말만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채널을 통해 느껴지는 상대의 감정은 자신이 ‘진심’임을 표현하고 있었다. 본인은 분명히 그렇게 믿는다는 뜻이었다.
경완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진실이란 상대적인 법이니까.
[음, 알겠습니다. 조심하죠.]
[한 가지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저희 비질란스가 활동을 중단한 건, 위버멘쉬가 우리 동조자들을 흡수했기 때문이에요.]
[동조자라면?]
[충분한 징벌을 받지 않은 자들을 징치하는 데 협조해 준 이들이요.]
위버멘쉬가 비질란스를 흡수했다?
경완이 물었다.
[이유는 알고 계세요?]
[음지에서 활동할 초능력자가 필요하기 때문으로 보고 있어요.]
고개가 끄덕여지는 추론이었다. 위버멘쉬가 합법적인 사업을 하고 있지만, 경완은 음지에 있던 위버멘쉬가 완전히 양지로 옮겨왔다는 식의 순진한 판단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음지에 있던 위버멘쉬가 양지로 그 영역을 확장했다고 보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족해진 음지의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음지에서 활동하는 비질란스의 초능력자들이 필요해졌다는 논리는 위버멘쉬의 입장에서도 합리적인 인력 수급 방법이었을 것이다.
사적제재를 벌인 초능력자들이 양지에서 활동하기엔 부담이 클 테고 산 입에 거미줄 칠 순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위버멘쉬가 원했다고 그들이 위버멘쉬에 흡수된 건 아닐 것이다. 그들에게 충분한 당근이 제시되었을 테니 그들도 수락한 것이다.
경완이 물은 건 그 부분이었다.
[아니, 위버멘쉬에 포섭된 그들의 이유요.]
여전히 베일에 가려진 위버멘쉬의 전략과 제공 가능한 자원을 엿보는 게 더 생산적이었다.
목소리는 조심스럽게 추론했다.
[……아마도 정의가 아닐까 싶어요.]
[비질란스의 스탠스로는 만족이 안 되던 모양이죠?]
비질란스는 원래 범죄 피해자들이 초능력 각성을 하면서 범죄자에 대한 상식적인 처벌을 사적으로 행하기 위한 집단이었다.
돈이 많아서, 또는 법적인 증거가 없다고, 피해자의 증언을 믿지 못한다고 징치하지 못한 죄에 정당한 대가를 받아내자는 것.
하지만 비질란스는 그들의 행동이 사법체계 자체와 치안을 붕괴시키는 걸 원하진 않았다. 무질서가 무고한 이들에게 가져온 피해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허술한 사법체계 대신 정의를 수행하겠다고 가해자와 똑같은 수준으로 전락할 순 없다는 것.
그것이 비질란스의 입장이었다. 충분히 납득이 되는 논리였지만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는.
목소리는 그것을 인정했다.
[저희의 방침이 모자란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그럴 수도 있죠. 복수심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도 해소되지 않는 감정이거든요.]
고대 함무라비 법전에 기록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건 야만적인 시절의 잔인한 법이 아니라 한도가 없었던 복수에 상한선을 그은 법률이라 해석하는 편이 옳았다.
날 때린 자는 이빨을 부러뜨려야 하고, 내 팔을 부러뜨린 자는 두 다리를 아작내야 했으며, 내 아이를 죽인 자는 그 가족을, 그 혈족의 맥을 완전히 끊어야 성이 차는 것이 바로 인간이란 짐승이었다.
세상에 그런 인간이 어디 있냐고?
제도 밖에 있는 인간은 원래 그렇게 야만적일 수밖에 없었다. 흥분한 감정을 다스려 줄 법률과 사법체계란 인실좆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길들여진 맹수보다 야생의 맹수가 사나운 이치와 마찬가지였으며 인간은 원래 타고나길 겁 많은 맹수로 태어났다.
그러니 제도가 자신과 가족을 보호해주고 있다고 믿고 야성을 버린 인간이 그 제도로부터 배신당하거나, 혹은 그 제도가 유명무실하다고 느꼈을 때 타고난 야성이 드러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치안이 무너진 곳에서 어떤 일이 생기는지 보면 명확했다.
그리고 위버멘쉬가 그 가려운 곳을 잘 긁어준 거겠지.
[아무튼, 유감입니다.]
[당신은 부디 유혹에 빠져서 스스로를 망치지 마세요.]
비질란스는…… 분출할 곳이 없는 분노를 해소해서 피해자들을 일상으로 돌리고 싶어했지만 실패했다고 목소리는 담담히 고백했다.
[그럼 제 연락은 이게 마지막입니다. 더 이상 연락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군요.]
[제 동지들은 저를 오라클이라고 부릅니다.]
들은 적이 있었다. 비질란스라는 조직의 체계를 지탱하고 유지하는 핵심 인물.
마치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듯이 자기소개로 작별인사를 건네는 그녀에게 경완도 마찬가지로 작별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끝나게 되어 유감입니다.]
[그럼 이만.]
그렇게 텔레파시가 끊기고 연결되었던 패스가 사라졌다.
경완은 새롭게 들어온 정보를 어떻게 다룰까 고민하다가 결정했다.
그래, 못들은 걸로 하자.
* * *
경완은 영향력이 생각보다 큰 인물이었다.
그는 본인이 사회에 세상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을 과소평가하지 않았기에, 그가 나서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면 나서고 싶지 않았다. 그가 은둔에 가까운 방콕 생활을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나돌아다니면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발견될 것이고, 그러면 가만히 있자니 스트레스받고, 움직이자니 뒷감당하기가 귀찮고.
언젠가 미연과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경완이 집구석에 좀 처박혀 있지 않았으면 하는 눈치로 인한 갈등이 그 시발점이었지만 경완의 논리에 미연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시설에 있을 때 경험했던 그의 ‘욱하는 성미’가 그를 결국 소년원에 보내지 않았던가?
또 그런 일이 발생하는 건 미연도 원치 않았다.
그녀도 사회의 불합리한 면을 알고 있었고, 경완이 그런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졌을 때 과연 가만히 있어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힘이 모자라도 걱정인데 힘도 충분한 것도 걱정이었다. 중국을 저렇게 만들 수 있을 정도의 폭력이 한국 사회에 자리한 부조리를 향했을 때 일어날 혼란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어 어떻게 끝날지 미연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그녀의 남자는 뭔가를 만들고 일으키는 것보다는 파괴하고 부수는 쪽으로 매우 출중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완은 미연의 암묵적인 허락하에 최소한의 사회생활만을 유지하며 세상에 벌어지는 일에서 시선을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얼마 전 비질란스의 연락과 그 대화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였다.
하지만 세상만사란 얽히고설키는 법. 판검사 살해 사건의 여파는 위버멘쉬 한국 연수원까지 뻗쳤다.
“어째 한 명이 안 보이는데?”
오늘은 그간의 강의가 어느 정도 성과를 얻었는지 테스트하는 중요한 날이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김배진. 청각계열의 에스퍼이자 신체변형능력을 가진 소년.
경완은 일단 다른 아이들부터 시험을 쳤다. 경무호는 자신의 전기능력으로 간단한 연산장치(?)를 만들어냈고, 김신은 자신의 신체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되었던 무게 변환 능력을 외부로 확장하는 것에 성공했으며, 강미령은 물성변질 능력을 이용해 물성의 영구변형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동호는 그 파이로키네시스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시험이 다 끝날 때까지 김배진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땡땡인가?”
평소라면 별생각이 없었지만 테스트 날에도 오지 않으니 이상했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물어봤지만 어찌 된 일인지 연락을 받지 않고 모른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별일 아니겠지.
경완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고 테스트를 평가하는 순서로 넘어갔다. 테스트 결과를 경완의 식견으로 분석해서 앞으로 발전방향과 그 가능성에 대해 설명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때 한 소년이 뛰어왔다. 김배진이었다.
“강사님!”
“늦었네?”
“도와주세요!”
그렇게 지르듯 외치는 김배진의 얼굴은 울상이었다.
경완은 고개를 갸웃했다.
“뭘?”
“도와줄 사람이 강사님밖엔 없어요.”
“그러니까 뭘?”
경완이 당황하지 않고 반복해서 묻자 김배진은 더듬더듬 두서없이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이 테스트에 도착하지 않은 이유도 포함되었다.
“어. 그러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셨구나.”
“살해당하셨어요!”
“일단 애도를 표한다.”
“흐흑!”
“그러니까 요새 유명한 판검사 살해범에게 당하셨다고?”
“모방범이에요! 우리 아버지가 부패한 검사일 리가 없어요!”
과연 그럴까?
경완은 비질란스의 오라클이 전해준 정보를 떠올렸다. 위버멘쉬가 비질란스의 인력을 흡수했다고.
그 인력 중엔 높으신 분들을 매우 불쾌하게 만든 사망기자가 있다면, 그리고 그 사망기자의 정보력이라면, 그 정보력이 판검사 살해범에게 들어간 거라면, 그리고 김배진의 부친을 죽인 범인이 모방범이 아니라 정말 판검사 살해범이라면, 김배진의 부친은 부패검사임이 분명했다.
인간은 이중적이다. 밖에선 천하의 악인이라도, 집에선 세상 다시 없을 다정한 부모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경완은 김배진의 말만 믿고 자신의 원칙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물론 소년의 사정이 딱하고 그동안 가르친 정도 있어서 안타까웠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널 도와줄 생각은 있어.”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제가 있다.”
“…….”
경완이 단서를 달자 김배진은 입을 다물고 긴장했다.
그런 소년에게 경완은 경찰청장, 서울지검장, 국정원 차장 등이 다녀간 일을 언급했다.